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용암사지에서 하룻밤(230331~0401)
▣ 일 시 : 2023년 03월 31일(금)~04월 01일(토)
▣ 코 스 : 대동저수지-용암사지-향로봉능선-구정봉-마애석불-용암사지-대동저수지
▣ 인 원 : 5명(산친들과)
▣ 날 씨 : 맑음
월출산 용암사지 주변 정밀지표조사
■ 용역보고서 주요내용
월출산 용암사지 주변 정밀지표조사 용역보고서가 나왔다. 영암군의 의뢰로 (재)나라문화연구원(원장 박태홍)이 맡아 추진한 이번 용역은 1995년 지표조사를 통해 용암사가 고려시대 초반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가람의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법당과 남쪽에 작은 요사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용암사지를 복원하기 위해 이뤄졌다. 이번 용역은 용암사지를 포함해 대동제에서 용암사지에 이르는 주변에 대한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도 목적을 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 월출산 용암사지 현황
경주 남산 견줄 만큼 많은 불교 유물유적 산재
월출산은 골산이기 때문에 많은 골짜기들이 있으며, 여기에는 경주 남산과 비교될 만큼 여러 가지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남 지방에서 단일 산으로 월출산만큼 불교유적을 많이 갖고 있는 산도 없다. 월출산의 불교문화는 지금까지 많은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부분별 연구가 되어 있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는 상태다. 불상은 마애불 5구, 석조불 5구, 대형 석불편 1구, 금동불 2구, 목불 다수 등이 있다. 석탑은 3층 석탑 5개, 5층 석탑 3개, 폐 석탑 3개소 등 11개가 있다. 아울러 건물지의 발굴조사, 석탑의 복원, 새로운 문헌자료의 등장 등 계속해서 자료들이 속출하고 있으므로 보다 깊이 있는 불교문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1972년 발견된 월출산 마애불은 그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우수해 바로 국보 제144호로 지정됐다. 마애불의 조성 시기는 그 양식을 통해 통일신라 후기, 나말여초, 고려 초기 등 각각의 의견들이 피력되어 왔다. 마애불은 그 주변에 기와나 자기 같은 유물들을 공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흔하지 않지만 다행히 월출산 마애불은 주변에서 많은 기와가 수습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문기와도 함께 출토됐다.
■ 용암사지 조사내용
상·하단 석축 최상단 석축 우물 절구 등 확인
이번 조사에서 용암사지는 하단 석축과 상단 석축 평탄지 뒤쪽 후면(최상단) 석축이 확인됐다. 하단 석축은 길이 28.5m, 높이 약 2∼3m로, 34∼80㎝ 크기의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고, 하단 석축에서 2m정도 떨어져 상단 석축이 쌓아져 있다. 상단 석축은 길이 23.5m, 높이 1m 정도다. 상단 석축 위에는 길이 23m, 너비 22m 정도 규모의 평탄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평탄한 대지에는 16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중앙에 위치한 초석 간의 거리는 2.3m 내외로 비교적 균일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초석은 대부분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고, 대략 70×66×17㎝ 정도다. 초석배치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추정된다.
후면(최상단) 석축은 평탄대지의 뒤쪽 경사면에 상하 2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하단 석축은 길이 11m, 높이 1.7m의 규모로 대형의 자연석을 사용해 쌓았고, 석축의 양쪽 모서리 쪽에는 자연암반이 노출되어 있다. 이 석축은 하단에 비해 상단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하단 석축의 중앙에는 우물이 확인된다. 현재도 사용 중이다. 우물의 크기는 너비 174㎝, 깊이 120㎝ 정도다. 우물의 석축 앞에는 수조가 있으며 남쪽 모서리 쪽으로 배수로도 확인된다. 우물의 뒷벽은 자연암반이 노출되어 있고, 좌우에 판판한 석재를 사용해 벽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천정은 장대석을 횡가해 축조했다. 후대에 가운데 있던 장대석이 무너진 것으로 판단됐다. 용암사지 평탄대지 북서쪽에는 건물지 내에 높이 53㎝, 지름 75㎝ 크기의 절구 1기가 있다. 절구는 중앙에 직경 45㎝, 깊이 33㎝ 정도 되는 구명이 파여 있다.
