♣ 崇祖惇宗/독립운동

남명 학맥도에 나오는 성재 허전은 누구일까?

도솔산인 2012. 4. 12. 16:21

 

李瀷[1681(숙종 7)~ 1763(영조 39)]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漵)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安鼎福[1712(숙종38)~1791(정조15)]조선 후기의 실학자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서술했으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그 뒤 이곳에 거주하면서〈성리대전 性理大全〉을 분석하고 〈치통도 治統圖〉·〈도통도 道統圖〉 등을 저술하는 등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1746년 이웃 고을인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을 만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이듬해 만녕전참봉으로 첫 벼슬에 올랐다. 1751년 의영고참사, 이어 정릉직장·귀후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45세 되던 해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쓰기 시작해 1759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20여 년 간 이익·윤동규(尹東奎) 등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는 익위사익찬이 되었고, 4년 뒤 정조가 즉위하자 목천 현감을 지냈다. 그 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 黃德吉[1750(영조 26)~ 1827(순조 2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길(耳吉), 호는 하려(下廬)·두호(斗湖). 아버지는 이곤(以坤)이며, 어머니는 조경채(趙景采)의 딸이다. 안정복(安鼎福)의 문인 으로 이황(李滉)·정구(鄭逑)·허목(許穆)·이익(李瀷)의 학통을 계승했다. 일찍부터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어 학예로 이름이 높았으며, 거처를 '하려'라 짓고 관직을 단념한 채 성리학만을 연구했다. 주자의 태극설을 계승하여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을 주장했고, 기대승(奇大升)과 이이(李珥)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하면서 이기구발설(理氣俱發說)을 주창했다. 편서로 〈방언 放言〉·〈일용집요 日用輯要〉·〈동현학칙 東賢學則〉·〈도학원류찬언 道學源流纂言〉·〈속찬언〉·〈사례요의 四禮要儀〉·〈동유예설 東儒禮說〉·〈경훈사교록 經訓四敎錄〉·〈수사연원록 洙泗淵源錄〉 등이 있고, 저서로 〈하려집〉이 있다.

 

 

許傳[1797(정조 21)~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아버지는 정언 형(珩)이다. 안정복(安鼎福)에게서 이익(李瀷)의 학문을 사숙(私淑)한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이다. 1835년(헌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을 거쳐 전적·지평·정언·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847년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 홍문관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이후 경연에 참가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강(講)하는 한편, 〈사의 士儀〉·〈종요록 宗堯錄〉 등을 저술했다. 1860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조세 및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농민항쟁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삼정책 三政策〉을 올렸다. 1864년(고종 1)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鄕約)을 강론했으며 유림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한성부좌윤·예문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허전은 이익·안정복·황덕길에 이은 남인계 학자로서 유학의 거두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과제 해결에도 충실했던 경세가(經世家)였다. 그는 〈삼정책〉 등에서 임술 농민항쟁의 기본 원인인 삼정문란과 관련하여, 전정(田政)은 양전(量田)이 행해지지 않아 경계가 문란해지고 이에 따라 조세가 증가하며, 특히 이서(吏胥)들이 화폐경제를 이용하여 취식(取息)함으로써 폐단이 증폭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군정(軍政)에 대해서는 경군(京軍)에게 군전(軍田)을 지급하여 병농일치제로 개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군제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했다. 환곡(還穀)에 대해서는 고리대를 일삼는 환곡제를 전면 폐지하고 오직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사창제(社倉制)를 병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삼정문란을 단순한 운영상의 폐단으로만 보지 않고 그로 인한 조세의 증가와 부세 불균(不均)의 현상이 농민층 몰락을 촉진하며 이러한 농민층 분화가 항쟁의 원인임을 지적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지 불균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전제를 시행하기는 어려우므로 대신에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하고 매매를 제한하여 점진적인 토지재분배를 실행하려 했다. 또한 고용노동 등을 일반화시킴으로써 부농층의 발전을 도모하고, 토지분배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아직 항산전(恒産田)을 마련하지 못한 무산자(無産者)를 위해 직업을 마련해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농민항쟁을 발생시킨 기본모순을 토지소유관계의 변화에서 오는 계급모순으로 파악하고, 항쟁의 주체가 농민층의 분화과정에서 발생한 몰락농민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같이 부세제도와 경제제도를 모두 개혁하려는 그의 개혁방안은 지주제의 해체와 농민경제의 안정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 실학자들의 농업론과 그 개혁의 자세, 이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출처 : 백과사전]

 

허훈許薰[1836.04.14~1907.08.23)]

 

허훈은 畿湖南人의 맥을 잇는 性齋 許傳의 제자 로 주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저자는 1867년 자신의 시문을 모아「修言」30권을 편차하였는데, ‘수언’은「周易」의 ‘修辭立其誠’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1907년 저자의 장례를 마친 뒤에 문인들이 覽德亭에 모여「수언」을 점검한 결과 이 중 28권은 이미 저자가 脫稿를 마친 상태였다.

