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용추(龍湫)

도솔산인 2023. 4. 16. 20:47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용추(龍湫)

 

 

▣ 일 시 : 2023년 04월 16일(일)

▣ 코 스 : 1곡 松瀝洞(송력동)-2곡 옥룡추(玉龍湫)-3곡 학서암(鶴捿岩)-4곡 서암(瑞岩)-5곡은 유선대(游仙坮)-6곡 지주대(砥柱坮)-7곡은 비폭동(飛瀑洞)-8경천벽(擎天壁)-9곡 교룡담(交龍潭)

▣ 인 원 : 2명(지리산아님)

▣ 날 씨 : 흐림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용추(龍湫)는 용호구곡의 옛이름이다. 용호구곡은 근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원천(元川). 용호동(龍湖洞), 용추동(龍湫洞)이라고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며 흰 바위가 있었다. 시내의 너럭바위에는 구멍이 파여서 도랑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맑은 못을 이루었다. 그 위에는 또한 주자(朱子), 송자(宋子) 두 선생의 영정을 모셨던 집의 옛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655 10월 8일 김지백은 원천원(元川院, 현 지리산둘레길 남원 주천 안내 센터)에서 일행들을 만나 용추(龍湫)를 거쳐 파근사에서 묵고, 10월 11일까지 나흘간 화개동천 일원을 유람한다. 유람의 목적은 청학동(불일평전)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흘간의 유람에서 일행들이 지은 100여 편의 한시를 1권의 시집으로 만들면서 김지백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유람 일정은 전라북도 남원 주천면 장안리 원천원(元川院)을 출발하여 용추동(龍湫洞)파근사(波根寺)→폭포(수락폭포)구례 화엄사(華嚴寺)연곡사(燕谷寺)화개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동칠불암(七佛庵)에 들러 옥부대(玉釜臺)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동행자는 서국익(徐國益), 이자원(李子遠), 한여근(韓汝謹), 노운경(盧雲卿), 서대숙(徐大叔) 등 6명이다.

 

  원천원에서 용추동(용호구곡)을 거쳐 파근사로 가는 길은 ① 1곡에서 9곡까지 협곡으로 가는 길, ② 6곡에서 7, 8곡을 거치지 않고 코재로 올라 9곡을 둘러보고 내기마을을 경유하는 길, ③ 1곡 松瀝洞(송력동)에서 송림사를 경유하는 길이 있다. 내기마을 사람들이 주천場을 보러 갈 때, 주로 ②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6곡 지주대(砥柱坮)에서 코재를 경유하는 길은 경사가 조금 급하지만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용호구곡의 석각은 사전에 준비가 없어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어느 선관물자(善觀物者)의 "단지 나의 오류나 미숙으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타인에게 전해지는 걸 결코 원치않는다."라는 말에 공감하며 글을 맺는다.  끝.

 

원천원(元川院) : 관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현재 '지리산둘레길 남원 주천 안내 센터'로 추정한다. 김지백(金之白, 1623~1671) : 자는 자성(子成), 호는 담허재(澹虛齋),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이며,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과 교유하였다. 1658(효종 9)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11년 유몽인과 지리산을 유람한 재간당 김화(金澕, 1571~1645)의 조카이다. 저술로 담허재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삼만(李三晩, 1770~1847)  : 본관은 전주, 자는 윤원(允遠)이며 호는 창암(蒼巖)·강암(强巖)·강재(剛齋) 등이다.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전주에서 살았으며 이광사(李匡師)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으며, 경남 하동 칠불암의 편액도 그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


   10 8일,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 주천면 장안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바로 을미년(1655) 10 8일 무오일이다. 자원(子遠) 이문재(李文載)와 한여근(韓汝謹) 또한 기약이나 한 듯 함께 왔고, 중도까지 전송한 자로 또 노운경(盧雲卿)이 있다. 이 네 벗은 모두 나와 같은 해에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서국익에게 서대숙(徐大叔)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또한 서국익과 함께 왔으니, 우리의 행차가 더욱 외롭지 않았다. 이에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大興寺, 파근사)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수락폭포)를 구경하고감로사(甘露寺, 천은사)를 지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佛堂)을 구경하였다. 다시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쌍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번이나 굽이돌아 시내 건너 골짜기를 찾아 저물녘에 연곡사(燕谷寺)에 이르러 묵었다.

