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의 생애
(1854. 4.
1~1908. 9. 27)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허위 선생 평(評) - 달이 대장군 되니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855년 4월 2일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슬기가 나타나서 일곱 살 때부터 숙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달이 대장군 되니, 별이 많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 “꽃을 꺾으니 봄이 손에 있고, 물 길으니 달이 집에 들어온다(折花春在手, 汲水月入家)”는 글을 지어서 집안어른들이 모두 그 재주에 놀라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열다섯 살에 삼경을 독파하였고, 천문 지리와 병진(兵陣), 산수도 그 요점을 다 깨쳤다. 아울러 춘추강목과 육도삼략에도 심혈을 기울여 익혔다. 왕산은 천성이 워낙 과묵한지라 동년배 친구들이라도 그의 깊은 공부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스물다섯에 어머니를, 스물일곱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흘러 부모의 입에 넣으면서 매우 비통해 하였다. 왕산은 한 평생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옷은 화려한 것을 입지 않고 늘 굵은 베옷을 입으면서 “이것이 선비의 본색이다”고 하였다.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평정하자 우매한 사람들이 비적을 소탕하였다고 좋아하였으나 왕산은 격앙된 충성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탄식하기를 “일본군대가 이를 기화로 우리나라를 쳐 없애는 화를 입을지 누가 알겠는가?”고 흉악한 일본의 본심을 그때부터 짐작하였다. 을미(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은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찔러 이듬해 3월 10일에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과 장정 몇 백 명을 뽑은 다음, 김산군(金山郡, 지금의 김천시) 무기고에 수장된 병기를 압수하여 금산과 성주 사이에다가 진을 쳤다. 격문을 원근에 발송하여 한창 군사를 모으는 중, 대구 관병이 성주 진을 덮치자 경성(서울)과 공주 군사도 이에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 동지가 그들에게 잡혔다. 왕산은 흩어진 군졸을 다시 모아서 충청도 진천 지방으로 진출하였는데, 밀사 전경운이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들고 와서 왕산에게 직접 전하였다. 그 내용은 “의병을 급히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왕산은 하는 수 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군졸들에게 알아듣도록 타일러 해산시켰다. 이후로 분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맏형 방산이 사는 진보로 가서 한 책상에 공부하며 세상의 이치를 더욱 깨쳤다. 평리원 수반판서 그 무렵 왕산의 그릇과 인물을 알아본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아뢰기를 “허위의 경륜 포부를 세상에서 관중과 제갈 량이라 일컬으니 불러서 높은 벼슬로 등용할 때인가 합니다”라고 하였다.이에 고종황제가 “밭 갈던 노인(은나라 탕왕이 정승이 되기 전에 농사를 지었음)과 동해 바닷가에서 낚시질하던 첨지(강 태공 여상이 주 문왕의 스승이 되기 전에 동해에서 고기를 낚았음)인들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찌 알겠나?”하고 바삐 왕산을 불러오도록 명하였다. 관찰사 조한국이 임금의 전보 칙령을 받고, 선산원 수령 송영대에게 속히 봉행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송영대가 진보에 급히 통보하여 왕산이 역말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대궐 앞에서 황제의 명을 기다렸는데 그때가 기해(1899년) 3월 1일이었다. 고종황제는 왕산이 서울로 왔음을 듣고, 포의(布衣, 평민)로 대궐에 들어올 수 없는 전례에 따라 임시 벼슬로 환구단 참봉을 내려서 알현케 하고는 곧 영희전 참봉으로 제수하고, 이어 소경원 참봉으로, 4월 4일에는 성균관박사로 임명하였다. 계묘(1903)년 10월에는 승훈랑(承訓郞)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04년 4월 1일에는 주차 일본공사 수행원으로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 4일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같은 달 11일에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초고속으로 5월에는 평리원 수반판서(대법관)를 제수 받았다. 그때 세도가 김아무개란 자가 토지소송을 일으켰는데, 그로부터 긴한 청탁이 있었다. 하지만 왕산은 그 청탁을 듣지 않고 오히려 김 아무개를 패소시킨 뒤 엄히 가두었다. 세도가 김아무개 집안에서는 하룻밤 사이 그 옥사를 뒤엎어 버렸다. 이에 왕산이 “법관이 법을 집행치 못하니 그 직을 사임함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근무치 않았다. 고종황제가 그 내용을 통찰하고 왕산의 판결을 재가하며 출근토록 권하였다. 그해 8월 3일,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에 임명되어 시무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쌓인 송사를 공평 명쾌하게 판단 처리하니 탄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고종황제의 ‘의대조’ 을사(1905)년 3월 1일, 왕산은 고종황제의 두터운 신임으로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우리 대궐 안에 상주하면서 정무를 모두 관장하면서 제 멋대로 권위를 부렸다.