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지를 찾아서 II

도솔산인 2025. 3. 23. 17:31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지를 찾아서 II

 

 

▣ 일 시 : 2025년 03월 22일(토)~23일(일)

▣ 코 스 : 대둔산 주차장-동학혁명 전적비-동심정-석두골-최후 항전지-마천대-낙조대 산장-생애봉-장군약수터-배티재

▣ 날 씨 : 맑음(10도), 바람

 

 

  지난주 답사 후, 동학 농민군이 70여 일을 항전하였다는 기록에 의문이 남았다. 항전지 가까운 곳에 샘이 없는데, 많은 인원이 장기간 어떻게 항전하였을까. 또 하나의 의문은 동학 연구한는 분들이 동학군 최후 항전지를 형제바위(미륵바위)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석두골 초입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창끝처럼 뾰족한 두 개의 바위가 보인다. 형제바위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동학 농민군 최후 항전지에서 형제바위는 직선 거리로 70m 정도 떨어져 있다. 정확히 기술하면 ‘석두골 형제바위(미륵바위) 인근 동학혁명 최후 항전지라고 해야 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형제바위는 석두골 상단의 836봉 아래에 위치한 독립된 바위이다. 안내판 지도에 이 바위를 형제봉이라고 표기한 것도 맞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동학군 항전지에서 바라본 형제바위(미륵바위)

 

  동심정 휴게소 샘은 항전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작은 지능선 하나를 넘어야 하고, 거리가 있어서 물을 운반하는 것도 쉽지 않다. 20일 가까이 관군과 전투를 하는 상황에서 동심정 샘은 너무 위험한 곳에 위치해 있다. 샘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렸다. 오후에 올라오는 두 분이 길을 잃어서, 일행 중 한 분(곽동한 씨)이 석두골을 내려가다가 물소리를 듣고 너덜지대에서 샘터를 발견하였다. 건기인데도 물이 흐른다. 물소리가 날 정도로 수량도 제법 있다. 석두골 샘은 항전지 아래 고도 639.2m, 항전지에서 약 100m 아래에 위치해 있다.

 

  다음날 일본군이 진입한 루트를 따라 836봉에 올라서니, 동학군 최후 항쟁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에서는 난공불락(難攻不落)요새(要塞)인지 모르지만, 뒤에서는 동학군 진지가 노출되어 훤히 들여다 보인다. 관군과 일본군이 엄호사격을 했던 고지와 동학군 진지로 진입한 루트도 눈에 들어왔다. 동학군은 왜 퇴로가 없는 사지(死地)에 진을 쳤을까. 대둔산 최고의 절경인 동학군 최후 항전지에서 답사팀과 하룻밤을 보내고, 130년 전 그날의 참상(慘狀)을 생각하며 상여봉을 거쳐 배티재로 내려섰다. 끝.

 

 

동학군이 이용한 샘터로 추정

 

■ 동학군 항전지 아래 석두골 샘터 위치

발견된 샘터 위치(고도 639.2m)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 요약

 

  1894 12월(음 11월) 초 동학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퇴한 후, 진산의 접주 최공우(崔公友)를 중심으로 인근의 동학 지도자들은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요해처(要害處)에 진지를 구축하고 70여일간 항전을 하였다고 한다. 1895 2 3( 1 9) 충청도 감영(監營)의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 1851~1896)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營軍)을 이끌고 2 4( 1 10) 대둔산 아래 터골(基洞,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기동마을)에 도착하였다. 험준한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산세를 보고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동학군 진지 서남쪽 100m 떨어진 능선에서 몇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이후에도 금산의 민보군과 전주의 관군이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17( 1 23) 신식무기로 무장한 장위영(壯衛營) 군 30명과 일본 3개 분대가 터골(基洞)에 도착하여 사태는 급전하고 말았다. 2 17( 1 23) 일본군은 정찰을 마치고, 2 18( 1 24) 새벽에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안개와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학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일본군의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1895년 2월 18일 14시경 대둔산 석두골 동학군의 진지(해발 720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28, 9세 가량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었고, 동학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일본군이 살아남은 자를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뒤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韓兵)들이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라고 한다.

 

  양호 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동학군 요새에서 탈출한  최공우(崔公友) 부자와 김공진(金公眞)를 계속 추적한다. 3일 후인 2 21( 1 27) 눈이 내린 새벽 김세마(金洗馬)의 집(논산시 벌곡면 도산리)을 급습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을 참수(斬首)하였다. 다음날인 2 22( 1 28) 문석봉은 대성사(大城寺)1)로 가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을 참수하였다. 이 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토벌 직전 대둔산에서 염정동2)으로 내려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최공우 부자와 김공진이 여기에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注 1) 대성사(大城寺) : 위치 불명. 도산리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절.  도산리와 현 영주사(충남 논산시 벌곡면 덕곡길 73)의 거리는 약 4km이다. 2) 염정동 :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염정동은 논산시 벌곡면 도산리와 경계에 있는 마을. 염정동에 최공우의 아들 최사문이 살았다고 함.