 

 

1908년에 저자의 장자 許墉이 盧相稷에게 勘定을 부탁하여「수언」30권을 22권으로 편차한 다음 문집 이름을「舫山先生文集」이라 하고 1909년에 嶺南의 선비들과 친족들의 협조를 받아 문집을 板刻한 다음 판각을 청송 진보의 覽德亭에 보관하였다. 다음 해인 1910년 目錄 1권과 附錄 1권을 추가로 판각하고 金道和가 지은 墓碣銘을 첨부하여 24권 12책의 문집을 남덕정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다. 1983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國譯舫山全集」이 간행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출처] 허훈의 방산집 편찬 및 간행 |작성자 이택용

 

허위許蔿[1855(철종 6)~ 1908]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 자는 계형(季馨). 아버지는 진사 조(祚)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희(禧)와 맏형 훈(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95년(고종 32)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1896년 3월 김천읍에서 수백 명의 의병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이기찬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이들은 김산(金山)·성주에 진을 치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으나 공주와 대구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이은찬·조동호 등은 관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잔여의병을 수습,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해산한 후 진보로 가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9년 3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영희전봉사(永禧殿奉事)가 되었으며, 그뒤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성균관박사·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중추원의관·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었다. 이어 의정부참찬으로 있으면서 학교건립·전기증설·노비해방·은행설치 등 10조목의 상소를 올렸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일진회(日進會)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했다. 그는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참찬직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5년 3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으나 찬정 최익현(崔益鉉), 판서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다시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구금되었다가 강제 귀향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도·전라도·강원도·경기도 등을 돌아다니며 곽종석(郭鍾錫)·이학균(李學均)·유인석(柳麟錫)·정환직(鄭煥直) 등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적성·철원·파주·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병력을 증강하면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어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여, 이인영(李麟榮)과 상의한 뒤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1908년 1월말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공했으나 지원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어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자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그뒤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조인환(趙仁煥)·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의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항상 군율을 엄히 하여 민폐가 없도록 했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할 때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뒤에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1908년 4월 이강년(李康秊)·유인석·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 회복, 이권침탈 중지 등 30개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했다. 그해 6월 11일 경기도 영평군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학맥도 : 이익-안정복-황덕길-허전-허임(허위조부)-허훈(허위장형)-허위

 

노응규盧應奎[1861.03.15~1907.01.04] 조선말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종증조부이기도 하다.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고, 을미사변 당시에는 일본의 만행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규장각 주사와 동궁시종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하 의병들 중 일부는 진주와 안동에서 약탈과 난리를 일으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본관은 광주(光州)으로 호는 신암(愼菴)이다.

 

노응규는 경상남도 함양 태생으로 아호는 신암(愼菴)이다. 유명한 유학자인 허전의 제자였으며, 위정척사론의 거두인 최익현과 송병선, 송근수에게서도 사사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진데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거병하게 되었는데, 노응규도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인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은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진주의병진(총대장 노응규)을 구성하게 되었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하여 김해까지 손에 넣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개입에 밀려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노응규 의병진 일부는 행패를 부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매천 황현의 증언에 의하면 '1897년 초 노응규 등은 진주에서 웅거하면서 전 경내를 분탕하니 주민들은 동학교도들의 행패를 만났다고 말했다.[2] 안동 주변 수십 군에는 난폭한 겁탈이 있었으며 이중으로 경군까지 유린했는데 공사가 도탄에 빠졌다.[2]'고 진술하였다.

 

이 일로 가족들이 피살되는 불행 속에 노응규는 호남 지방에서 피신하던 중, 1897년 말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상소를 올려 사면을 받았다. 이후 여러 나라의 세력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고종은 을미사변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유학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했고, 그도 규장각 주사와 동궁시종관 등의 직책을 맡아 고종과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의 피탈이 가시화되었고,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다시 거사를 준비하여 그해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신암의 학맥도 : 이익-안정복-황덕길-허전-노응규

 

性齋 許傳.hwp

 

性齋 許傳.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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