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八道士民書 勉菴 崔益鉉(1905년)
告八道士民書(勉菴 崔益鉉)는 曾祖考 諱 康卨(1874.1.11-1912.1.23)公이 필사한 것으로 선대로부터 傳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유림의 거두 勉菴 崔益鉉(1833~1906) 선생이 전국의 유림에게 起義擧兵할 것을 호소한 글이다. 한국문집총간 『勉菴集』(면암선생문집) 권16,「雜著」의 <布告八道士民>이라는 표제로 되어있는 것을 확인해보니, 제목에 布자와 3항이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배포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2002년 지산유고를 초역했을 당시만 해도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관심 밖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질 독립운동 역사 발굴을 외면하는 사학계와 국가보훈처,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있는 역사도 사장시키는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최익현(崔益鉉) [1833(순조 33). 12. 5~1906(광무 10). 12. 30]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 순국, 본관 경주(慶州) 호 면암(勉菴)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 본관은 경주, 아명은 기남, 자는 찬경, 호는 면암으로 1855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
嗚呼痛哉。今日國事。尙忍言哉。古之亡國也。只宗社滅而已。今之亡國也。並人種而滅。古之滅國也。以兵革。今之滅國也。以契約。以兵革。則猶有勝敗之數。以契約。則自趍覆亡之塗。嗚呼。去十月二十一日之變。是或全世界今古曾有之事乎。我有隣國而不能自交。使他人代交。則是無國也。我有土地人民。而不能自主。使他人代監。則是無君也。無國無君。則凡我三千里人民。皆奴隷耳。臣妾耳。夫爲人奴隷。爲人臣妾而生。已不如死矣。况以彼狐欺狙詐之術之施於我者而觀之。其不肯遺我人種於此邦之域者。不啻較然矣。然則雖欲求爲奴隷爲臣妾而生。寧可得哉。何以言之。國之有財源。猶人之有血脈也。血脈竭絶則人死。今我國之財源所出。若大若小。其有不爲彼攫者乎。若鐵路,礦山,漁採,蔘圃。皆一國生財之大源。而彼之占取。已有年矣。國之經用。惟有賦稅。而今皆奪入掌握。
至皇室費用。亦不免乞憐於彼而後得之。海關出入之稅。其數不貲。而我國不能有所問。電,郵兩司。乃通信之機關。而其關於國家者。甚重且大。而彼亦奪而據之矣。以言乎土地。則各港市若停車場等地。縱之數千里。橫之數三十里。皆爲彼所有。而原野膏腴之地。森林禁養之處。爲彼所勒奪者。不知爲幾處矣。以言乎貨幣。則白銅貨之弊。固爲大瘼。然其私鑄之惡貨。太半是彼人之爲。而及稱其釐正也。其新舊正惡。色質輕重。毫無彼此之別。而倍增其錢數而已。則只爲彼取利之地。而又以其紙片之不能通行者。強名之曰元位貨。使我血脈枯竭。百物不通。其㐫計毒手。吁亦慘矣。以言乎人民。則各處鐵路之役夫。日露相戰時。擔負之軍。皆牛鞭而豕驅之。少不愜意。輒殺之若刈草菅。使吾民父子兄弟。含寃抱讐而不得報。搢紳士庶之前後陳䟽者。皆薦國進忠謨者。而輒捕縛拘辱。大臣重臣。不少禮貌。則其輕蔑我無復餘地矣。列置其私人于各部。名曰顧問官。自攬厚俸。而其所爲者。則皆敝我爲彼之事而已。此眞所謂食其食而毁其瓦劃其墁者。此等不法不道壓迫劫奪之大者。擧其槩而猶如此。至其爲約不信。守盟不固之罪。則自馬關條約。以至日俄宣戰書。皆言大韓之自主獨立者。不啻丁寧。保我領土者。又不止一再。而皆容易棄之背之。不少留難。始焉誘我賊子址鎔。而勒爲議定書。終焉脅我逆臣齊純。而爲今新條約。至於置統監於國中。移外交於日本。遂以我四千年疆土。
三千里人民。爲彼之內地屬民。非止爲世界所謂保護國而已。然爲屬民則猶與其民爲平等對待。使之仍其居。而遂其生。國雖亡而人種猶不滅矣。試言以上所列諸不法不道之事者。其果欲遺我人種於此邦之域者耶。此其不盡坑吾民。則必驅之於曠漠不毛之地。而移殖其民焉。則不止。此西洋易人種之法。今日本所以施於我者。是也。然則向所云求爲奴隷臣妾而生而不可得者。其非恐動之語。亦可知也。况以我堂堂大韓禮義自主之民。區區屈首於讐賊之下。而欲丐一日之生。豈有愈於死者乎。下蔭之木。枝葉不茂。餘踐之草。萌蘖不長。奴隷之種。聖贒不生。此非其性質有異也。其壓迫伏制之勢。使之然也。我國自高麗以來。雖名爲中國之藩屬。然土地也。人民也。政事也。皆我自立。皆我自主。毫無彼人之所干涉。是以方其全盛也。勝兵百餘萬。財貨充府庫。百姓殷富。戶口滋殖。雖以隋煬帝唐太宗之威。而未免敗衂而歸。元世祖至八用兵而後取服。當我太祖時。倭人常屢侵而屢敗。壬辰之役。雖有大明之救援。而其回復全勝之功。皆在我兵沉沒倭兵七十餘艘於露梁。丙子之亂。若用林忠愍直擣巢穴之請。則淸人當立盡。惟恨不用其謀耳。非眞力不足也。由是觀之。我國雖褊小。其人性質強力。不必多讓於他國。但今文治之餘。民氣萎靡。不能振作。且不能通知天下之大勢。思有以合變之也。由其不知天下之大勢。是以死在目前而不能知。苟人人知其必死。則生之道乃在其中矣。