 

  注 이문재(李文載, 1615~1689) : 자 자원(子遠) 호 석동(石洞) 본관 전주(全州) 김집(金集)의 문인. 서문상(徐文尙, 1630~?)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국익(國益), 호는 송파(松坡), 나산(羅山),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의 아들이다. 1655(효종6)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68(현종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정언, 문학을 지냈다. 이듬해 사서, 부수찬, 1677(숙종3) 병조참의에 올랐다. 한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풍문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아들 서종태(徐宗泰)의 탄원으로 신원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 : 김지백의 담허재집(澹虛齋集) 5에 수록되어 있다.

 

 

■ 1597년 조경남의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 9월 15일 (파근사에서) 양형과 같이 가족을 인솔하고 송림사(松林寺) 터로 내려가니 상사(上舍) 정사달(丁士達) 형제가 처음 파근원(波根源)에서 패배를 당하여 몸만 빠져 남으로 달아났다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남촌에서 밤에 몰래 오다가 들 가운데서 나와 만나게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이어서 산으로 들어가 한 곳에다 초막을 쳤다.

○ 十五日 與梁兄率家眷 下松林寺基 丁上舍士達兄弟 初在波根源見敗 脫身南走 聞余還家山 自南村冒夜潛來 遇於野中 摻手痛哭 因入山 誅茅於一處

 

 

용호구곡(龍湖九曲)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龍湖九曲)은 남원 팔경 중 제1경이다. 특히 구룡폭포(九龍瀑布)는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해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 중간에 형성된 구룡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폭포로, 원천천 상류에 있어 원천폭포라고도 불리운다. 용호구곡(龍湖九曲)의 협곡은 감입곡류 하천으로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이 급류에 깎이면서 곳곳에 소()와 단애(斷崖그리고 반석(盤石)이 특징적인 지형 경관을 이루었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5km에 이르는 심산유곡이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 부른다. 용호구곡은 용호서원의 전신인 용호정사(龍湖精舍)의 경영주체인 원동향약계와 기호학파 사림에 의해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 초기 사이에 설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구곡의 석각 또한 용호서원이 건립된 시기로 추정한다. 구곡 문화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유행했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연원한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2곡은 옥룡추(玉龍湫) 일명 용소(龍沼), 또는 불영추(佛影湫), 3곡은 학서암(鶴捿岩), 4곡은 서암(瑞岩), 5곡은 유선대(游), 6곡은 지주대(砥柱坮), 7곡은 비폭동(飛瀑洞)→바위 글씨에는 비포동(飛㳍洞), 8곡은 경천벽(擎天壁) 일명 석문추(石門湫), 9곡은 교룡담(交龍潭)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제3곡 학서암(鶴捿岩)을 제외하고 구곡(九曲)을 알리는 석각이 유존한다. (編)

 

 

■ 제1곡(曲) 송력동(松瀝洞)

 

  송력동(松瀝洞)이 제1곡(曲)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다. 석녀골 남쪽 1리에 송림사(松林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사 폐사지에 무너진 탑(敗塔)이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송력동(松瀝洞) 이름은 송림약천(松林藥泉, 송림약수)에서 유래하였다. 송림약천(松林藥泉)여궁석(女宮石)을 가리키는 듯하다. 옥녀봉 아래 여궁석(女宮石)의 강한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비보 풍수 시설인 돌로 쌓은 축대(築坮)가 있다.

