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스크랩] 안중근의사의 가문

도솔산인 2007. 2. 8. 00:26

안중근의사의 가문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의 꽃이다. 그러나 안의사의 동생, 조카 등 일가 40여명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을 보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라는 최고 훈장을 받은 안중근을 비롯해 동생 정근·공근 등 안의사 가문의 인물 11명이 명단에 올라있다.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가 없지 않으나 10명이 넘는 유공자를 배출한 것은 안의사 가문이 유일하다. 학자들은 “안의사 가문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며 심도있는 조사가 이뤄질 경우 더 많은 서훈자들이 배출될 수 있다고 밝혔다.

 

 

  ◇탄압 피해 만주·러시아로

  하얼빈 의거 후 여순감옥에 수감된 안의사는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2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즈음 안의사의 가족은 일제 탄압을 피해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갔다.

 

  이때 함께 간 안의사 가족은 모친 조씨(마리아) 등 여덟명. 그러나 일제의 추적은 러시아에까지 미쳤고, 1911년 여름 맏아들 우생(분도)이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이즈음 안의사의 직계 가족뿐 아니라 사촌들도 집단적으로 북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했다.

 

   1910년대 안의사 가문의 해외 망명생활은 독립운동을 모색하는 기간이었다. 안정근·공근 형제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상점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은 러시아가 한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이들 형제는 러시아인으로 귀화,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한다.

 

 

  ◇상해 임정에 참여

 

  안의사 가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족들은 그곳으로 떠났다.

 

  동생 안정근은 임정의 주요 연락업무와 재정업무를 맡는 등 임정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의 차녀 안미생은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뒷날 김구의 며느리가 되었다.

 

  안공근도 임시정부에 들어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의사의 사촌인 안경근은 상해, 남경 등지에서 군관생도를 모집, 이들을 훈련시켰다.

 

  안공근의 큰아들인 안우생은 상해에서 한국청년전위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의 조카인 안춘생은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소령으로 광복군에 편입해 활동했다.

 

  학계는 일제시대 독립에 뛰어든 안의사 일가는 40여명으로 추산한다. 이중 서훈자는 안의사를 비롯, 안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의사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천주교에 개종한 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요인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해방 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져

 

  해방 후 귀국한 안의사의 일가는 대부분 김구의 임정조직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사람은 안의사의 사촌동생 안경근과 5촌조카 안우생. 임시정부 군사위원으로 귀국한 안경근은 1948년 김구의 밀서를 갖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냈다.

 

  또 김구의 대외담당 비서였던 안우생 역시 남북합작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안경근은 ‘민주구국동지회’를 만들어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5·16군사정권에 의해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감옥생활을 마친 이후 세상을 떠났다. 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안공근의 3남 안민생 역시 해방 후 평화통일운동과 교원노조운동에 투신해 5·16후 반국가범으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최고 명가이지만, 안중근 가문의 후손들은 해방 이후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유족들이 해외로, 북으로 흩어져 남한에서 활동하는 후손은 많지 않다. 안의사의 직계로, 장남 분도는 요절했고 차남 후생은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사망했다. 후생의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의사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딸 선호·연호씨도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안중근기념사업회에서 소재를 알고 있는 안의사 혈연으로는 안의사의 외손녀 황은주·황은실씨와 조카 안춘생씨, 안정근의 며느리 박태정씨 정도. 이 가운데 안춘생씨(93)는 해방 이후 국방국 차관보를 거쳐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하며 안의사 후손들의 대부역할을 해 왔다.

 

 

 

"가문의 독립운동 연구 아직 부진"

 

  “안중근 의사의 가문에서 수십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최근 방한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79)은 안의사의 가문이 독립운동 최고의 명가가 된 데에는 역설적으로 일본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안의사 가문이 살아갈 길은 독립운동뿐이었을 것이라는 게 최원장의 해석이다.

 

  최원장은 “안의사의 가문에서 수십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독립운동 서훈자가 11명에 그친 것은 학계의 연구가 부진한 탓”이라면서 학계의 분발을 촉구했다. 현재 안중근 일가의 독립운동 연구는 대부분 안의사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나마 깊이 있는 연구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안중근 가문 가운데에서는 안정근과 안공근에 대한 연구 논문이 1편씩 나왔을 뿐이다.

 

  “손기정 회고록에는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베를린에 유학했던 안봉근의 집으로 초청받아 김치와 두부를 제공받았다는 얘기가 나와요. 그 안봉근이 바로 빌렘(홍석구) 신부의 주선으로 독일에 유학간 안의사의 사촌동생입니다. 또 일본 간도불령선인 명부에는 안의사의 백부 안태진이 망명해 살던 간도의 집에서 대종교의 집회를 열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이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서훈 명부에는 올라있지 않지요. 연구가 진척되면 안의사 가문에서 더 많은 유공자가 나올 것입니다.”

 

  최원장은 “학계의 안중근 연구는 안의사가 위대하다는 총론에만 치우쳐 있다”며 “사료 발굴과 현장 조사를 통한 각론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4년 뒤면 하얼빈의거 100주년인데 제대로 된 안의사 평전은 물론 안의사 가문에 대한 변변한 연구가 없다”고 안타까워한 그는 “이제부터라도 우리 학계가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손한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장은 1957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한 뒤 안중근 자료 조사·연구에 몰두해왔다.

 

  최근에는 정부의 안중근 유해발굴 및 봉환 사업을 돕기 위해 한·일을 오가며 바쁘게 보내고 있다.

 

 

  조운찬 기자/경향신문

 

출처 : 한국문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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