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고노무현 전대통령 종증조부 신암(愼菴) 노응규

도솔산인 2009. 5. 25. 17:20

 

* 고노무현 전대통령 종증조부 신암(愼菴) 노응규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함양 안의 출신 노무현 대통령 종증조부 신암(愼菴) 노응규(1861~1907) 의병장과 그의 제자인 정도현,·박준필, 전 사과(司果) 임경희, 그리고 안의 장수사 승려 서재기 등 14~15명에 불과한 의병을 주축으로 진주성을 장악했다. <중략>

 

 고종의 선유칙서를 받고 의병을 해산한 후 노응규 의병장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삼가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중, 부형의 비보를 듣게 된다. 진주성 의병 해산이 있던 다음날 저녁, 안의 서리(胥吏)들이 흉계로 서재기 의병장을 살해한 후 노 의병장 집을 불태웠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말리던 형(응교)은 총살되고, 부친마저 화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던 것이다. 

 

 고종은 충의로 일어섰던 노응규·민용호·허위 등 의병장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들 모두 '독립신문'이 '비도 괴수'로 공격했던 의병장들이었다. 노응규는 규장각 주사에 배임되어 벼슬길로 나아간 뒤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의관을 거쳐 동궁시종관에 오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경계 지역인 충북 황간(현 영동군 황간면)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장차 서울로 진공해서 일제 통감부를 쳐부술 계획으로 문태서·이장춘 등 덕유산 의병부대와 합동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왜인의 밀고에 의해 충북 청산 경무분서 소속 순사들에게 의진의 장령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노 의병장은 경성경무감옥서로 이감되었는데, 옥중에서도 시종 뜻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을 당했다. 동지들이 들여주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거부한 채 투옥된 지 1개월도 안된 1907년 2월 16일, 옥중에서 절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에서

 

덕유산장수사조계문

 

  함양 안의에 있는 옛 장수사 터에는 '덕유산장수사조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이 남아있었다.

(남덕유월봉금원기백 종주산행시 081107~09)

 

 남명 조식선생의 산천재에 가면  학맥도의 맨끝에 노응규라는 이름이 있다. 산천재 문화 해설사에게 '혹시 "신암 노응규선생"에 대하여 묻는 분이 없던가요? 노응규선생은 노무현 대통령의 종증조부입니다. 남명의 학문이 노대통령에게 닿아있습니다.' 라고 하고 발길을 돌렸다.

(산천재에서08.12.13)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山天齋에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浴川

 

                          曺植(조식)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

   

 

* 냇물에 티끌을 씻으리...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을,

천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혹시 오장에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리....

 

*倘: 혹시, 갑자기 당, * 刳: 가를, 도려낼 고 

 

 욕천 : 남명 49세(1549년) 때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