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지를 찾아서 I
▣ 일 시 : 2025년 03월 15일(토)
▣ 코 스 : 동학혁명 전적비-동심정-석두골-최후 항전지-마천대-낙조대 산장-허둔장군절터-수락리
▣ 인 원 : 3명
▣ 날 씨 : 흐림(8도), 바람
지난 3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박용규 박사님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동학 농민운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지'에 대해 물어왔다. 오래전 대둔산 금강골 입구에 있는 전적비 안내문 정도를 읽어본 기억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다. 3월 13일에는 신문에 직접 기고한 대둔산 동학 관련 기사를 보내오셨다. 할 일 없는 사람의 궁금증에 불을 댕긴 셈이다.
https://lyg4533.tistory.com/16489072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 님이 보내온 동학 관련 자료
항일 동학투사 16명 학살당한 곳, 벌곡 도산리 집터 찾아보니 박용규(hanbong)등록 2025.03.12 16:39수정 2025.03.12 16:39 필자는 논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선덕 회장으로부터 1895년 양호소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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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음 11월) 초 동학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퇴한 후, 진산의 접주 최공우(崔公友)를 중심으로 인근의 동학 지도자들은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요해처(要害處)에 진지를 구축하고 70여일간 농성을 하였다고 한다. 1895년 2월 3일(음 1월 9일) 충청도 감영(監營)의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은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營軍)을 이끌고 2월 4일(음 1월 10일)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험준한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산세를 보고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동학군 진지 서남쪽 100m 떨어진 능선에서 몇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2월 17일(음 1월 23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1) (沁營兵 : 강화 병영의 군사) 30명과 일본군 3개 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사태는 급전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정찰을 마치고, 2월 18일(음 1월 24일) 새벽에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안개와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1895년 2월 18일 14시경 대둔산 석두골 동학군의 요새(해발 720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28, 9세 가량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고, 동학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하니 얼마나 처참한 역사의 현장인가.
이어서 양호 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동학군 요새에서 탈출한 최공우(崔公友) 부자와 김공진(金公眞)를 추적한다. 2월 21일(음 1월 27일) 눈이 내린 새벽 벌곡면 도산리 김세마(金洗馬)의 집(벌곡면 도산리)을 급습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을 참수(斬首)하였다. 다음날인 2월 22일(음 1월 28일) 문석봉은 대성사(大城寺)2)로 가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을 참수하였다. 최공우 부자와 김공진이 여기에서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음은 당시 대둔산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일본군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의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와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의 관련 기록이다.
注 1) 심영(沁營) : 조선 시대 강화 진무영(江華鎭撫營)을 달리 이르던 말.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는 장위영(壯衛營)병으로 나와 있음. 2) 대성사(大城寺) : 위치 불명. 도산리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절.
■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1895년 2월 18일)
○ 2월 17일(음 1월 23일)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 경부터 5, 6명의 적3)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4)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注 3) 5, 6명의 적 :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추정됨.. 4)공주 군대 : 양호소모사 문석봉의 군대.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 2월 18일(음 1월 24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분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출처 :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 「대둔산부근 전투상보」(1895년 양력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6, 71∼73쪽.
■ 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
고산 대둔산은 가운데가 하늘로 솟아올라, 매우 높게 각이 진 바위가 3층의 길을 이루고 있다. 1명이 관문(關門)을 지키어도 1만 명이 열 수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류(匪類, 무기를 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는 무리)의 거괴(巨魁, 도둑 무리의 두목)인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이루어진 6명의 큰 우두머리가 그 위에서 거점을 차지하고 몇 칸의 집을 지었으며, 무기와 식량을 갖추었는데, 수개월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멀고 가까운 적들의 우두머리로 사나운 자인 김치삼(金致三)·장문화(張文化)·김태경(金台景)·정옥남(鄭玉男)·고판광(高判光)·송인엽(宋仁業) 등 십수 놈이 또한 산위로 올라가서 들어간 자가 많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붙어 와서 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장차 도적질을 하고 다시 일어날 계획이 있었다.