惟不知其必死。而猶慮其或生。故終於死而不能生耳。必死之證。旣如上所言。則或生之道。將何處見之乎。計今獨有各奮氣力。各勵心志。使愛國勝於愛身。惡爲人下。甚於惡死。能以萬人之心爲一心。則庶乎其爲死中求生之道耳。彼日本人者。雖其輕淺狡詐。無禮無義。不似人類者。然其強力獨勝之效則無他。惟能合其心。愛國之性。勝於愛身之性故也。况吾邦士民。素服習先王禮義之敎。而人人腦髓中。活潑潑之赤血。固與彼無異者乎。然則今日吾士民。最先急務者。在於察天下之大勢。知必死之故而已。蓋知其必死然後。氣力自奮。心志自勵。愛國之性自發。而合心之功。自見矣。於是而去依賴仰望之心。振頹惰萎靡之習。革因循姑息之賊。有尺進而無寸退。寧同死而不獨生。則衆心所結。天必佑之矣。獨不見夫閔,趙兩忠正之死乎。國家亡人民滅。非獨此二人之責也。然而此二人者。能以國家人民爲己責。捐生若鴻毛而不少顧者。所以示民必死之義而無二心也。苟吾三千里人民。皆能以二公之心爲心。持其必死之心而無二焉。則何逆賊之不能去。國權之不能復哉。益鉉誠淺力薄。旣不能竭忠告君。以銷患於未萌。又不能捐身殉國。以鼓發其民氣。俯仰慚恧。生無以對我數千萬同胞。死無以見二公於地下矣。玆敢不揆卑鄙。謹以今日時局大勢之所聞所見者。略爲此文。以布告于我全邦士民。惟願我全邦士民。勿以益鉉老耄將死之言而忽棄之。其各自勉自勵。毋令彼人。
其時急果遂其易人種之計則幸甚。合行事宜。槩列于左。
一。今番新條約擅許之齊純,址鎔,根澤,完用,重顯。此五賊者。乃不惟吾國家之罪人而已。實天地祖宗之讎也。全國萬民之讎也。宜亟討戮之不暇。而顧乃使之盤據於朝廷之上。雖有搢紳章甫請討之章。然尙未聞有一人擧劒向賊者。國家人民之恥。豈有大於此者乎。春秋之法。亂臣賊子。人人得以誅之。凡百士民及軍卒輿儓。皆以賊不討不生之義。各貼額上。努力自奮。誓殺此五賊。以除我祖宗人民之大讐事。
一。彼五賊者。旣以賣國爲伎倆。今日許一事。明日許一事。以至于昨年。議定書及今年五條約之印可。而無復餘地矣。畢竟其㐫謀逆圖。不使吾君。爲靑城五國之行。則不足以爲日本之大勳臣。凡我大小諸僚及兵卒百姓。皆發忠誠。思所以預防患事。
一。向見儒約所通告文。有勿納結稅。勿乘輪車。及布帛器用等。勿用彼物之語。誠確論也。蓋結稅所以供國經用者。而今皆入日人之金庫。安可以吾民之膏血。爲讐人食。宜自各其郡。收置于該里饒戶。待五賊掃除後。納于宮內府。可也。鐵路者。彼所以滅人國之一事。而每日乘車者。車不能容。何吾民之愚。至於是耶。試思各處。一日乘車之費。何啻以千萬計。財竭而國滅。豈非吾民之自取乎。其他布帛器物之爲。彼驅財者。又不知其數。噫。昔日不與彼通商之時。吾民果不可以生耶。不思甚也。願與我全國士民。一心相誓。除軍器銃砲以外。一切勿用彼物。雖其器械之利。非本國人製造者。亦勿購用事。 [추가된 부분]
아, 원통하도다. 오늘날의 국사(國事)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나라가 망할 때에는 종사(宗社)만 없어졌을 뿐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망할 때에는 인종(人種)까지 함께 멸망하는구나. 옛날에 나라가 망할 때에는 전쟁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멸망할 때는 계약(契約) 때문이겠는가. 전쟁 때문이라면 그래도 승패(勝敗)의 판가름이 있겠지만 계약으로 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 지난 10월 20일의 변고는 전 세계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외교하니, 나라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토지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임금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며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되었다면 살았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저들이 여우와 원숭이처럼 속이는 꾀를 우리에게 베푼 것으로 본다면 우리 인종을 이 나라에 남겨 두지 않으려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그렇다면 비로 노예와 신첩이 되어 살기를 구하려고 하지만, 어찌 될 수가 있겠는가.
