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대·독녀암의 또 다른 이름 독녀성(獨女城) 이야기
▣ 일 시 : 2023년 12월 02일(토)~03일(일)
▣ 코 스 : 송대마을-은병암-선녀굴-유슬이굴-선열암-독녀암(노장대)-신열암-의논대-고열암-미타봉-상내봉-와불산(1213.9봉)-일강-아홉모랭이길-방장문-청이당-어름터-광점동
▣ 인 원 : 3명
▣ 날 씨 : 흐림(영하1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1656)』,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778)』 등에 독녀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 『여지도서』에는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방향이 다르다. 1930년대에 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6)』에는 '군의 서쪽 27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전 고전번역원에서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산음12영(山陰十二詠) 중 제8수 독녀심선(獨女尋仙)과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산음8영(山陰八詠) 중 제7수 독녀심선(獨女尋仙) 시를 찾아 읽게 되었다. 독녀암이 산음 12경과 8경인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산음의 행정구역이었다는 것이다. 어득강의 독녀심선(獨女尋仙) 시의 제목에 '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부기(附記)를 하였다. 확인과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독녀성이 독녀암임을 밝히고 있다. 독녀암의 이칭 노장대(老將臺)는 독녀성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注 오석강(烏石岡) : 어득강의 산음12영 중 제2수 烏石行春[오석(烏石)에 봄나들이를 가다.]의 주석에 '縣西十里有黑石村 余效王半山改爲烏石[현의 서쪽 10리에 흑석촌(黑石村)이 있다. 내가 왕반산(王半山, 왕안석의 호)의 過外弟飮(외사촌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 3구에 나오는 시어 오석강(烏石岡)을 본받아 고쳐서 오석(烏石)이라고 하였다.] '라는 문구가 있다. 오석강(흑석촌)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금석골(검석골)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민구(李敏求)의 '독녀심선(獨女尋仙)' 3구에는 '과주선(果州仙)'이 나온다. 과주선(果州仙)은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과주(果州)에 살았던 여도사(女道士) 사자연(謝自然)을 가리킨다. 그녀는 본래 과주(果州) 남충현(南充縣)의 한녀(寒女)였다. 『촉중광기(蜀中廣記)』 권28 「광안주(廣安州)」에 "당나라 정원(貞元) 10년 갑술년(794년)에 과주(果州)의 여자 사자연(謝自然)이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자사 이견(李堅)이 장계로 보고하였다. [唐貞元十年 歲在甲戌 果州女子謝自然 白日昇仙 刺史李堅以狀聞]"라는 고사에서 독녀암이 유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注 唐貞元十年 歲在甲戌 정원 10년은 794년이다.
지명은 땅의 얼굴이요. 언어의 화석이다. 지명에는 역사와 유래를 담고 있다. 지리99가 지리산길 지도에 독녀암(노장대)을 함양독바위로 표기하면서 널리 퍼졌다. 이제는 누구나 함양독바위라고 부른다. 진주독바위도 산청독바위로 개명하였다. 진주독바위에 진주암(眞住菴)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의 문집에 '진주암 우제야(眞住菴 遇除夜 : 진주암에서 섣달 그믐밤을 보내다.)'라는 시가 있다. 하수일은 남명의 문인이고 진주 사곡 사람이다. 오래전에 남명학연구소에서 진주암(眞住菴)을 찾아서, 일정(一丁) 민선생님이 안내한 일이 있다고 한다.
지리99는 말봉도 두류봉이라고 한다. 2014년 날끝산막골에서 사고가 났을 때, 두류봉 아래라고 사고가 접수되었다. 공단 직원들은 밤새도록 국골 사거리에서 조난자를 찾아 헤맸다고 한다.(이명희 주무관) 아미타불 형상에서 유래된 미타봉도 상내봉이라고 한다. 청이당터도 제 위치에서 100m쯤 벗어나 있다. 이렇게 지리산 곳곳에 잘못 표기된 지명들이 수두룩하다. 명백하게 밝혀진 것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 더 문제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 표기되고 새 이름으로 개명된 지명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볼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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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녀암(노장대)의 또 다른 이름 독녀성(獨女城)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
가.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獨女城 在縣西二十七里 石築 周一千七百三十尺 有溪泉 今皆頹圮
【고적】 독녀성(獨女城) : 현의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나. 1656년 편찬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卷四下 「경상도, 산음현」
獨女城 :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음.
注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지리지
다. 1765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補遺編】 慶尙道
獨女城 :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음.
注 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 읍지.
라. 1778년 편찬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의 폐지된 산성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마. 1636년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산청군편(山淸郡編)」
獨女城 : 在郡西二十七里 石築周一千七百三十尺 有溪泉 今廢
독녀성 : 군의 서쪽 27리에 있다. 석축의 둘레가 1,730척이고, ‘골짜기와 샘’이 있다. 지금은 무너졌다.
바. 어득강의 山陰十二詠 중 제8수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
[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三峯森戟削 : 세 봉우리 창을 깎은 듯 뾰족한데
獨女露城稜 : 독녀암이 성곽 모서리를 드러냈네.
日日樓中望 : 날마다 누각 안에서 바라보았으니
躋攀記我曾 : 올라가면 일찍이 나를 기억하리라.
注 어득강(魚得江, 1470~1550) : 조선 전기의 문신. 독녀심선(獨女尋仙) : 『관포선생시집(灌圃先生詩集)』의 山陰十二詠 중 제8수이다.
사. 이민구의 산음팔영(山陰八詠) 중 제 7수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
獨女最高峯 : 가장 높은 봉우리 독녀암은
蒼蒼但煙霧 : 푸르고 푸르러 연무만 자욱하네.
寧知果州仙 : 어찌 알랴 과주의 신선이
不在鍊丹處 : 단약 굽는 곳에 있지 않음을.
注 이민구(李敏求, 1589~1670) :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로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아들이다. 독녀심선(獨女尋仙)은 『東州先生前集』 卷之三 「嶺南錄」에 나오는 산음팔영(山陰八詠) 중 제 7수이다. 과주선(果州仙) : 당나라 때 과주(果州)에 살았던 여자 신선 謝自然(사자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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