高山大芚山 聳出中霄 萬丈巖角 三層棧道也 一夫當關 萬夫莫開 正謂此也 匪類巨魁 崔公友崔士文三父子叔姪 六箇巨魁 盤據其上 結構數間屋 器械糧草 可支日月 而遠近賊魁梗化者 金致三張文化金台景鄭玉男高判光宋仁業等十數漢子 亦上山入夥 客付而包藏禍心 將爲竊發 更起之計
2월 13일(음 1월 19일)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과 함께 신영병 40명을 이끌고 산 아래에 이르러서,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지혜로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군사들을 진산읍(珍山邑) 20리 되는 곳으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하였으며, 기밀장교인 구형덕(具亨德)에게 고산(高山) 주암동(舟巖洞)으로 가서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진(金公眞)을 잡아오라고 하여, 이치로 그를 깨우쳤다. 그의 모양을 보니, 비록 귀화를 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진심은 아니었다.
正月十九日 與助防將金鶴立 率新營兵丁四十名 到山下 望見鳥道 如天上 不可以力取 只可以智取 故翌日退兵珍山邑二十里 留陣 使機密將校具亨德 往高山舟巖洞 捉得崔公友腹心者 金公直漢 以理諭之 觀其貌 則雖許歸化 終非眞心也
계책을 이용하여 계책을 취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인데, 편지를 봉하여 주어서 산위에 있는 적들 사이를 헐뜯게 하여 서로 멀어지게 하였다. 편지에 쓰기를, “김치삼·장문화 등은 보아라. 너희들이 산으로 올라간 날에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최공우 3부자 숙질의 머리를 베어 갖다 바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기일을 크게 어기고 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여 다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군들 잘못한 것을 고쳐서 선한 일을 하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너희들이 만약 끝내 미혹하려 한다면 마땅히 너희들이 사는 산의 앞과 뒤를 모두 포위하여 너희들에게 물과 곡식을 대어 주는 길을 끊어서 불과 반 개월이면 마땅히 굶어 죽은 귀신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들의 식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빨리 계책을 행하고 하루 빨리 최적 3부자 숙질들을 베어서 머리를 가지고 와서 공을 세워 속죄를 하라”고 하였다.
用將計取計之法 給以書封使之反間 山上賊其書曰 金致三張文化等見之 汝等上山之日 丁寧與我約 以斬崔士文崔公友三父子叔姪首級來獻 將功贖罪 多誤期日 未得機會 姑未下手耶 抑爲變心耶 人誰無過改之爲善 汝等若終始執迷 則當圍住山前山後 絶汝汲糧之道 不過半月 當見餒鬼 且汝等家屬屠戮 乃已速速行計 不日斬崔賊三父子叔姪首級 以來獻功以爲贖罪也
소모관이 편지를 몰래 김공진(金公眞)에게 주어 부탁하기를, “너는 이 편지를 가지고 마천대(摩天臺)에 올라 가서 장문화(張文化)·김치삼(金致三) 등에게 전해 주고 힘을 함께하여 일을 이루면 모두 너희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술과 먹을 것을 주고 관대하게 대하여 보냈다. 과연 김공진이 편지를 품고 산에 올라갔는데, 장문화·김치삼에게 주지 않고 몰래 최적(崔賊, 최공우)에게 주었다. 최적이 직접 편지를 열어보고, 비로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놈 6명이 그의 3부자 숙질들을 기도하려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최적이 동생과 조카를 불러서 각각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편지에 쓰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재빠르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6놈들에게로 향하여 가서 하나하나 죽이고 그들의 죽은 시체의 목을 치고 낭떨어지로 던졌다.
召募書暗與金公眞 囑曰 汝持此書 上摩天臺 傳與張文化金致三等 同力成事 皆汝之功也 賜酒食寬待以送矣 果然金公眞懷書上山 不給張文化金致三 暗給崔賊則崔賊自坼書觀之 始知金張等六個後來之漢 欲圖渠之三父子叔姪而來 招弟與姪各各附耳低 言書中之意 奔力向前金張六個後來之賊一一結果 擲開屍首於萬仞之下
2월 16일(음 1월 22일) 바야흐로 비천포(飛天砲)를 만들었고, 최적들을 죽일 때인 2월 18일(음 1월 24일) 강화병영의 군사와 일본군사들이 도착하여 힘을 합쳐서 함께 산위에 있는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다만 많은 적들이 있었으나, 모두 최적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22일에 김치삼과 장문화와 함께 서로 공격을 하여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쳐서 죽이고, 곧바로 김공진과 함께 산 위 뒤편을 따라서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과연 최적은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하였고, 그 때문에 큰 눈이 오는 것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여 죽일 곳으로 들어갔다.