 

  송림약천(松林藥泉) :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 축대(松林築坮)를 넘어서 수보를 나아가면  한길 높이의 바위 이마에서 청류가 구슬처럼 드리우니 이곳이 소위 송림약천(松林藥泉)이라. 봄과 여름이 바뀔 때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들(화장을 한 여자와 시원한 건을 쓴 남자)이 길을 다투어 운집하니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이 이로부터 유래했다." '송림약천에서 목욕을 하면 아들을 낳고 병이 낫는다.'라는 속설(俗說)이 있다. 김재홍은 여궁석(女宮石)을 송력동(松瀝洞)으로, 김사문은 송림약천(松林藥泉)으로 에둘러 표현하였다. 봄에 호경리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화전(花煎)놀이를 했다. 기(氣)를 받기 위해서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고 하니, 민초들의 치유 공간이었던 셈이다.

 

 

 

1곡(曲) 송력동(松瀝洞)
옥녀봉 아래 여궁석(女宮石)의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비보 풍수 시설인 돌로 쌓은 축대(築坮)
여궁석(女宮石)이 송림약천(松林藥泉)이 아닐까.

 

■ 제2곡(曲) 옥룡추(玉龍湫)

 

  옥녀봉 용호정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을 일명 '용소(龍沼)'라고 하며, 옥룡추(玉龍湫), 또는 불영추(佛影湫)라고 한다'용호석문(龍湖石門)'과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각자 사이에는 석불이 있었는데,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佛影湫)라고도 한다. 옥룡추(玉龍湫)는 '용이 사는 옥처럼 푸르고 깊은 소(沼)'를 의미한다. 용호구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불이대 (不二坮)의 '용호정사동구(湖精舍洞口)'와 풍호대 (風乎臺)의 용호육우(龍湖六愚) 등 인명 석각은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풍호대 (風乎臺)에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과 그의 아들 남구순(南久淳)의 인명 석각이 있다.

 

 

천왕봉에 있는 남주헌 석각(1807년) 경상도관찰사 尹光顔, 진주목사 李洛秀, 함양군수 南周獻, 산청현감 鄭有淳
용호구로회 오른쪽에 1807년 지리산을 유람한 함양군수를 지낸 남주헌(南周獻)과 아들 남구순(南久淳)의 인명 석각

九老會

盧悳鉉, 李在喜, 盧洙鉉, 許欇, 盧東源, 梁翰英, 盧允源, 盧炯源, 林成澤

甲子三月  日

 

구로회 하단

朴濟鉉 甲辰夏, 南久淳, 盧致壽, 鄭亨晩, 鄭大圭, 盧學烈, 盧光三, 鄭熙泰

 

구로회 우측 상단

柳奎運, 梁漢謨, 南周獻

 

구로회 우측 하단

崔成九, 柳慶龍, 柳學祖

 

 

  注 남주헌(南周獻, 1769~1821)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1798(정조 22) 사마시에 합격, 세마·호조좌랑·감찰을 거쳐 함양·무주·남원·임천 등의 수령을 역임하며 주로 외직을 맡아 치적을 남겼다. 특히 1808(순조 8) 함양군수 재직시 암행어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서(陞敍)되고 이듬해 남원부사가 되어서는 진휼에 힘쓴 공으로 표창을 받았다. 1814년 정시 문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사헌부·홍문관·규장각·세자시강원 등을 거치며 검토관·선교관 등으로도 활약하였고, 1819년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를 끝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의재집(宜齋集)이 있다. 남구순(南久淳, 1794~?)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경장(景長) 양부 남종헌(南宗獻) 생부 남주헌(南周獻) 음보로 판관을 지냄.

 

 

龍湖六愚

小松 鄭宗黙, 黙齋 盧鏞鉉, 小山 金庸鉉, 又松 柳永郁, 素晦 朴善和, 秋園 朴昌圭

甲子 端陽

 

2곡(曲) 옥룡추(玉龍湫)

 

■ 용호서원(龍湖書院) 

 

  용호서원은 1868년 서원이 철폐되면서 매각되어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 용호정사를 지어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契)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 등이  주축이 되어 건립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를 배향하였고, 이후 한말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비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아들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1975)를 배향하였다.