 

  

대둔산 동학 농민혁명 최후 항전 날짜별 요약

 

 1894 12( 11) 문석봉이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됨.

 

 1895 1 6( 94 12 11) 진잠으로 출진. 진잠 동학 접주 박만종(朴萬宗)을 체포함.

 

 1 12( 12 17) 박만종(朴萬宗)은 금영(錦營, 공주 충청감영)에서 참수를 당함.

 

 2 4( 1 10) 문석봉이 대둔산 아래 터골에 도착. 공격이 여의치 않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동학도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보내 최공우 삼부자와 숙질을 죽이도록 지시함.

 

 2 13( 1 19) 진산 방향으로 철수함. 기밀장교인 구형덕(具亨德)에게 고산(高山) 주암동(舟巖洞)으로 보내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진(金公眞)을 잡아들여 김치삼과 장문화에게 편지를 보내 최공우외 5인을 죽일 것을 독촉함.

 

 2 16( 1 22) 김공진이 편지를 최공우에게 전달,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죽이고 최공우 3부자와 숙질, 김공진 등 일부 인원이 대둔산에서 내려옴.

 

 2 17( 1 23)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 30분 출발하여 오후 4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하여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함.

 

 2 18( 1 24) 오전 5시에 작전을 개시하여 9 30분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함.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함. 1 40, 세 방향에서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여 동학도 진지로 진입함.

 

 2 21( 1 27) 눈이 내린 이른 새벽 문석봉이 김세마(金洗馬)의 집(논산시 벌곡면 도산리)을 급습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16명을 참수(斬首).

 

 2 22( 1 28) 문석봉은 대성사(大城寺)1)로 가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을 참수함.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토벌 직전 대둔산에서 염정동으로 내려온 사람들로 추정됨.

 

 

基洞기동(터골)
동학 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
양파A 방향으로
능선에 올라서면 방금 올라온 동심정 휴게소
솔봉이길 방향으로 잠시 산죽길과 너덜을 내려서면
'솔향기 그윽한 일봉길 개념도'가 나온다.
석두골 초입 케른에서 골짜기로 올라간다.
너덜길을 오르면 중간쯤에 석두골 샘터가 나타난다.
산죽길을 통과하면 동학군 진지로 올라가는 줄사다리를 만난다.
최후 항전지에 바라본 형제바위(미륵바위)
형제바위(미륵바위)
측면 석축(약 11m)
잡목이 자라서 무너지고 있는 전면 석축(약 13m)
동학군 최후 항전지
동학군 최후 항전지
일본군이 무등을 타고 요새로 진입한 암벽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일본군의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836봉
836봉에서 바라본 동학 최후 항전지
가운데 하단 형제바위(미륵바위)
토벌군이 엄호사격을 했던 고지(왼쪽 고지에 한병 8명과 일본군 1개 분대, 오른쪽 고지에 일본군 1개 분대)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1 40,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일본군의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항전지에서 전방 오른쪽 능선 안부에 한병(韓兵) 20명을 배치했다.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사진 오른쪽 고지에 배치하고, 고마쯔(小松) 지대의 1개 분대는 사진 왼쪽 고지에 배치했다.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하게 하고,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이 직접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거느리고,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암벽을 올라가 동학군 진지에 진입했다.'라고 이해가 된다.

 

가운데가 동학 최후 항전지
마천대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1895 2 18)

 

  ○ 2 17( 1 23)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 30분 출발하여 오후 4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 경부터 5, 6명의 적1)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4)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1) 5, 6명의 적 :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추정됨. 2)공주 군대 : 양호소모사 문석봉의 군대. 

 

  그 후 민병(민보군)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 2 18( 1 24)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배티재)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 30분 일본군 1개 분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오전 9 30, 배치를 마쳤다.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 40,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출처 :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 특무조장, 대둔산부근 전투상보(1895년 양력 2 18(음력 1 24), <주한일본공사관기록>6, 7173.

 

 

 문석봉(文錫鳳)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

 

  고산 대둔산은 가운데가 하늘로 솟아올라, 매우 높게 각이 진 바위가 3층의 길을 이루고 있다. 1명이 관문(關門)을 지키어도 1만 명이 열 수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류(匪類, 무기를 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는 무리)의 거괴(巨魁, 도둑 무리의 두목)인 최공우·최사문 3부자 및 숙질로 이루어진 6명의 큰 우두머리가 그 위에서 거점을 차지하고 몇 칸의 집을 지었으며, 무기와 식량을 갖추었는데, 수개월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멀고 가까운 적들의 우두머리로 사나운 자인 김치삼(金致三장문화(張文化김태경(金台景정옥남(鄭玉男고판광(高判光송인엽(宋仁業) 등 십수 놈이 또한 산위로 올라가서 들어간 자가 많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붙어 와서 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장차 도적질을 하고 다시 일어날 계획이 있었다.

