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석상용의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 이야기
▣ 일 시 : 2024년 05월 18일(토)~19일(일)
▣ 코 스 : 초암염소농장-망루봉-상원사터-박회성-상원진 집터-1265봉(병풍바위)-능선-초암염소농장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2년 뒤 1907년 7월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일본은 이에 앞서 군대 해산의 저항과 항일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보병 14연대를 한국에 파병하였다. 이들은 부대 업무일지인 『진중일지』를 남겼다. 『진중일지』는 명치 40년(1907년) 7월 23일부터 명치 42년(1909년) 6월 19일까지 14책 2,000여 쪽의 방대한 기록물이다. 일본 경매시장에 나온 『진중일지』를 토지주택박물관에서 우여곡절 끝에 입수하여 공개하였다. 일본 정규군 보병 14연대는 1907년 5월 25일 6시 일본 기타규슈시 모지항을 출발, 26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27일 전국에 분산 배치된다. 경남 함양군에는 함양수비대 제5중대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는 입석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국의 군 단위까지 정규군을 배치하여 대대적으로 의병들을 토벌하였다.
1908년 4월 29일(음 3.29) 밤 석상용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입석 수비대를 공격한다. 그러나 백무진과 약속한 공격 시간이 어긋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일본군은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당시 노지현(盧址鉉) 마천면장의 용기와 끈질긴 설득으로 주민들이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석상용 상원진의 동선은 상원사터(박회성)에서→칠성동→두지동→장구목→고점동→백무동→도마마을→실상사(입석리)를 잇는 루트이다.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 일본군 함양 수비대와 입석 수비대가 연합하여 당시 마천면장을 앞세우고 상원진이 웅거하고 있던 박회성(대궐터)을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지리산 동북부 항일의병의 최후 보루는 무너진다. 당시 일본군 14 연대 『진중일지』에는 투항자의 출신지와 나이 직업 이름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2022년 2월 20일과 3월 24일~25일 사단법인 지리산권 발전협의회 허상옥 회장의 안내로 경상대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과 함께 상원사 터와 박회성을 답사하였다. 답사팀은 박회성에서 의병들의 건물터와 샘터에서 깨진 무쇠솥 조각을 발견하였다. 4월 2일~3일에는 박회성을 재답사하였고, 4월 20일~21일에는 조선일보 조용헌 선생과 석상용 장군의 묘소와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와 전면장 노공지현 영사비에 참배하였다. 5월 21일~22일 답사팀은 상원진에 합류한 녹천 고광순의 의병 길인 화엄사→밤재→문수사터→느진목재→칠불사→바깥당재→연곡사→내당재→삼정마을까지 연결하였다. 6월 11일~12일에는 삼정마을에서 바른재→오공능선을 지나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7월 23일~24일에는 일정(一丁) 민병태 선생과 조용헌 선생이 동행하여 벽소령에서 덕평마을 천우동과 도덕봉 주변을 답사하였다. 동년 10월 21일(금) 도마마을에서 실상사를 잇는 구간(약 4km)을 연결하였다. 1908년 4월 29일 석상용 선생의 상원진과 백무진이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입석 수비대를 기습할 때 이용한 루트로 추정된다.
1. 대궐터 박회성의 상원진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梁漢奎, 1844~1907)와 고제량(高濟亮, 1849~1907)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록천鹿川(1848~1907, 고광순의 호)1)이 이끄는 일대(잔류부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 후 문태수(文泰洙, 1889~1913) 신명선(申明善, ?~1908)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상원진과 백무진에 대한 기록은 석상용의 구술을 기록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에 유일하게 보인다. 상원사 터는 초암 능선 자락 박회성 아래에 있다.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에는 상원진을 대궐터(박회성)로 기록하고 있다.
注 《비호장군석상용약전》에는 '고려천'으로 나와 있는데 녹천 고광순으로 추정됨.
2. 백무동 고점마을의 백무진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1871~1933),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 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과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백무진의 위치는 백무동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터로 추정한다.
3.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상사 기습
1908년 4월 29일(음력 3월 29일)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상원진이 도착하기 전에 백무진이 먼저 공격을 하여 작전은 실패한다. 당시 의병진에는 시계가 없었다고 한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4. 의병에 협조한 도마마을 주민 학살 위협(5월 11일)
그 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할 즈음에 면장 노지현(盧址鉉)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다.《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5. 대궐터 상원진 토벌 기록(1908년 6월 18일~22일)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중봉을 가리킴)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大闕基)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 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 마천면 항일의병 귀순자 명단(20명, 1908~1910)
이선전(마천면), 문성주(45‧마천면 당흥촌), 박춘원(55‧마천면 당흥촌), 김문성(44‧마천면 당흥촌), 이성삼(45‧마천면 당흥촌), 김인중(59 ‧마천면 당흥촌), 김명운(49‧마천면 당흥촌), 박성언(44‧마천면 당흥촌), 박문여(73‧당흥촌), 한태서(53‧도마천동), 박관지(53‧도마천동), 장명준(57‧도마천동), 한성서(76‧도마천동), 신경언(56‧도마촌), 임선경(67‧도마촌), 한치명(26‧도마촌), 한원숙(55‧도마촌) 김성배(마천면 양전), 전이현(마천면 추성), 강수성(마천면 창촌)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Ⅳ), 242-243]
일본군 『(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
2022년 『지리산 마천면사』 집필위원으로 비문(碑文)을 조사하면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을 접하게 되었고, 일본군 보병 14연대『진중일지』를 읽고 화엄사에서 박회성 상원진으로 이어지는 호남 의병길을 답사하였다. 이번 답사에서 상원진 의병들이 지었다는 건물의 면적을 측정하고, 일본군이 대궐터로 진입했다는 병풍바위를 확인하였다. 천왕봉에서 초암능선을 바라보면 1465봉 바위 남벽이 보이는데, 일본군의『진중일지』에 '병풍연(屛風然)'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회성 안에 건물터는 여러 곳에 있는데, 본부로 추정되는 건물은 다행스럽게 기초 석축이 그대로 남아있다. 건물의 외곽이 가로 9.5m 세로 5.7m로 당시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 추가로 깨진 솥 조각도 발견하였다. 함양문화원과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항일의병 유적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아마추어 취미 수준의 답사가 아닌 깊이 있는 학술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https://lyg4533.tistory.com/16488771
■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 사본
■ 우산나물 : 산파초(傘把草)·칠성마(七星痲)·토아산(兎兒傘)·삿갓나물이라고도 한다. 새순이 올라와 잎이 나올 때 채 벌어지기 전의 모습이 마치 우산을 펼친 듯하여 우산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삿갓나물이라고도 하지만 같은 이름의 다른 종인 삿갓나물과는 다른 식물이다. 한자 이름인 토아산은 토끼 새끼가 쓰는 우산이라는 뜻이다. 뿌리줄기에 가는 뿌리가 많다. 전체에 털이 없다. 대개 그늘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데 줄기는 곧게 서서 자라며 가지를 치지 않고 회청색을 띤다.
우산나물과 비슷한 유사종으로 잎의 뒷면에 흰빛이 돌지 않는 것을 대청우산나물, 잎과 꽃이 다소 작고 두상화가 산방 꽃차례로 달리는 것을 애기우산나물이라 한다. 관상용·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데 향기와 맛이 참나물과 비슷하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여 사용하며, 술을 담가 두고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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