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산 최고의 조망처 촛대봉과 삼신봉

도솔산인 2024. 6. 9. 10:11

지리산 최고의 조망처 촛대봉과 삼신봉

 

 

▣ 일 시 : 2024년 06월 06일(목)~07(금)

▣ 코 스 : 거림-세석연못-촛대봉-삼신봉-세석대피소-음양수-망루-거림옛길-거림

▣ 인 원 : 4명

▣ 날 씨 : 흐리고 맑음

 

 

산천재
산천재에서 바라본 천왕봉

 

 

 세석의 청학연못과 불일암 청학봉 아래 청학연 

 

  세석의 ‘청학연못설'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호사가들이 청학연못에 대한 논리를 펼칠 때마다 그 근거로 겸암(謙菴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겸암일기를 앞세웠다. 겸암일기에 나오는 돌샘(石泉)과 이 연못을 연결시겼다촛대봉에 있는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석각도 등장한다미수 이인로와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을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이렇게 세석평전의 인공 연못(磧石洞小池)은 어느 날 청학연못으로 둔갑(遁甲)하였다인공으로 둑을 쌓은 이 연못의 축조 시기는 1862년 진주 단성민란 시점으로 추정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문헌에 나오는 최초 기록은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頭流山記)  세석평소지(細石坪小池)이다.

 

  호사가들의 주장대로 15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류겸암일기(柳謙菴日記)의 어느 곳에도 청학연못에 관한 내용은 없다류운룡은 겸암일기에서 청학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화개천석문등촌재천석(千石)지기의 논을 만들 수 있고 되()의 씨를 뿌리면 석()을 수확할 수 있는 비옥한 땅임좌병향의 백운산 세 봉우리가 바로 안산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림'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돌우물(石井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雲居士李靑蓮)“ 이라 쓰여 있네.'라는 문구와 청학연못을 억지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류겸암일기의 내용은 세석 평전과는 무관하다청학연(靑鶴淵) 1487년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유일하게 보인다청학연(靑鶴淵) 불일폭포 아래에 있다. 세석의 '청학연못'에 대한 이야기는 고인이 된 성락건 선생께 누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하지 않겠지만선인들의 유람록에 따르면 세석평소지(細石坪小池)이고, 쉽게 부르면 세석연못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촛대봉의 명칭

유람록 촛대봉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증봉(甑峰)  
2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빈발봉(賓鉢峰)  
3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頭流山錄) 사자봉(獅子峰)  
4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사자항(獅子項)  
5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중봉(中峰)  
6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촉봉(燭峯) 촛대봉

 

 사자항(獅子項, 사자목), 사자령(獅子嶺), 사정(獅頂)은 길이 좁아서 두 사람이 비켜갈 수 없는 험한 바위 길이나 고개를 가리킴.

 

 

곡점마을 차도에서 바라본 시루봉(사진 답지님)

 

 

■ 촛대봉의 '의인나주정씨묘' 석각

 

  지리산 촛대봉에 자연석의 면을 다듬고 새긴 의인나주정씨묘(宜人羅州鄭氏之墓)의 석각이 있다이 묘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알 수 없지만지리산길 지도에 정걸방(鄭乞方)의 묘라고 표기하고 있다의인(宜人) 6이나  6품 부인의 품계이다. 정걸방(鄭乞方)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한말과 일제시대에 지리산 세석 음양수 근처에 살았던 도인으로거지 행색을 한  鄭氏 이름은 걸방(乞方), 걸방(乞方)은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닌 별호인 듯하다의인 나주 정씨는 여자이고 정걸방(鄭乞方)은 남자이다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끌어당겨 성별까지 바꾸어 혼란스럽게 하는지 의문이 든다이 석각 또한 '정걸방의 묘'가 아닌 그냥 '의인나주정씨묘(宜人羅州鄭氏之墓)'이다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 석각과 그 아래 제단터

 

 

■ 촛대봉의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 석각

 

1. 1851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무자일(8 5) 거림촌에서 미금동(美禽洞)으로 갔는데, ()에서 말하기를 두류산 남쪽 산기슭에 푸른 학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었는데, ()의 이름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미금동은 거림에서 도장골 입구를 밀금동이라고 함] 옷을 벗고 관을 벗고 몸을 굽혀 20 를 가서 중봉(中峰)[*촛대봉으로 추정]에 이르렀다. 꼭대기에 있는 석각(石刻)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 열 글자를 쓴 것인데, 필력이 고풍스러우면서도 건장하다.

 

 

2.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누대를 오르니 왼편에는 누운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정면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래에 기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인 듯하였다. 아래에는 작은 못을 만들었고, 또 그 몇 보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연수정(延壽井)’이라 하였다. 누대의 뒤에는 촉봉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율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上臺左有臥巖作崖. 面刻鶴洞壬三字. 此似近世好詭者之事矣. 底築小池. 又下幾步有井曰延壽. 臺後燭峯聳出. 巖面刻一律詩曰]

  

頭流山逈暮雲低 : 두류산 저 멀리 저녁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으니

萬壑千巖似會稽 : 만개의 골짝과 천개의 바위가 회계산(會稽山) 같구나.

杖策浴尋靑鶴洞 :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 : 숲 너머로 부질없이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만 들리네.

樓臺縹緲三山近 : 누대에선 아득히 삼신산이 가깝고

苔蘚依俙四字題 : 이끼 낀 바위에는 어렴풋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네.

試問仙源何處是 : 시험 삼아 선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노니

落花流水使人迷 : 떨어진 꽃 흐르는 물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그 옆에는 낙운거사이청련(樂雲居士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傍有樂雲居士李靑蓮書八字 人言李眉叟仁老古迹也 蓋此山有靑鶴洞云]

 

 

브로켄현상
등산로 디딤돌 놓기

 

 

■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세석평전의 지명

 

유람록 세석 명칭 음양수샘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綠) 저여원(沮洳原)    
2    1545년 황준량의 금계집(錦溪集) 저여원(沮洳原)    
3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 (遊頭流綠)  세석평지(細石坪地)     
4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적석평(石坪) 외적평()  
5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遊頭流綠) 세적평전(細磧平田)    
6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頭流山記) 세석평(細石坪) 외세석(外細石) 石泉(돌샘)
7    1903년 안익제의 두류록(遊頭流綠) 세석평전(細石坪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