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1895년 陶山通文 安東으로 다시 돌아가다

도솔산인 2018. 7. 1. 08:11


1895년 陶山通文 安東으로 다시 돌아가다(180630)



18958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51129일 안동 향교에서 '陶山通文'이 전국의 유림에게 발송된다. 12월 초쯤 은밀하게 인편으로 안동에서 예안, 문경을 거쳐 상주에서 化嶺縣(화령현) 錦川(금천)에 은둔(隱遁)하고 있는  止山 선생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당시 止山 李起璨(이기찬,1853~1908) 선생은 스스로 錦樵山人(금초산인)이라 일컫고, 속리산 남쪽 尙州郡 化嶺縣 錦川(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1894년 인근 보은에서 손병희의 동학군들이 성하던 지역이라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산유고 지산 선생의 연보를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동학의 환란이 인근 보은과 상주를 휩쓸었지만 지산 선생을 찾아온 동학의 수괴는 지산 선생의 학문과 인품에 감동하였고 화서 지역은 다행히 동학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천탁산에 마을 주민을 피하게 하고 동학의 수괴와 담판을 하여 환란을 막았고, 동학이 쇠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에 쫓긴 동학도가 오히려 금천으로 선생을 찾아와 몸을 숨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학 농민군을 완전히 진압한 일본은 급기야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俄館播遷(아관파천)이라는 굴욕을 당했으니,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급박한 시기였다. 안동 향교에서 온 '陶山通文'이 창의 거병을 하는 시발점이 되었고(1896년 2월 8일 甘川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창의를 결정함), 김산(金泉)과 상주, 무주와 영동, 그리고 보은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지산 이기찬 선생과 청흥 문중은 그 폭풍의 중심에 있었다.


 

나는 안동향교에서 온 '陶山通文'勉菴(면암) 崔益鉉(최익현, 1833~1906) 선생의 '告八道士民書(고팔도사민서)' 毅菴(의암) 柳麟錫(유인석, 1842~1915) 선생 '通告一國搢紳士林書(통고일국진신사림서)''지산유고 영인본 2軸'함께 관련 간찰19점을 木函(목함)에 넣어 123년 만에 통문을 보내온 安東을 찾게 되었다. 나라를 원망하고 선대를 원망한들 청흥 문중이 다시 일어서는 것도 아니기에, 묵혈(墨血)로 쓴 선대의 유묵과 필사본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기탁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기탁한 유물은 先曾祖考 諱 康卨公(강설공, 1874~1912)先從曾祖考 諱 康夏公(1873~1940)의 지산유고 草稿와 倡義 通文(창의 통문)과 檄文(격문), 召募 檄文(소모 격문)과 簡札(간찰) 詩篇(시편) 등이며 지난 일백여 년간 청흥문중의 기록이다. 1896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 1910년 경술의병에 참여한 청흥문중은 경술국치를 당하, 流民(유민)이 되어 전국으로 흩어졌고, 1939년 先祖考 仁宰公(인재공, 1897~1960)先考 廷浩公(정호공, 1919~1982)께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통문과 격문 가승보를 넣은 木函(목함) 하나만을 등에 지고 충남 대덕군 삼정리를 떠나 개마고원(함경남도 고원군 인흥면 둔전)에 들어가 칡을 캐 먹으며 7년 동안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고 한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을 나와 예천의 박갑로 선생의 안내로 白下 金大洛(1845~1914) 선생의 白下舊廬(백하구려)와 石洲 李相龍(1858~1932) 선생의 臨淸閣(임청각)을 둘러보았고, 예천에서 박갑로 선생께 이른 저녁 식사를 대접해드렸다. 그런 뒤 상주로 내려와서 상주 향교 강경모선생을 만나 경술의병의 소모 격문과 통문 등의 자료를 드리고 대전으로 돌와왔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기탁한 자료는 스캔과 영인을 하여 국가기록원에 등재될 예정이며, 지산유고 등 자료는 가능한 내년에 예산을 책정해서 문집으로 번역한다는 답을 둘었다. 그리고 지산유고의 행장과 연보는  국역에 들어간다고 했고 내가 초역한 창의 일기 초고는 교열을 본다는 답을 얻었다. 이렇게 1895년 11월 29일 안동 향교에서 보내온 도산통문 123년 만인 2018년 6월 30일 안동으로 되돌아갔다. 정신이 혼미하여 썩으면 육신 또한 쓸모가 없는 것이니, 나라가 없으면 가문이 무슨 소용이며, 가문이 없으면 가족이 무슨 소용이며, 가족이 없으면 나의 존재는 무슨 소용이랴! 나는 오늘 새벽 정좌를 하고 홀로 앉아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이 기록을 남긴다.



동행한 종형님 德揆氏, 東揆氏



독립운동연구가 예천의 박갑로 선생(中)


경북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 한준호님과 김동현님












백하구려 종택은 후손인 김시중 어른이 살고 계심.




金萬植(1866~1933) :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형일(亨一), 호는 근암(槿庵)이다. 할아버지는 경상도 도사(都事)를 지낸 김진린(金鎭麟, 1825~1895)이며, 만주 독립군 기지 개척의 지도자였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큰아버지이다. 1866(고종 3)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1(내앞마을)에서 김효락(金孝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만식은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1909년 석주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나라가 무너지자 친족인 김동삼(金東三)과 이상룡 등 안동 출신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할 때 선발대로서 만주 지역을 왕래하였다. 김만식은 191012월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19194월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를 출입하며 활동하던 중, 1928년 압록강 청성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김만식은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39월 세상을 떠났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세훈 선생님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 1914)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백하(白下). 출신지는 임하 천전이다. 1907년 유인식김후병하중환 등이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김대락은 매부인 석주 이상룡의 영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09년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되던 가산서당이 학생수의 증가로 인해 협소하게되자, 자신은 작은 집으로 물러나고 본 저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이상룡 등 문중의 청장년들이 신민회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 망명을 계획하자, 그는 앞장서서 망명을 결단하고, 그 해 1224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한 만삭인 손부와 손녀를 대동하고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19115월에 설립된 신흥학교 교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김대락은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12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작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출처 : 유교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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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18581228~ 1932615)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1925924일부터 1926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일명 이상희(李象羲), 이계원(李啓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고성이며 경상도 안동의 유림 명문가에서 3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생가인 임청각은 왕의 궁궐이 아닌 사대부 반가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이상룡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부속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했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무장 항일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만주에 군사 기구인 군정부를 설립했다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했다. 서로군정서 책임자로서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통군부를 수립했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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