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이토를 거쳐서 처리되었다. 이에 충성되고 의기 있는 신하는 모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왕산도 이때 사직 소를 올렸으나 고종황제가 윤허치 않았다. 왕산은 찬성 최익현, 판서 김학진과 함께 일제의 주권 및 공사재산권 침탈과 백성들의 집회 금지, 결사 방해, 언론 자유 침해 등을 규탄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는 이유로 일본공사에 의해 세 사람이 모두 옥에 갇혔다. 옥에서 나온 왕산은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다음 열 조목을 건의하였다. 첫째,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재주가 우수한 자를 골라 외국에 유학시킬 것 둘째, 군정(軍政)을 정돈해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할 것 셋째,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며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 아홉째,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분하지 말 것 열째, 관기를 엄정케 할 것 이상의 건의를 올리자 고종황제가 가상하게 여겨서 받아들였다. 그해 가을 벼슬에 물러나 시골로 돌아왔으나 집에 머물 수 없어서 지례 두대동에 가서 은거생활을 하던 중,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을 억제치 못하고 경상, 충청, 전라, 강원 각도를 두루 돌면서 유림과 지사에게 연락하여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기로 의논하였다. 곽종석, 현상건, 이학균, 유인석과 더불어 마음을 통하고 영천 출신의 정환직에게 자금을 주선케 하여 2만 냥을 거둬서 떠도는 군인들의 생계를 도왔다. 정미(1907)년 7월, 밀사가 대궐에서 내린 봉서(封書) 한 통을 전하여 펼쳐보니 ‘의거(義擧)’라는 두 글자인데
그것은 고종황제의 ‘의대조(衣帶詔: 임금이 옷에다가 써 내린 왕명)’이었다. 그때 고종황제는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융희
원년이었다. 그달에 군대를 해산하고 일제의 위협 아래 7조약을 정했다는 소문이 잇달아 들렸다.
그해 9월, 경기도에서 창의하여 연천,포천, 적성, 삭령, 철원, 양주 등 여러 곳에 군사를 배치하는 한편, 강화로 내려가며 부하 권중설, 김규식, 연기우 등이 적진을 여러 번 격파해서 군세를 크게 떨쳤다. 그해 겨울에 국내 각 지역의 지사를 연락하자 모두 양주에 모였는데 군사가 일만 명이었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으로 삼고 왕산은 군사장이 되었다. 왕산이 일찍부터 병술과 전략이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각도마다 대장 및 부대 이름을 정하여 갈라 맡겼다. 관동(關東)에는 민긍호, 호서(湖西)에는 이강년, 교남(嶠南, 영남)에는 박정빈, 진동(鎭東, 경기 황해)에는 권중희 관서(關西)에는 방인관, 관북(關北)에는 정봉준이었다. 각 지역의 대장 임명을 마치고 사기충천하여 서울로 진군케 했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에 있는 일제 통감부를 쳐부수고, 새 조약을 파기한 다음, 각국 영사관을 두루 방문하여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처지를 자세히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을 보낸 자는 죽여도 마땅하지마는
무신(1908년) 1월 27일, 군사장 왕산 허위와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의병장이 진두지휘하는 13도 창의군
선봉대는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으로 진군할 차비를 차렸다.
선봉대가 동대문밖 30리 지점에 이르러, 일군이 나타나면 일격을 가할 계획으로 기다렸다. 애초에는 민긍호의 관동 의병 2000명, 허위의 진동의병 2000명, 이강년의 호서의병 1000명, 신돌석의 교남의병 800명 등 후원부대가 오기로 하였는데 웬일인지 시한을 어겼다. 그런 중, 일군이 갑자기 총공세를 펴왔다. 한참동안 맹렬하게 전투를 하였으나 일군의 최신 무기를 의병들의 구식무기로는 당해 낼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규식과 연기우는 탄환을 맞고 적에게 붙잡혀 버렸다.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은 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였기에 왕산이 총대장의 중책을 맡았다. 연천으로 퇴각한 뒤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해서 물자를 조달하며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냈다. 왕산이 후일을 기약하며 연천에 머물고 있을 때,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곧 경남관찰사로 임명하겠다고 꼬드기다가 왕산이 일언지하 거절하자, 또 사람을 보내어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꼬드겼으나 왕산이 크게 꾸짖어 쫓아버렸다. 부하가 그를 붙잡고는 죽여 버리자고 하자 왕산은 “이 사람을 보낸 자는 죽여도 마땅하지마는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나?”하고 말리면서 놓아 보냈다. 대신 신기선이 왕산에게 투항을 권유해도 지난날 자신을 발탁시켜준 정분도 끊으면서 “죽을 때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무력 투쟁을 하겠노라”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왕산이 후일 서울에 다시 진공하고자 경기 적성의 감악산에 의병 훈련장을 만들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가 하면, 병기를
제조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근대적인 무기의 부족으로 일본군에 견주어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하다는 것이었다.