■ 마애여래좌상 조사내용
주변에 명문와편 확인 保護閣 목조전실 가능성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은 사다리꼴의 방형 암반에 양각으로 부조되어 있다. 하단에는 방형의 대좌를 배치하고 하면에는 인위적으로 암석을 떼어낸 흔적이 보인다. 소발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솟아 있고, 상호는 몸에 비해 큰 편으로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엄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방형의 형상으로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선각으로 표현된 의문이 왼쪽 팔을 걸쳐 다리의 하단까지 걸쳐 있어 상현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각부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가부좌한 다리부분은 평판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배면의 암벽에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된 광배가 조각되어 있고, 2조의 선각으로 표현된 광배의 내구에는 단엽 연화문이 조식되었으며, 중간에는 화문이 있다. 신광 역시 2조의 선각으로 표현되었는데, 유려한 당초문이 조식되어 있다. 광배의 외연에는 전체적으로 화염문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지물을 들고 있는 90㎝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불상이 새겨진 암벽의 상면에 방형의 구멍이 있고, 주변에서 명문와편을 비롯한 기와편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보호각 내지는 목조전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됐다.
■ 삼층석탑과 승탑 조사내용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 승탑은 조선 후기 조성
용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283호)은 사역 동편 높직한 암반 위에 있다. 암반의 상면은 5×5m 크기의 규모로 비교적 평평하게 마련되어 있고, 암반의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은 산등성이에 인접해 있다. 바로 이곳에 붕괴된 석탑재가 흩어져 있었다. 현재는 복원해 놓은 상태다.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고, 상면에 탑구를 돌리고 있다. 탑구의 상단에는 호형 1단의 몰딩을 조출해 기단을 감싸고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각면 3매의 석재를 면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상면에는 4매로 구성된 갑석을 놓았다. 탑신석은 1석으로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초층, 2층, 옥개석은 각 2매로 조성되었고, 3층은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각각 1층 5단, 2층 4단, 3층 3단의 층급받침을 치석했다. 3층 옥개석의 상면에는 노반석이 있다. 이 석탑은 각 부재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면석 내부에 감실과 같은 방형의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대석 위에 판석과 같은 잘 치석된 석재를 바닥으로 깔고 그 위에 4매로 사각형 감실을 만들고 갑석 바로 밑까지 닿게 뚜껑을 올려놓았다. 이곳에는 유물이 없었으나, 이 감실의 바닥석 밑, 즉 지대석이 놓여있는 층위에서 4매석으로 만든 조그만 사각형 감실이 또다시 마련되어 있다. 내부에 백자호에 청자뚜껑을 덮은 외사리기가 출토됐다. 이러한 형식은 드문 예로, 백자호 안에는 금동보살좌상과 사리호가 들어 있었다.
마애여래좌상의 전면 약 150m 떨어진 곳에는 높이 1.8m 정도의 길쭉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높이 2.4m의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갑석의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을 치석해 탑신을 받고 있다. 초층 탑신과 3층까지의 옥개석만 지니고 있다. 초층 탑신은 하나의 석재로 되어있고, 면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 역시 각 1석으로 조성됐다. 하면에는 각 3단씩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각의 반전 역시 둔중하다. 이 석탑은 비록 소형이고 부재의 일부를 결실하고 있지만, 사방이 조망되는 위치에 건립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앞서 고찰한 삼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용암사지의 입구에는 승탑 2기가 남아있다. 이 승탑들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고, 전면에 길이 4.5m, 높이 0.6m 정도 규모의 석축이 있으며, 측면에는 길이 3.5m의 석축이 쌓아져 있다. 그리고 후면에는 길이 4m, 높이 0.8㎝의 석축이 있다. 평탄지의 규모는 4.5×3.5m 정도이고, 전면 석축 중앙에는 1m 정도 폭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석종형 승탑1은 전체높이 135㎝로, 기단부는 길이 73㎝, 높이 17.5㎝이고, 탑신석은 석종형으로 높이 96.5㎝에 최대 폭 71㎝이고, 중앙에 ‘죽암당(竹菴堂)’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연봉형의 보주로, 높이 21㎝, 폭 37㎝로 탑신부와 동일석재로 되어 있다.
