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파근사 I

도솔산인 2023. 3. 2. 17:21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파근사 I

 

 

 일 시 : 2023 03 03(금)

 코 스 : 내기마을회관-승탑재-파근사지-물방아골-비폭포

▣ 인 원 : 산친들

 날 씨 : 맑음

 

 

  파근사(波根寺) 창건과 폐사에 관련한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파근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남원도호부 불우조에 지리산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등장한다. 1597년 9월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이 지리산 파근사(波根寺)에 피난하고 있다가 의병을 일으킨다. 1655년 담허재(澹虛齋) 김지백(金之白, 1623~1671) 일행은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에서 만나 대흥사(파근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감로사(현 천은사)와 화엄사 등을 거쳐 쌍계사와 불일암 일원을 유람한다. 김지백(金之白)은 1611년 유몽인과 지리산을 유람한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 1571~1645)의 조카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 : 전라북도 남원시 남원향토박물관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13세인 선조 15(1585)부터 인조 15(1637)까지 57년간의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1984920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김지백(金之白, 1623~1671) : 자는 자성(子成), 호는 담허재(澹虛齋),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이며,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과 교유하였다. 1658(효종 9)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술로 담허재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656년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파근사(波根寺) 지리산에 있다. 계곡물이 여기(파근사)에서 근원이 되는 까닭으로 이름을 하였다. 또한 대흥사라고 칭한다. [波根寺 在智異山 以溪水根源於此 故名之 又稱大興寺]"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물터 아래 용천(湧泉)이 파근사의 이름이 된 듯하다. 실제로 용천수(湧泉水)의 수량이 많아 계곡물처럼 흐른다. 1678년 『승정원 일기』에 파근사의 목조 불상에서 땀이 나는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도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용성지(龍城誌)』, 『남원읍지(南原邑誌)』에도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문헌인 『범우고(梵宇攷)』에는 파근사의 과거 이름이 대흥사(大興寺)라고 밝히고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誌)』, 『호남읍지(湖南邑誌)』에도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폐사 시기는 1871년 이후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지리지. 대동지지(大東地誌) : 1860년~1866년 사이 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편찬한 전국지리지. 호남읍지(湖南邑誌) : 1871년 편찬한 8도 도지 호남읍지

 

 

 

우물
파근(波根)의 이름이 된 용천(湧泉)

 

  1656년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에 "파근사 지리산에 있다. 계곡물이 여기에서 근원이 되는 까닭으로 이름을 하였다. 또한 대흥사라고 칭한다.[波根寺 在智異山 以溪水根源於此 故名之 又稱大興寺]"

 

 

비폭포(飛瀑布)

 

 

 

▶ 파근사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

 

 

 1597년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9월 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그대가 이토록 꾀하니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


  108일,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바로 을미년(1655) 108일 무오일이다. 자원(子遠) 이문재(李文載)와 한여근(韓汝謹) 또한 기약이나 한 듯 함께 왔고, 중도까지 전송한 자로 또 노운경(盧雲卿)이 있다. 이 네 벗은 모두 나와 같은 해에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서국익에게 서대숙(徐大叔)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또한 서국익과 함께 왔으니, 우리의 행차가 더욱 외롭지 않았다. 이에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大興寺, 파근사)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수락폭포)를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 천은사)를 지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佛堂)을 구경하였다. 다시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쌍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백번이나 굽이돌아 시내 건너 골짜기를 찾아 저물녘에 연곡사(燕谷寺)에 이르러 묵었다.

 

  注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 담허재집(澹虛齋集)5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백(金之白, 1623~1671)1655(효종 6) 108일부터 1011일까지 나흘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유람록 말미에 의하면, 나흘간의 유람에서 일행들이 지은 100여 편의 한시를 1권의 시집으로 만들면서 기문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유람 일정은 전라북도 남원을 출발하여 남원 파근사(波根寺)→구례 화엄사(華嚴寺)연곡사(燕谷寺)화개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동칠불암(七佛庵)에 들러 옥부대(玉釜臺)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나며, 이듬해에 다시 산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동행자는 서국익(徐國益), 이자원(李子遠), 한여근(韓汝謹), 노운경(盧雲卿), 서대숙(徐大叔) 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문재(李文載, 1615~1689) : 자 자원(子遠) 호 석동(石洞) 본관 전주(全州) 김집(金集)의 문인. 서문상(徐文尙, 1630~?)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국익(國益), 호는 송파(松坡), 나산(羅山),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의 아들이다. 1655(효종6)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68(현종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정언, 문학을 지냈다. 이듬해 사서, 부수찬, 1677(숙종3) 병조참의에 올랐다. 한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풍문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아들 서종태(徐宗泰)의 탄원으로 신원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 남원 실상사 향로전