왕산은 화약을 구하기 위하여 김창식, 한원태, 이기상, 이계복 등을 서울로 파견하기도 하였고, 부하 경현수에게 밀서를 주어 청국 혁명당에게 보내어 무기 원조를 요청키도 하는 등 신식 소총과 탄약구입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의병장 김규식이 무기 구입을 위하여 인천에 잠입했다가 일본군에게 탄로되어 체포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그해 4월 21일, 왕산은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전국 13도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5월에는 박노천, 이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어 태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폐지 등 30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6월 11일 양평에서 은신 중이던 왕산이 일본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됨으로써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날 왕산은 일본 헌병 40명이 왕산을 포위해서 압송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 소장이 경무총감을 겸무하면서 직접 심문하다가 왕산의 경력 및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동양 평화에 대한 경륜과 경제, 역학에 대한 조예가 백성들의 스승임을 듣고 마음에 저절로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멈추려 하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왕산이 말했다.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한 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 아카시의 말이 끝나자 왕산이 상 위에 있던 겉은 붉고 속은 푸른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언뜻 보면 붉은 빛인데 안팎이 아울러 푸른빛인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아카시는 비록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문답을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충성심에 감복하여 왕산을 국사(國士,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로 대우하였다. 이토히로부미 통감에게 왕산의 목숨만은 살려주기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 수사관이 앞장 선 자가 누구이며 대장이 누구인가 물었다. “앞장 선 자는 이토히로부미고 대장은 나다.” 이에 일본 수사관이 얼떨떨해 하면서 이토 총감을 지목한 까닭을 물었다. “이토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앞장 선자가 이토히로부미 아니고 누구인가?” 동양 평화론 일본 재판장이 재판정에서 물었다. “아카시 사령관 조서에는 소위 그대의 동양 평화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대의 지론이 틀림없는가?” “그렇다. 일본이 조선을 삼킨다면 중국은 일본에 악의를 품게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가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면 극동의 평화가 어떻게 유지될 수가 있을 것인가? 일본이 조선을 진지하게 보호하고 성실하게 중국을 지원한다면 일본은 극동의 지도자로서 극동 내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재건을 바라는 것은 세계정세에 기초해서이며 단지 일본이나 조선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극동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 외무대신 이하영이 왕산을 살리고자 이토히로부미 통감에게 여러 번 부탁하였으나 “내가 결정하기는 어렵고 그 권한은 일본 정부에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 교수대에 올랐다. 서대문 감옥이 지어진 지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왕산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고 말씀도 예사로웠다.
왕산은 두 아들에게 다음의 유서를 남겼다.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나. 내 지금 죽음의 자리를 얻었으니 너희 형제는 와서 보도록 하라.” 교수형 밧줄이 왕산의 목 맬 무렵에 일본 중이 주문을 외우면 명복을 빌었다. 이에 왕산이 꾸짖으며 “충의의 귀신은 저절로 하늘나라에 오른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들 어찌 너희들의 천도를 바랄쏘냐?” 어서 빨리 형을 집행하라 형장 입회 검사가 유언을 물었다. “큰 의리를 펴지 못하였는데 유언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죽은 뒤 시신 거둠을 어찌 괘념할 것인가. 이 감옥 안에서 썩어도 좋다. 어서 빨리 형을 집행하라.” 왕산은 담담히 최후를 맞았다. 얼굴빛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숨을 거뒀다. 옥졸 두 사람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버리고 모자를 찢으며 울부짖으면서 “충의 대인이 억울하게 이런 변을 당했으니 우리도 맹세코 구차하게 삶을 도모치 않겠다”고 하였다. 옥에 갇혀있던 수백 명도 다 통곡하여서 그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제자 박상진(朴尙鎭)이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골짜기 헛집에 모셨다가 후일 고향 선산 구미 선영아래 모셨다. 왕산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혼은 죽지 않고 마치 민들레의 꽃씨처럼 바람에 흩날려서 삼천리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등 세계로 흩날려서 조국 해방의 불씨가 되었다. 후일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왕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
박도/오마이뉴스 |
출처 : 키르키즈스탄과 나의 사랑
글쓴이 : yvjyo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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