무엇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나라의 재원(財源)은 사람에게 혈맥이 있는 것과 같으니, 혈맥이 모두 끊어지면 사람은 죽게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재원(財源)이 나는 곳은 크기를 막론하고 모두 저들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는가? 철로(鐵路)ㆍ광산(鑛山)ㆍ어장[漁採]ㆍ삼포(蔘圃) 등은 모두 나라의 재물을 내는 큰 근원인데, 저들이 차지해 버린 지가 이미 여러 해나 되었다. 그리고 나라의 경용(經用)은 오직 부세(賦稅)가 있을 뿐인데, 지금 모두 저들이 장악하였고 황실의 비용까지도 저들에게 구걸한 다음에야 얻는다. 해관(海關)에 출입하는 세금은 그 수효가 적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묻지도 못하며, 전신국(電信局)과 우편국(郵便局)은 통신 기관으로 매우 중대하게 국가에 연관되는 것인데 저들이 역시 빼앗아서 점거하고 있다.
토지로 말한다면, 각 항구의 시장 및 정거장 따위는 거리로는 수천 리가 되고 가로로는 수십 리나 되는데 모두 저들의 소유가 되어 버렸고, 산과 들의 기름진 땅과 삼림(森林)의 금양처(禁養處)로서 저들이 강제로 빼앗아 버린 것이 몇 곳이나 되는지 셀 수가 없다. 화폐(貨幣)로 말한다면 백동화(白銅貨)는 진실로 큰 병폐가 되는데 사사로이 만든 나쁜 화폐는 태반이 저들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정(改正)한다고 하면서 신구(新舊)의 좋고 나쁜 것과 색질(色質)의 경중(輕重)이 조금도 피차의 구별이 없는데도, 돈의 수량만 배로 증가시켰을 뿐이니, 다만 저들이 이익을 취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 통행할 수 없는 종이 조각을 억지로 원위화(元位貨)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우리에게 혈맥이 고갈되고 모든 물건이 소통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 흉계와 독수(毒手)는 아, 참혹하구나.
인민으로 말한다면 각처의 철로의 역부(役夫)와 일로전쟁(日露戰爭) 때의 화물을 운반하는 군사들을 모두 소와 돼지처럼 채찍질하고 몰아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아니하면 바로 풀을 베듯이 죽였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의 부자(父子) 형제들이 가슴에 원한을 품고도 복수하지 못하게 하였다. 진신(搢紳)ㆍ사서(士庶)들이 전후에 걸쳐 상소한 것은 모두 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러운 말을 올린 것인데 바로 포박하여 구속하고서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조금도 예우(禮遇)해 주지 아니하니, 그들이 우리를 경멸함은 다시 여지가 없다. 그들의 사인(私人)을 각 부처(部處)에 배치하여 고문관(顧問官)이라 하고 스스로 후한 녹을 먹으면서 그들의 하는 일은 모두 우리를 피폐하게 하고 저들을 위하는 일뿐이니, 이것이 진실로 이른바 ‘남의 음식을 먹으면서 남의 기와와 담을 무너뜨려 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법 무도하여 압박하고 겁탈하는 가운데에서 큰 것만을 대강 들어도 이와 같다. 약속과 맹세를 지키지 않은 죄에 대해 말하면, 마관조약(馬關條約)과 일아선전서(日俄宣戰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한의 자주독립을 명백히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영토를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모두 가볍게 버리고 조금도 어렵지 않게 배반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꾀어서 억지로 의정서(議定書)를 만들었고 마침내는 우리나라 역신(逆臣) 박제순(朴齊純)을 협박해서 지금의 신조약(新條約)을 만들었다. 심지어 서울에 통감(統監)을 설치하고 외교권(外交權)을 일본에 넘기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우리 4천 년 지켜온 강토(疆土)와 삼천리에 사는 인민을 저들의 내지(內地) 속민(屬民)으로 만들었다.
