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의병장 석상용의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을 찾아서I

도솔산인 2022. 3. 26. 00:28

의병장 석상용의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을 찾아서I

 

 

▣ 일 시 : 2022년 03월 24일(목)~25일(금)

▣ 코 스 : 초암농장-망루봉-1249.4봉-박회성(원점회귀)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

 

 

  1530년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편에 추성(楸城)과 박회성(朴回城)에 대한 기록이 있다. 마천면 추성리 두류능선 기슭의 추성과 영랑대 아래 초암능선의 박회성이다. 주민들의 구전에 추성을 가락성(가야성)이라고 하고, 박회성을 대궐터라고 한다. 추성 주변에 국골, 용바위, 어영골, 가마차골, 말달릴 평전, 두지터 등  지명이 남아 있어, 추성과 박회성을 금관가야 구형왕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양문화원에서 발간한 함양의 성곽(2019)에 추성의 위치(추성 : 지리산 하봉 아래 칠선계곡 방향)는 오류이다. 지리산 하봉 아래 칠선계곡 방향 초암능선에 있는 고성은 박회성이다.

 

구분 위치 고도  성곽 길이 면적 구전 비고
추성(楸城) 두류능선 645~877m 2090.0m 156,264.00㎡(47,269.86坪) 가락성  
박회성(朴回城) 초암능선 1215~1386m 1410.9m  94,101.02㎡(28,565坪) 대궐터  

 

  박회성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정경운의 고대일록(1596)이다. 임진왜란 때에 산음에 사는 박회성 성주 송업(宋嶪, 1526~?)이 성을 비우고 거창에 다녀왔다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곤장의 징벌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1596년(병신) 12월 19일 신사(辛巳), 성주(城主)가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산음(山陰)에 사는 송업(宋嶪)과 단성(丹城)에 사는 이유훈(李惟訓)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게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논의가 박회성(朴回城)의 일에 미치자 도체찰사가 크게 노하여, 그가 산성(山城)에 들어가지 아니한 죄를 따져 곤장(棍杖) 30대를 때렸다는 말을 들었다." 송업(宋嶪, 1526~?)은 명종 16年(1561)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로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상사(上舍) 송업(宋嶪)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박회성을 주목하게 된 것은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이다. 석상용약전에 상원진백무진이 나오는데, 혹시 상원진이 상원사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지난 2월 20일 상원사터를 답사하였다. 상원사터에서 상원사골로 650m를 올라가면 곧바로 박회성이다. 추성리 주민들은 대부분 박회성을 대궐터로 알고 있다. 1908년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에 "대궐기(大闕基)를 도적의 소굴"로 언급하고 있다. 일본군 진중일지대궐기(大闕基)는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하는 대궐터이고, 대궐터가 신동국여지승람 박회성이다. 이번 답사는 의병장 석상용의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대궐터)에서 막사터와 샘터를 찾고, 석루(石壘)와 흔적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1.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장성고창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고록천의 오기인 듯함)이 이끄는 일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그후 문태수 신명선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은 석상용(石祥龍, 1870~1920) 장군과 같은 마을 출신인 지광(枝光) 이종인(李宗仁, 1896~1982)의 기록이다. 이종인은 석장군보다 26세 연하지만, 평소 석상용 장군의 지략과 인품을 존경했기 때문에 두 분의 교분은 매우 두터운 사이였다. 石장군이 1917년 출옥하여 순국할 때까지 3년간 대화를 메모해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1974년 이 책을 발간하였다고 한다. 상원사터와 박회성은 인접해 있다. 이종인 선생은 석상용 추성 의진을 상원진으로 기록하고, 일본군 토벌대는 "천왕봉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있는 도적의 소굴(巢窟)"로 기록하였다.  

 

  ☞ 석상용(石祥龍, 1870~1920)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태생의 한말 의병장으로,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 고제량(高濟亮), 문태수(文太洙) 등과 제휴하여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별명은 비호장군으로일본군마저 공포에 떨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실상사전투와 지리산 쑥밭재, 벽소령 및 성삼재전투 등이 있다.

 

  실상사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석상용은 1908 4 29 50여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습격하였다가 접전 끝에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 11일 마천면 도마리 서당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려 하였으나, 면장 노지현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석상용 의병부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1912년 석상용이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이 일로 석상용은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 병마에 시달리다 1920 10 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일본이 우리 강토를 탐내고 갖가지 침략을 자행타가 끝내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고 정치에 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지라.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니 이것이 의병이었고, 의병을 진압시킨다는 구실로 일본은 자기네의 병력을 끌어들여 전국 각처의 요소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니 우리 고장의 들머리에 있는 실상사에도 주둔하고 있었는지라. 의병대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이 이를 소탕코자 백여 명의 병력을 모아 서기 1908년(戊申) 4월 29일 이 날이 음력 3월 그믐이라 야음을 타서 실상사를 포위하고 화심포 탄환이 다하도록  공격을 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횃불을 절마당에 던졌더니 왜병이 횃불을 주워 인근에 있는 나무더미에 던져 충전하는 화광을 이용하여 조총으로 반격하는지라. 이를 대응하였으나 실탄이 없으므로 약간의 희생을 당하고 후퇴하였다.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할 즈음에 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다.《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1908년 4월 29일(음 3.29) 밤 석상용 상원진은  백무진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백무진과 약속한 공격 시간이 어긋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놈들은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당시 노지현(盧址鉉) 마천면장의 용기와 끈질긴 설득으로 주민들이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상원사터에서 실상사까지는 칠성동→두지동→장구목→백무동→도마마을→실상사(입석리)를 잇는 루트이다. 일본군들은 실상사 길목의 도마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였을 것이고, 전후 상황으로 미루어 실제 실상사 기습에 가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천면 출신 의병 20명 중 도마마을 출신이 8명이다.