 

高山大芚山 聳出中霄 萬丈巖角 三層棧道也 一夫當關 萬夫莫開 正謂此也 匪類巨魁 崔公友崔士文三父子叔姪 六箇巨魁 盤據其上 結構數間屋 器械糧草 可支日月 而遠近賊魁梗化者 金致三張文化金台景鄭玉男高判光宋仁業等十數漢子 亦上山入夥 客付而包藏禍心 將爲竊發 更起之計

 

  2 13( 1 19)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과 함께 신영병 40명을 이끌고 산 아래에 이르러서,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고, 다만 지혜로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군사들을 진산읍(珍山邑) 20리 되는 곳으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하였으며, 기밀장교인 구형덕(具亨德)에게 고산(高山) 주암동(舟巖洞)으로 가서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진(金公)을 잡아오라고 하여, 이치로 그를 깨우쳤다. 그의 모양을 보니, 비록 귀화를 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진심은 아니었다.

 

正月十九日 與助防將金鶴立 率新營兵丁四十名 到山下 望見鳥道 如天上 不可以力取 只可以智取 故翌日退兵珍山邑二十里 留陣 使機密將校具亨德 往高山舟巖洞 捉得崔公友腹心者 金公直漢 以理諭之 觀其貌 則雖許歸化 終非眞心也

 

  계책을 이용하여 계책을 취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인데, 편지를 봉하여 주어서 산위에 있는 적들 사이를 헐뜯게 하여 서로 멀어지게 하였다. 편지에 쓰기를, “김치삼(金致三장문화(張文化) 등은 보아라. 너희들이 산으로 올라간 날에 정녕 나와 약속하기를 최사문·최공우 3부자 숙질의 머리를 베어 갖다 바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기일을 크게 어기고 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여 다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심한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군들 잘못한 것을 고쳐서 선한 일을 하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너희들이 만약 끝내 미혹하려 한다면 마땅히 너희들이 사는 산의 앞과 뒤를 모두 포위하여 너희들에게 물과 곡식을 대어 주는 길을 끊어서 불과 반 개월이면 마땅히 굶어 죽은 귀신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들의 식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빨리 계책을 행하고 하루 빨리 최적 3부자 숙질들을 베어서 머리를 가지고 와서 공을 세워 속죄를 하라고 하였다.

 

用將計取計之法 給以書封使之反間 山上賊其書曰 金致三張文化等見之 汝等上山之日 丁寧與我約 以斬崔士文崔公友三父子叔姪首級來獻 將功贖罪 多誤期日 未得機會 姑未下手耶 抑爲變心耶 人誰無過改之爲善 汝等若終始執迷 則當圍住山前山後 絶汝汲糧之道 不過半月 當見餒鬼 且汝等家屬屠戮 乃已速速行計 不日斬崔賊三父子叔姪首級 以來獻功以爲贖罪也

 

  소모관이 편지를 몰래 김공진(金公眞)에게 주어 부탁하기를, “너는 이 편지를 가지고 마천대(摩天臺)에 올라 가서 장문화(張文化)·김치삼(金致三) 등에게 전해 주고 힘을 함께하여 일을 이루면 모두 너희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술과 먹을 것을 주고 관대하게 대하여 보냈다. 과연 김공진이 편지를 품고 산에 올라갔는데, 장문화·김치삼에게 주지 않고 몰래 최적(崔賊, 최공우)에게 주었다. 최적이 직접 편지를 열어보고, 비로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놈 6명이 그의 3부자 숙질들을 기도하려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최적이 동생과 조카를 불러서 각각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편지에 쓰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재빠르게 장문화·김치삼 등 나중에 온 6놈들에게로 향하여 가서 하나하나 죽이고 그들의 죽은 시체의 목을 치고 낭떨어지로 던졌다.

 

召募書暗與金公眞 囑曰 汝持此書 上摩天臺 傳與張文化金致三等 同力成事 皆汝之功也 賜酒食寬待以送矣 果然金公眞懷書上山 不給張文化金致三 暗給崔賊則崔賊自坼書觀之 始知金張等六個後來之漢 欲圖渠之三父子叔姪而來 招弟與姪各各附耳低 言書中之意 奔力向前金張六個後來之賊一一結果 擲開屍首於萬仞之下

 

  2 16( 1 22) 바야흐로 비천포(飛天砲)를 만들었고, 최적들을 죽일 때인 2 18( 1 24) 강화병영의 군사와 일본군사들이 도착하여 힘을 합쳐서 함께 산위에 있는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다만 많은 적들이 있었으나, 모두 최적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22일에 김치삼과 장문화와 함께 서로 공격을 하여 김치삼과 장문화 등 6인을 쳐서 죽이고, 곧바로 김공진과 함께 산 위 뒤편을 따라서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과연 최적은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하였고, 그 때문에 큰 눈이 오는 것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여 죽일 곳으로 들어갔다.

 

正月二十二日 方造飛天砲 滅了崔之際 二十四日 沁營兵丁及日兵來到 合力共討上山窟宅 則只有多賊竝不見崔賊 問之則曰二十二日 與金張自相攻擊 殺金張等六人 卽與金公眞從山後下去 未知何往云 卽隨在滅之矣 果崔賊更起包於廉貞洞 入於因大雪勦滅之中

 

출처 : 문석봉(文錫鳳) 의산유고(義山遺稿)』 「토비략기(討匪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