이는 세계에서 말하는 ‘보호국(保護國)’이라고 말할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속민(屬民)이라 하면 그래도 왜국의 백성과 평등한 대우를 받아 그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나라는 비록 망하더라도 인종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불법 무도한 일로써 본다면 그들이 과연 우리 인종을 이 나라에 남겨 두려 하겠는가? 반드시 우리 백성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지 않으면 광막(曠漠)한 불모지에 내쫓고 그들의 백성을 옮기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인종을 바꾸는 술책을 바로 오늘날 일본이 우리에게 시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노예나 신첩(臣妾)이 되어 살기를 구하여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는 당당한 대한의 예의를 지키는 자주 백성으로 구구히 원수의 아래에 머리를 숙이고 하루라도 더 살기를 빌고자 한다면 어찌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있겠는가? 그늘 밑에 있는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지 못하고 발에 밟히는 풀은 싹이 자라지 못하며, 노예의 종족에서는 성현이 나지 못하니, 이것은 성질이 달라서가 아니며, 압박하고 굴복시키는 형세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고려(高麗)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藩屬)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自主)하여 털끝만큼도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 때에는 승병(勝兵)이 백여 만이요, 재화(財貨)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인구가 번성하였다. 비록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 세조(元世祖)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服屬)시키었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왜적이 여러 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비록 명(明) 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倭船) 70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만약 임 충민(林忠愍 충민은 임경업(林慶業)의 시호)의 ‘곧바로 근거지를 쳐부수자’는 청을 들었다면 청(淸) 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멸망하였을 것이니, 그 꾀를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진실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은 문치(文治)만을 숭상한 뒤라서 백성의 기운이 허약하여 진작(振作)하지 못하였고 또 천하의 대세를 잘 알아 변통할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천하의 대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이 목전에 당하였는데도 알지 못하니, 진실로 사람마다 꼭 죽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이 그 가운데에서 나올 것이다. 다만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혹시라도 살 수 있기를 생각하므로 마침내 죽고 살지 못하게 된다. 반드시 죽게 될 증거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혹시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에 있어 오직 한 가지 각자의 기력을 분발하고 심지(心志)를 분려(奮勵)하여 나라를 몸보다 더욱 사랑하고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을 죽음보다 더욱 싫어하여 만인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으로 만든다면 거의 죽음에서 사는 방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일본 사람들은 비록 경박하고 교활하며 예의가 없어서 인류와 같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이 강력하고 승리하는 효과는 다름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사민(士民)은 본래부터 선왕의 예의의 교훈을 복습(服習)하였으며, 사람마다 뇌수(腦髓)에 끓는 붉은 피가 진실로 저들과 다름이 없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민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급선무는 천하의 대세를 살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까닭을 아는 데에 있을 뿐이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기력이 스스로 분발되고, 심지(心志)가 스스로 분려되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마음을 합하는 공효가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남에게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게으르고 나약한 습관을 버리며 옛날을 답습하고 편안하게 있으려는 해로움을 개혁하여 1척의 진보는 있어도 1촌의 물러남은 없어서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홀로 살고자 하지 않는다면 여러 마음이 단결된 곳에 하늘은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저 충정공(閔忠正公 충정은 민영환(閔泳煥)의 시호)ㆍ조 충정공(趙忠正公 충정은 조병세(趙秉世)의 시호)의 죽음을 보지 못했는가? 국가가 망하고 인민이 멸망한 것이 이 두 분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두 분은 국가와 인민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목숨 바치기를 마치 기러기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백성들에게 꼭 죽어야 할 의리로써 다른 마음이 없어야 함을 보여 준 것이다. 진실로 우리 삼천리 인민들이 모두 이 두 분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아 꼭 죽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딴마음이 없다면 어찌 역적을 물리치지 못하겠으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겠는가.