 

※ 마천면 항일의병 귀순자 명단(20명, 1908~1910)

 

  이선전(마천면), 문성주(45‧마천면 당흥촌), 박춘원(55마천면 당흥촌), 김문성(44‧마천면 당흥촌), 이성삼(45‧마천면 당흥촌), 김인중(59 마천면 당흥촌), 김명운(49마천면 당흥촌), 박성언(44마천면 당흥촌), 박문여(73당흥촌), 한태서(53‧도마천동), 박관지(53‧도마천동), 장명준(57‧도마천동), 한성서(76‧도마천동), 신경언(56‧도마촌), 임선경(67‧도마촌), 한치명(26‧도마촌), 한원숙(55‧도마촌) 김성배(마천면 양전), 전이현(마천면 추성), 강수성(마천면 창촌) [국사편찬위원회,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 242-243]

 

 

3. 일본군 『보병 제14연대(步兵 第14聯隊) 진중일지(陣中日誌)Ⅱ』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大闕基)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4. 명치 41년(1908) 4-12월 경상남도에서의 토벌

 

  경상남도 지리산은 경북 日月山과 같이 폭도의 소굴지로서 전년 이래 누차의 토벌을 가하였으나 심산유곡에서 교묘하게 우리 감시선을 벗어나 潛匿하면서 陰으로 향촌에 출동하여 약탈을 자행. 그들은 지리산 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수비대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 그 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四散)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朝鮮暴徒討伐誌』(1913), 767쪽

 

   지난주 경상대학교 김준형 교수님께 (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 등 관련 자료를 받았다. 토벌대의 진중일지는 1908년 6월 18일부터 6월 22일까지 토벌대의 대궐터 작전기록이 자못 상세하다. 일본군은 진작부터 대궐터(박회성)의 상원진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으나 대궐터는 험하고 요새이기때문에 접근하지 못한다. 1908년 6월 21일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의 입석 수비대가 연합하여 당시 마천면 노지현(?)면을 향도로 삼아 대궐터에 진입한다. 일본군 토벌대가 박회성에 진입했을 때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매우 흥미롭다.  

 

 

  1907년 2월 설날을 기해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의병진과 고광순(高光洵, 1848~1907) 부대가 연합하여 남원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한다. 대장을 잃은 양한규의 일대(一隊)와 고광순 부대는 지리산으로 들어온다. 문수사와 연곡사가 호남 의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10월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부대는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된다. 고광순 고제량 등 수뇌부를 잃은 의병들은 외당재, 내당재를 넘어 의신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초 설날을 전후하여 일본군의 매복 기습에 대부분 전사한다. 지리산 남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마천으로 숨어든다. 의병진에서 살아남은 일부 의병들은 마천면 추성리 출신 석상용 부대와 합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대가 상원진과 백무진이다. 1908년 4월 29일 두 부대가 연합하여 실상사를 공격하였다가, 6월 21일 박회성 대궐터의 상원의진이 일본군에 토벌당했다는 이야기이다.

 

  가. 1907년 2월 13일(음 1.1) 양한규 의진과 고광순 의진 남원성 공격(양한규 전사)

  나. 1907년 10월 17일(음 9.11)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 사망

  다. 고광순 의병장을 잃고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

  라.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 의신마을 하철굴암에서 야영 중 일본군 기습을 받고 대부분 전사함.

  마. 의신에서 생존한 호남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 의진에 합류하고 백무진과 상원진으로 재편함. 

  바. 1908년 4월 29일(음 3.29)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입석수비대를 공격함.

  사. 1908년 5월 11일(음 4.12) 일본군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도마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려고 함.

  아.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에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 수비대가 대궐터를 토벌함.

 

 

  사전에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박회성 답사에 나섰다. 일본군의 진중일지에 "대궐터(大闕基)"라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최근 박회성이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지만, 아직도 주민들은 박회성을 가야 구형왕의 대궐터라고 한다. 이번 답사에서 성곽과 북문지, 창고터, 건물터, 샘터, 망루, 깨진 솥단지 파편 등을 확인하였다. "백커피불여일숙(百珈琲不如一宿)이라."하였으니, 중요한 것은 하룻밤 상원진 의병이 되어 박회성 대궐터에서 일박(一泊)이 아니던가. 다음날 아침 건물터 세 곳을 복습하고, 남쪽 망루와 북문과 창고터를 확인한 후, 세 분은 상원사로 내려가고 나와 김 교수님은 어제 올라온 길로 내려섰다. 이번 답사를 요약하면, ① 박회성(대궐터)은 가야의 역사가 구전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②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따르면 박회성은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피난성이고, ③ 무엇보다 박회성(대궐터)이 구한말 지리산 항일의병의 항전지라는 점이다. 끝.

 

 

한말 항일의병 박회성의 상원(추성)진과 백무동의 백무진 : https://lyg4533.tistory.com/16488769

 

 

 

마당바위
전망대(마천면 추성리 산 106-2)
大 3□9
북쪽 성곽
북쪽 성곽
북문(고도 1289m)
내성 성곽
내성 성곽

 

▼ 건물터 A

건물터A(3.5m*7.5m)
건물터 A
샘터
솥 파편
솥 파편

 

▼ 건물터 B

 

건물터 B
외성
솥 파편
석루(石壘)
내성과 외성 사이 와편
내성과 외성 사이 와편
피난성 팻말
광거정

 

 

▼ 건물터 C(북문 근처에 있음)

 

초암능선 80m에 인접한 샘터(고도 120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