 

  注 송병선(宋秉璿, 1836~1905) :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혹은 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9세손이며, 면수(勉洙)의 맏아들이다.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송시열의 9세손으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다. 1877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또 고종을 알현하여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30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은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53권이 있다. 사후 고종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제3곡(曲) 학서암(鶴捿岩)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있는 황학산(黃鶴山)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釣臺)가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3(曲)이다. 학이 날아들어 쉬는 풍경이 아름다워 학서암(鶴捿岩)으로 불렸다는 설과 학들이 물고기를 잡아 먹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학서암(鶴捿岩)'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학서암 각자는 수해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구시소(?)

 

 

■ 제4곡(曲) 서암(瑞岩)

 

  구시소 위쪽 약 50m 지점의 계곡 건너편 바위의 형상이 마치 스님이 무릎을 꿇고앉아 독경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서암(瑞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독경 형상의 바위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챙이소와 함께 반석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조금 진행하면 칠성암터가 있다.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七星庵으로 名庵함은 七人有志의 共築한바이러라."라는 문구를 볼 때, 건축 당시에는 일곱 명의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는 시사(詩社)의 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다.

 

서암(瑞岩) : ()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이다.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 하였다 한다.心經 卷1이 성성법(惺惺法)은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항상 일깨우는 방법을 말한다. 스님이 독경하는 바위의 형상에 서암(瑞巖)이라는 스님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구시소와 챙이소 : 계곡내 바위가 '구시'(구유의 경상도 방언)를 닮아 구시소라고 하고, 곡식의 쭉정이, 티끌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쓰인 도구인 '챙이'(키의 전라도 방언)를 닮아 챙이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4곡(曲) 서암(瑞岩)
챙이소

 

■ 제5곡(曲) 유선대(游仙坮)

 

  이곳은 반반한 바위에 금이 많이 그어져 있어 선인(仙人)들이 바둑을 두며 즐겼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유선대(游仙坮)라 불리며, 주변의 절벽은 선인(仙人)들이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병풍을 쳐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은선병(隱仙屛)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윷판이 새겨져 있다. 바둑판 바위는 1960년 태풍 카르멘(CARMEN)의 수해 때 뒤집어졌다고 한다.(호경리 노국환님, 1944년생) 윷판 옆에 확이 있는데 살피지 못했다.

 

 

5곡(曲) 유선대(游仙坮)

 

 

■ 제6곡(曲) 지주대(砥柱坮)

 

  남원시에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육모정에서 시작하여 구룡폭포까지 약 4km를 굽이쳐 흐르는  구룡계곡의 9곡 중 6곡이 지주대(砥柱坮)이다. 6곡 둘레의 기암 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바치듯 구름다리 앞에 자그마한 봉우리가 솟아 있어 지주대(砥柱坮)라고 한다. 지주산(砥柱山)는 '황하 가운데 있는 산으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지주대(砥柱坮)는 절개를 의미하는데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안내판의 제6곡의 한자 곡(谷)은 오자로 보인다.

 

注 지주대(砥柱臺) : 지주(砥柱)는 지주(厎柱)라고도 쓰는데 산의 이름임. 하수(河水)의 중류(中流)에 있음. 사람이 홀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중류지주(中流砥柱)라 이름.(고전번역원)

 

 

6곡(曲) 지주대(砥柱坮)

 

 

■ 제7곡(曲) 비폭동(飛瀑洞)

 

  이곳은 구룡계곡(九龍溪谷) 9곡(曲) 중 제 7곡인 비폭동(飛瀑洞)이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반월봉(半月峰)이다. 반월봉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이곳 폭포에 떨어지며 아름다운 물보라가 생기는데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하여 비폭동(飛瀑洞)으로 불리고 있다.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와 「용호구곡십영」에는 비폭동(飛洞)이라고 하였으나 석각은 비포동(飛洞)으로 새겼다. 로 새긴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각을 하기에 획이 복잡해서 그런 것은 아닐는지. 재미있는 것은 폭(瀑) 포()로 쓰고 폭으로 읽었다. 구룡폭포도 구룡포(九龍)로 새겼다.