익현(益鉉)은 정성과 힘이 부족하여 이미 임금께 충고를 다하여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고, 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백성들의 용기를 진작시키지 못하였다.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부끄러워 살아서는 우리 수천만 동포를 대할 방법이 없고 죽어서는 두 공(公)을 지하에서 만날 방법이 없다. 이에 감히 나의 비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보고 들은 오늘날 시국의 대세를 가지고 간략히 이 글을 지어 우리나라 사민(士民)들에게 포고하노라. 오직 바라건대, 우리나라 사민들은 익현이 늙고 노망하여 죽으려 하는 말이라고 해서 소홀히 여겨 버리지 말고, 각각 스스로 면려(勉勵)하여 저들로 하여금 인종을 바꾸려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다.
시급히 행하여야 할 일을 대강 아래로 나열하여 기록한다.
1. 금번에 새로운 조약을 제멋대로 허락한 박제순(朴齊純)ㆍ이지용(李址鎔)ㆍ이근택(李根澤)ㆍ이완용(李完用)ㆍ권중현(權重顯) 등 오적(五賊)은 우리나라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지 조종(祖宗)의 원수이며 전국 만민의 원수이다. 마땅히 빨리 토벌하여 죽여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을 조정의 윗자리에 있게 하였고, 비록 진신(縉紳)과 장보(章甫)들이 토벌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한 사람도 칼을 들고 오적을 치려고 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국가와 인민의 수치가 무엇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亂臣)ㆍ적자(賊子)는 사람마다 그를 잡아 죽여야 한다.’ 하였으니, 모든 사민과 군졸과 하인들까지 모두 적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살지 않겠다는 의리를 각각 이마에 붙이고 스스로 노력하고 분발하여 맹세코 저 오적을 죽여서 우리 조종(祖宗)과 인민의 큰 원수를 제거할 것.
1. 저 오적은 이미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기량(技倆)으로 여겨 오늘 한 가지 일을 허락하고 다음날 또 한 가지 일을 허락하여 작년의 의정서(議定書)와 금년의 오조약(五條約)을 인준하는 일에 이르러는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필경에 그들의 흉모(凶謀)와 역도(逆圖)는 우리 임금에게 청성(靑城)ㆍ오국(五國)의 길을 행하지 않으면 일본의 큰 공신이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모든 우리의 높고 낮은 관료(官僚) 및 병졸과 백성들은 모두 충성을 일으켜서 화환(禍患) 예방하기를 생각할 것.
1. 전번에 유약소(儒約所)의 통고문(通告文)을 보니, 결세(結稅)를 내지 말고 윤차(輪車)를 타지 말자는 것과 포백(布帛)ㆍ기용(器用) 등을 저들의 물건은 쓰지 말자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진실로 확론(確論)이다. 결세(結稅)는 국가의 경용(經用)에 이바지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모두 왜놈의 금고에 들어가니, 어떻게 우리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가지고 원수의 먹이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각각 자기 고을에서 해당 마을의 부유한 집에 거두어 두었다가 오적이 제거된 다음 궁내부(宮內府)에 바쳐야 한다. 철로(鐵路)는 저들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수단의 한 가지인데 매일 기차를 타는 자가 다 실을 수 없을 정도이니, 어찌 우리 백성의 어리석음이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생각해 보건대, 각처에서 하루에 차를 타는 비용이 어찌 천만만 되겠는가. 재물이 다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우리 백성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타 포백과 기물로 저들이 재물을 몰아가는 것도 또 그 수를 셀 수가 없으니, 아, 지난날 저들과 통상(通商)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 백성들이 과연 살 수가 없었던가. 이것은 매우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전국의 사민들은 한마음으로 서로 맹세하여 군기(軍器)와 총포(銃砲)를 제외하고는 일체 저들의 물건을 쓰지 말고 기계(器械)의 편리한 것이라도 본국 사람이 제조한 것이 아니면 또한 사서 쓰지 말 것.
[주D-001]청성(靑城)ㆍ오국(五國)의 길 : 오랑캐인 금(金) 나라에 잡혀가 죽은 송(宋)의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을 말한다. 청성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현(開封縣)에 있는 지명으로 송 나라 때에는 이곳에 하늘을 제사하는 재궁(齋宮)이 있었는데, 휘종과 흠종은 모두 이곳에서 금(金)의 점몰갈(黏沒喝)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으며, 오국(五國)은 오국성(五國城)을 가리킨 것으로 금 나라에 잡혀 온 휘종은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다. 《宋史 卷22 徽宗本紀, 卷23 欽宗本紀》
[출처] 팔도 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布告)함/勉庵|작성자 모르니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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