  822승려 한 명이 와서 인사를 하였는데 그는 영휴 대사인데 파근사(波根寺)*[주천면 고기리 구룡폭포위 계곡상부에 있었던 대찰. 정유재란시 조경남 의병장의 활동본거지]에서 이곳에 온지 10여일이 되었다고 했다. 대개 불상의 후정을 만들어야하므로 증명인으로 초청해 왔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와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서로 기쁘게 대하였는데 나이는 갑자생이며 귀가 어두워 말을 듣지 못하였다.

 


1767년 홍씨의 두류록

 

  다음날(29일) 여원치(女院峙)를 넘어 곧장 범곡(範谷)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는 파근사(波根寺)웅암(雄菴) 및 열 두 용추(龍湫)의 빼어난 경관이 있는데, 마침 하늘에서 비가 올 것 같았고 발도 부르터서 가보지 못하였으니, 또한 한가지 아쉬운 점이었다. 두보(杜甫)가 동쪽 바다 끝까지 다 가보지 못하였다고 한스러워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노래한 것이리라. 범곡에서 다시 월곡(月谷)으로 향했다. 주인이 장난스레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읊었다.

 

 

■ 1776년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이 지리산 파근사(波根寺)에 피난하고 있다가 강개한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키니 이에 천인 박언량(朴彦良등이 그를 따라서 낙오된 적군을 많이 죽여 피난하는 사람을 구제하였다. 9 22일에 적의 머리 36급을 베었고, 12 7일에 적 1 23급을 산음(山陰)에서 베었는데그가 거느렸던 군사는 손상을 입은 자가 없었으며 또한 공을 자랑하여 적의 머리 벤 것을 나라에 바치지도 않았다또 일찍이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지었는데 내용이 자못 소상하였으며 또한 나라 일에 분개하는 마음을 발하는 뜻이 많았다일월록

 

 

■ 1793(정조 17계축) 6 25 일성록

 

 남원(南原)에서 공물로 바치는 종이에 대한 폐단이 있는지의 문제입니다장인(匠人)들에게 지급할 급료에 값을 조금 더 쳐준 뒤에는 별다른 원망이 없었고영문에서 지정(卜定)하는 것에도 그 양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크게 법을 어기는 폐단은 없었습니다다만 이에 따라 이 공물을 맡았던 승려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6개 절 중 4개 절이 모두 비었고천은사(天銀寺) 파근사(波根寺) 두 절에만 약간의 승려들이 있습니다. (호남암행어사 정동간(鄭東榦)이 복명하였다.)

 

 

1793년 도원 스님의 두류산기

  남원의 심원동(深源洞)까지를 통틀어 만수동(萬水洞)이라고 한다. 만수동(萬水洞) 안에는 황령암(黃嶺庵)이 있는데, 이곳은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피한 곳으로 황령(黃嶺)과 나란히 우뚝하여 월령(月嶺)이라 한다. 물은 이곳으로부터 흘러나와 파근사(波根寺)에 이르러서는 골짜기처럼 되어 위아래로 12개의 용추(龍湫)가 만들어졌다.

 


1818년 정석구(丁錫龜) 두류산기

  오른쪽은 산줄기가 솟아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황령치)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서 혈(血)을 이룬 곳이[初落] 파근사(波根寺)이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잔강(潺江)에서 멈춘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 종석대)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천은사(泉隱寺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右上爲萬福臺 東其下者 爲黃嶺之主 西其下者 初落爲波根 南止潺江 自萬福稍下 復起爲妙峰 爲山洞之主 直南稍東 爲鍾峰 爲南嶽祠泉隱華嚴之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