正月二十二日 方造飛天砲 滅了崔之際 二十四日 沁營兵丁及日兵來到 合力共討上山窟宅 則只有多賊竝不見崔賊 問之則曰二十二日 與金張自相攻擊 殺金張等六人 卽與金公眞從山後下去 未知何往云 卽隨在滅之矣 果崔賊更起包於廉貞洞 入於因大雪勦滅之中
출처 : 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
■ 대둔산 항쟁 전적비 안내문
동학농민혁명
19세기 말 조선은 조정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 하고 국력이 쇠진하였다. 그 틈을 탄 일본국이 대륙 침공의 야심을 갖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때 조선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부패한 조정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894. 10. 10 전봉준을 필두로 전라도 삼례에서 수십만의 동학농민 혁명군이 기포하여 서울로 북진하는 도중 동년 12월 초에 공주 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퇴각할 때, 최공우를 중심으로 한 고산, 동산, 화산 군현의 동학농민군 천여명이 이곳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3개월 간 항쟁하였다. 1895. 2. 18 거점지인 대둔산 석두골(798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동학 접주는 한 살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150m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하니 얼마나 처참한 역사의 현장인가! 이곳에서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고 우리나라 근대사에 빛나는 동학농민 혁명정신을 이어 받아 21세기 새로운 민족사의 거름으로 삼고자 한다.
■ 동학 농민항쟁 항쟁지 답사 결과 요약
1. 식수는 동심정 휴게소 인근 암자터에서 조달한 것으로 추정됨.
2. 항전지 주변에 샘이 없어서 많은 인원이 장기간 농성하기는 불가능함.
3. 항전지의 위치를 형제바위(미륵바위)라고 하는 것은 확인할 필요가 있음.
4. 보급루트 : 도산리-수락-석천암-허둔장군 절터-마천대-남릉-솔봉이길 요새
5. 일본군 진립루트 : 남릉에서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요새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함.
6. 완주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전적지 :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됨.(2015.12.28)
※ 대둔산 석두골 동학 농민군 요새 찾아가는 길
대둔산 케이불카 승하차장을 지나면 동학 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가 나온다. 금강골 등산로-동심정-좌측 능선-양파길 안내판-능선 안부-솔봉이골 안내판에서 산죽길로 내려선다. 솔향기 그윽한 일봉길 개념도를 지나서 정면으로 진행하면 솔봉이길 방향이고 좌측 골짜기 석두골로 올라간다. 석두골은 길이 없는 너덜이다. 이따금 은색 시그널이 보인다. 이를 따라 조금 오르면 산죽길이 나온다. 왼쪽 10시 방향으로 산죽을 통과하면 동학 농민군 요새로 오르는 줄사다리가 나타난다.
■ 문석봉(文錫鳳,1851~1896)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대구 출신. 아버지 문하규(文夏奎)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3년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 경복궁 오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 해 12월 공주부 진잠(鎭岑)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연산·은진 등 공주부 내 6읍의 사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기까지 하였다. 이 지역 유생들과의 이와 같은 관계가 훗날 경상도 출신인 문석봉이 진잠을 비롯한 유성·회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정권에 의해 취해진 변복령과 단발령 등 제도의 개편을 반대했으며, 일제의 침략 행위를 물리치고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의 의병활동은 2차에 걸쳐 준비, 수행되었다.
1차 의병활동은 문석봉이 붙잡힘으로써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1895년 2월경 무기를 준비하는 등 의병투쟁의 준비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2차 의병활동은 을미사변 직후에 시작되었다. 1895년 9월 18일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충청도 유성에서 유성의진을 결성, 항일투쟁에 나섰다. 선봉장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에 오형덕(吳亨德), 군향관에 송도순(宋道淳)을 임명하였다. 유성의진의 병사수는 1,000여 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회덕과 진잠에 거주하던 송근수(宋近洙)와 신응조(申應朝) 등 전임 정승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들의 묵인하에 회덕 군아의 무기고를 급습,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어 진잠을 거쳐 공주부 관아를 점령하고자 진격했는데, 병법에 능한 무과 출신이고 전투지휘 경험이 있는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상도 지역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오형덕 등과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기를 도모했으나 고령현감의 밀고로, 1895년 11월 대구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1896년 초 동지들과 감옥을 부수고 나와 원주 일대에서 통문을 돌리며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며 얻은 병으로 그 해 5월 낙향하였고, 결국 11월에 죽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문석봉이 남긴 기록으로 『의산수록(義山隨錄)』 2책이 전해 오고 있으며, 1934년 이를 저본으로 후손들이 간행한 『의산유고(義山遺稿)』 2책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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