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스크랩] 일제 식민기의 근로 봉사대

도솔산인 2006. 10. 25. 18:34
일제 식민기의 근로 봉사대



1930년대 사진으로 동덕고등여학교의 자전차 부대 사열장면




1930년대 동덕고등여학교 학생들의 근로보국대 활동사진




이화여자고등학교 근로 보국대 감자 캐기(1944-청평)
http://www.ewha.hs.kr/history/oldalbum/link/album4/ab4_11.html




1940년대 동래고등학교 근로보국대의 모습
http://www.donggoya.net/product/product_act.html




1942년 이후의 동래고등학교 일제하의 강제 근로 봉사 작업광경
http://www.donggoya.net/product/product_act.html




경북기독전보근로봉사대
강제 노동에 동원된 목회자들 (1944년)
http://kcm.co.kr/korchur/chpic/1944-2.html




감리교평안교구 근로보국대
목회자를 노역장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1944년 조직되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4-1.html




항만 하역연성대
http://user.chollian.net/~jkl1/hisa/ilja2.htm

근로보국대생활 수료증 - 보러가기



조선징용문답 - 황토문화 자료실에서...

이 책은 1944년 매일신보사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로 발행한 책으로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합리화하려는 문답식의 해설서이다. 일제는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는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였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한민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징용제를 즉시 시행하지 않고, 모집 형식의 노무 동원 계 획을 실시하였다. 1941년에 일제는 국민 근무 보국 협력령을 시행하여 노동력 동원을 더욱 강력히 시행하 였고, 1942년에는 대규모의 국민 동원 계획을 세우고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였 다.

1944년에는 국민 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연행 방법으로 징용제를 시행하였다.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은 일본 각지의 탄광, 수력발전과 철도 등의 공사장, 군사 공장 등에서 참혹하게 중노동으로 혹사를 당하 였다.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로 연행된 한국인 노무자 수는 1939∼1945년 사이에 약 113만 명에 이르 렀다. 또한 일제는 1944년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을 공포하고, 12∼40세의 미혼 여성들 수십만 명을 군수 공장이나 전선으로 연행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으니 천추만대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근로보국대

중일전쟁 후 조선인 노동력 수탈을 위해 일제가 강제연행하여 만든 조직.

근로보국대는 1941년 '국민근로보국령'에 의해 편성된 것으로 철도·도로·비행장 및 신사(神社)의 건립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다. 각종 직장보국대를 비롯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 ·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 및 농민들로 조직된 강제노역보국대 등이 있었다.

농민보국대의 경우 징용·징발·징병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다시 이에 강제연행되었다. 근로보국대 형식으 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숫자는 1938~44년까지 약 762만 명 정도였다.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을 계기로 세계가 경제공황에 빠졌다. 세계대공황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비해 취약한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일제는 경제적 위그를 돌파하기 위한 일환으로 만주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침략전쟁의 전진기지로 이 용하는 동시에 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제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떠넘기는 데 대응하여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었다 .

이에 일제는 문화통치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민족·4계급분열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을 무자비 하게 탄압하는 파쇼적 지배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결과 1930~35년 사상사건으로 피검된 사람의 수가 2만여 명에 달했으며, 1930년 한 해에만 2,385건의 각종 집회가 금지되거나 제한·해산되었다. 특히 1930년대 전반기에 급속하게 발전하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 을 받았다.

농가경제가 악화되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만주, 일본 등지로 유랑했다.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수가 1925~27년 12만 6천 명에서 1933~35년 33만 2천 명으로 2.6배 이 상 증가했다.

1936년 일본에 체류한 조선인은 78만 명, 만주에 체류한 조선인은 93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거주 조선인들은 대부분 토목, 건축, 항만 공사장과 광산 등지에서 일했으며, 공장노동자가 된 경우 에도 작업환경이 열악한 중소공장에서 민족적·계급적 차별을 받았다. 만주거주 조선인들도 일제 자본과 중국인 지주에 의해 자본주의적·봉건적 수탈을 당했다.

1930년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농민의 투쟁은 전례 없이 고양되었다. 1926년 17건에 불과하던 소작쟁의는 1931년 57건으로 늘었으며 노동쟁의도 같은 기간에 85건에서 201건으 로 급증했다.

대중운동이 고양된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대공황에 다른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파탄에 있었지만, 1920년 대부터 급속히 증가해온 대중조직도 운동의 고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1930년 말경부터 본격화된 신간회, 근우회, 청년총동맹의 해소과정에서 계급운동 강화방침이 결의됨 에 따라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이 각지에 새로 결성되거나 강화되었다.

1929년경부터 활발한 공산당재건운동을 벌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1년 말경부터는 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먼저 건설하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역량을 토대로 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30년대에 조직된 경성콩그룹,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왜관공산주의자협의회 등 수십 개에 달하는 지역 단위의 공산주의자 조직은 대체로 이런 방침에 따라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중국 내 항일투쟁의 격화 등으로 일본·만주 블록 경제체제가 심각한 위협을 받자 독점자본과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1937년 7월 중국을 침략했다. 이들은 반체제적인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한편, 국가체제를 급격히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했다. 일제는 임시자금조정법(1937), 국가총동원법(1938) 등의 법령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강력한 파쇼적 통제력을 행사했다. 나아가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했으며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2차 세계대 전에 가담했다.

일제는 1936년 8월 군부파시스트인 미나미南次郞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하는 한편, 조선민중을 철저히 통 제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를 위하여 시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경찰력을 증강하고 그 기구를 개편·강화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했다. 일제는 조선민중을 강제 연행하여 공사장, 군수공장, 전쟁터 등지로 내몰았다.

1939년에 공포된 국민징용령은 그를 위한 법적 장치였다. 처음에는 민족적 반항을 우려하여 모집형식을 취했지만, 노동력 부족현상이 지속되자 강제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에는 지역 유지와 관리·경찰 등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근로보국대와 정신대 등의 허울 아래 공공연하게 납치, 연행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은 광산, 발전소, 도로공사장, 군사기지 공사장 등에서 노동자나 포로감시원, 군 위안 부 등이 되어 살인적인 착취와 학대에 시달렸다.

1939년 이후 일제가 가제연행해간 인원은 한반도 내에 480만 명, 일본열도에 152만 명, 군대요원으로 20~30만 명, 군 위안부 14만 명 등 총 700여만 명에 달했다.
▲ 김광우의 <일본 군부파시스트는>

자료 엠파스 검색

 
출처 : 블로그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 글쓴이 : 크레믈린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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