석종형 승탑2는 전체높이 156㎝로, 기단부는 상면에 연판이 조각되어 있고, 길이 95㎝, 높이 25㎝이며, 탑신부는 높이 114㎝, 최대 폭 74㎝로, 중앙에 음각으로 글씨를 새겼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상륜부는 연봉형 보주로, 높이 17㎝, 최대 폭 27㎝이고, 탑신부와는 다른 별도의 석재를 사용했다. 이 석종형 승탑들의 조성 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됐다.
■ 대동제∼용암사지 구간 조사현황
절터 4곳 추정 건물지 2동 각석 2기 조사보고 성과
대동제∼용암사지 구간 조사에서는 그동안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보고되지 않았던 절터 4곳(큰골사지1∼4), 추정 건물지 2동, 각석 2기 등이 조사 보고되는 성과를 거뒀다. 대동제 뒤편 출입통제구역 입구 주변에 위치해 있는 각석1은 ‘대동문(大洞門)’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큰골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출입통제구역 입구에서 대곡교를 지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각석2는 송은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다. 상류에는 대동폭포가 위치해 있다.
큰골사지1은 용암사지로 올라가는 등산로 상에 위치해있다. 옆으로는 수도골이라는 골짜기가 흐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에서 숯을 구웠다고 전해지고 있어, 절에 기와나 숯 등을 공급하는 공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석축은 확인되지 않으며 편평하고 넓은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지 중앙에는 무연고묘 1기가 확인되고 있고, 대지 전면에 산죽과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등산로로 인해 절개된 면에는 기와편, 자기편, 숯 등이 확인됐다.
큰골사지2는 등산로를 따라가다 큰골 계곡의 본류를 건너 확인됐다. 전체적으로 능선의 끝자락 평탄면에 조성되어 있다. 석축의 총 길이는 24m이고 일부 단이 지면서 2개의 석축이 이어져있다. 1호 건물지는 길이 13m, 너비 8m이고 높이는 약 3m정도로 높게 축조되어 있으나 붕괴가 매우 심했다. 2호 건물지는 길이 11m, 너비 7.5m이고 역시 붕괴가 심해 석축면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뒤쪽으로는 배수로를 마련해 배수를 용이하게 했다. 기와편 등도 수습됐다.
큰골사지3은 큰골사지2에서 200m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능선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석축이 잘 남아 있는 동쪽의 경우 최대 높이 2.3m가 잔존하나 대부분 붕괴되어 원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길이는 39m로 추정되며 남동쪽의 석축은 최대 길이 17m 정도 잔존하고 있다. 상부에 넓은 평탄면이 형성되어 있다. 수습유물은 기와편, 옹기편, 자기편 등이다.
큰골사지4는 용암사지로 오르는 계곡부의 왼쪽 능선 아래에 위치해있다. 큰골사지3에서 남쪽으로 약 65m 정도 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총4단의 석축이 확인됐다. 각 석축에는 계단이 축조되어 있다. 1단 석축은 동쪽이 1m 정도 잔존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게 잔존해 약 3.1m 정도가 남았다. 1단 석축의 전체 길이는 33m다. 2단 석축은 전체 석축 중 가장 잔존상태가 양호했다. 가장 잘 남아있는 서쪽의 석축은 최대 5.2m가 잔존했다. 2단 석축의 중앙에 위치한 계단의 높이는 2.3m이고 길이는 4.2m 정도이며 대형의 장대석을 이용해 축조됐다. 계단 서쪽 석축에는 너비 30㎝ 크기의 수구를 축조했다. 2단 석축의 전체 길이는 약 42m였다.