 

 

비폭(飛瀑)
7곡(曲) 비폭동(飛瀑洞); 석각은 비포동(飛㳍洞)

 

■ 제8곡(曲) 경천벽(擎天壁)

 

  비폭동(飛瀑洞)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고 해서 석문추(石門秋)라 하는데, 바로 이곳이 8곡이다. 하늘을 떠받드는 절벽이라는 의미로 경천벽(擎天壁) 석각이 있다. 괴산 화양구곡에도 경천벽(擎天壁)이 있다.

 

 

8곡(曲) 경천벽(擎天壁)

 

■ 제9곡(曲) 교룡담(交龍潭)

 

  만복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여기에 이르러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두 갈래 폭포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틀거리듯 하므로 그곳을 교룡담(交龍潭)이라 한다. 용호9곡의 최고점으로 예로부터 방석동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므로 구룡폭포라 불린다.

 

 

구룡대(九龍臺)
9곡(曲) 교룡담(交龍潭)
구룡포(九龍㳍)
천룡암 방에 있는 옛 우물
코재의 옛길 흔적
코재의 옛길 흔적

 

■ 1940년 난사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불신당(佛神堂)

 

   이암(鯉岩)를 등지고() 산의 북쪽 기슭(北麓)을 우러르매() 암벽(岩壁)의 돌 처마(石簷)가 높이()는 가히 한길(一丈) 넓이()는 가히() 10인(十人)이  앉을 수 있는 자연이 만든(天作) 감실(龕)에 한 구(一軀)의 석상(石像)을 안치하였나니(安) 이것이() 이른바(所謂) 불신당(佛神堂)이다. 먼 옛날 (古代) 송림사(松林寺)의 유물(遺物)인대, 등림객들이(登臨客)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香禱한 者) 많더니, 뜻하지 않게(不意) 지난 갑술(1934)년 여름(甲戌夏)에 운악암의 중(雲岳菴僧)이 몰래 지고간바(竊負) 되여 호경리 사람들이 자취(湖景人士)를 쫓아가서()  꾸짖고 돌려받으니(可惜) 가히 애석하다(可惜). 도승(盜僧)이 조심하지 않아(不謹) 머리와 얼굴(頭面)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하였도다.(未得全帰)

 

  鯉岩을 背하고 北麓을 仰하매 岩壁石簷이 高可一丈廣可十人坐의 天作龕에 一軀의 石像을 安하엿나니 此所謂佛神堂이라. 古代松林寺의 遺物인대 登臨客의 香禱한 者多하더니 不意去甲戌夏에 雲岳菴僧의 竊負한바되여 湖景人士踪을 追하야 責還하니 可惜하다. 盜僧■(이)不謹으로 頭面이 未得全帰로다.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龕壁面 南無阿彌陁佛의 新刻紅은 盧洙鉉의 誠墨이요."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김두수(金斗秀) 팔세서(八岁書) 岁=歲의 이체자

 

  龍湖品題

 

  己巳春 松察 與諸同志 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年 : 기사년 봄은 송찰(松擦)이 여러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호상(湖上, 용호구곡)에서 노닐면서 차례대로 구곡의 지명을 선정하여 평석(넓은 바위)에 새긴 해이다.

 

八斗孫待行三月望日 : 팔두(八斗) 손대행 3월 보름(15일)

 

  注 品題 : 사물의 가치나 우열을 문예적으로 평가하는 일. 己巳 : 1929년. 松察 : 용호구곡 10영을 지은 嶺松 김재홍(?). 選次 : 차례대로 선정하다. 九曲地名 : 구곡의 지명. 八斗 : (?)

 

 

蘭史 金思汶의 「 용호구곡경승안내 ( 龍湖九曲景勝案內 ) 」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에는 제1곡 송력동의 유래, 송림사가 폐사가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石文)을 쓴 사람들, 제4곡 서암과 칠성암(七星庵) 이름의 유래, 제5곡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1570∼1641)의 일화, 제8곡 경천벽(擎天壁)과 제9곡 용화굴(龍化窟)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사문「龍湖九曲景勝案內)https://lyg4533.tistory.com/16488916

 

 

옛 원천원 자리(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259-1)에는 지리산둘레길 안원 주천 안내센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