3단 석축은 2단 석축에서 약 6m 정도 떨어져 있으며, 2단 석축과 장축방향을 같이 하도록 축조했다. 중앙에 계단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3단 석축 동쪽에는 석벽을 쌓아 축조한 건물지가 확인됐다. 건물지 북동쪽 안쪽에는 직경 3m의 석축우물이 축조되어 있다. 건물지 동쪽 벽석 중앙에는 너비 30㎝ 정도의 창을 축조하고 있다. 건물지에서 북동쪽으로 4단 석축이 축조되어 있다. 대부분 붕괴되고 최하단의 장대석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석축 상부에는 상당히 넓은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북동쪽에 위치한 바위에 그을음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취사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하단의 석축 길이는 약 18m다. 수습유물은 기와편, 청자편, 백자편, 도기편, 옹기편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추정건물지는 큰골사지3과 4로 오르는 등산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큰골사지2에서 정남쪽으로 130m정도 떨어져 있으며, 큰골사지3에서는 남동쪽으로 70m정도 떨어져 있다. 2동의 추정 건물지가 확인됐고, 건물지 간의 거리는 13m정도였다. 추정 건물지1은 최하단만 잔존하는 상황으로 길이 21m, 너비 5m 정도다. 건물지2는 길이 15m, 너비 13m 정도 잔존하고 있다. 2동 모두 최하단의 장대석만 남아있는 상황으로 주변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아 후대에 축조되었던 건물지의 일부만이 잔존하는 것으로 판단됐다.
용암사지 석교 및 절터는 용암사지로 오르는 등산로 상에 위치해있다. 계곡에 큰 바위가 많아 이를 건너기 위한 용도로 길 판상할석을 눕혀 조성한 것으로 판단됐다. 석교의 정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마련되어 있다. 주변에 기와편, 자기편 등이 산재해 있어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동쪽 약 10m 정도 떨어져 중엽 2기가 확인됐다. 용암사지로 오르는 입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됐다.
출처 : 영암군민신문(이춘성 기자)
▶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靈巖月出山龍巖寺址三層石塔)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산26-8번지 용암사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1283호. 높이 4.7m. 용암사는 해발 804m의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었던 절로, 약 400평 정도의 절터에는 현재 많은 주춧돌과 함께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다. 특히 ‘용암사(龍嵒寺)’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기에, 이곳이『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임을 알 수 있다. 석탑은 절터의 중심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고, 중심 지역에서 약 50m 떨어진 입구에는 ‘죽암당(竹岩堂)’이라고 새겨진 석종형 부도를 비롯하여 또 다른 부도 1기가 있으며, 북서쪽에는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이 자리잡고 있다.
석탑은 거대한 암반을 바닥돌로 삼아 서 있는데, 단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형 석탑의 모습이다. 암반 위에 평평하게 탑구(塔區)를 조성하였고, 그 위에 8장의 돌을 놓아 2단의 높직한 굄대를 구성하고서 받침돌의 면석을 받게 하였다. 받침돌의 면석 역시 8장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면석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부분에는 1개의 가운데 기둥이 가지런히 조각되어 있다. 4장의 돌로 조립된 받침돌의 덮개돌은 널찍한 편으로,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돌로 만든 윗면의 높직한 2단 굄대는 육중한 탑신부(塔身部)와 잘 어울린다.
1층 몸돌은 윗부분에 아래부분보다 작은 돌 하나를 더 올린 모습이지만, 2~3층의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히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1층과 2층은 2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3층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지붕돌의 받침은 1층이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이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수가 줄어드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붕돌 윗면의 낙수면은 평박(平薄)한 편인데,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반전과 잘 어울려 둔중한 느낌은 없어 보인다. 다만 석탑에서는 흔하게 보이지 않는 두툼한 귀마루가 조각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 굄은 지붕돌 윗면에 1단씩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남아 있고, 그 중심에는 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석탑은 암반을 이용하여 견고한 바닥과 평평한 탑구를 만들고,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는 등 여러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오래 전에 쓰러져 각 부재가 곳곳에 흩어졌던 것을 1996년 1월 4일∼4월 3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복원 공사 때 암반과 받침돌 사이에서 금동보살좌상 1구, 백자 사리호 1점, 청자 대접 1점, 사리 32과, 철 조각 11점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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