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 터를 찾아서 II(230226)

도솔산인 2023. 2. 27. 17:39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 터를 찾아서 II

 

 

 일 시 : 2023 2 26(일)

 코 스 : 버드재-황령암터-황령-달궁성터-매막봉-달궁

 인 원 :  3

 날 씨 : 맑음(영하 7도)

 

 

  황령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이다.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이라고도 하였다.[臺北有普門庵 一名黃嶺庵]" 1545년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는 마한의 역사를 기록한 사료적 가치는 있지만, 황령의 위치는 혼란을 준다. '반야봉의 좌우에 두 재가 있으니 황령과 정령'이라는 문구이다. 원문을 확인했으나 분명 '반야봉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峯之左右 有二嶺 名黃與鄭也]'라는 내용이다.  황령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이다.  "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다."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① '새목재로 이어지는 능선'과 ② '달궁산성으로 내려오는 능선'으로 좁혀진다. 만복대에서 새목재로 이어지는 능선은 동쪽이고, 달궁산성으로 내려오는 능선은 동북쪽이다.

 

  1차로 달궁산성을 답사하였다. 안타깝게도 지리산길 지도에 나오는 황령암은 황령과 연결하지 못하였다. 김종직이 쉬어간 계석과 청이당처럼, '황령이 없는 황령암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달궁산성에서 정령치 도로 사이 잘록한 고개를 보고, 오른쪽 능선 성터 흔적을 따라 내려왔다. 2차는 새목재 아래 축대와 오른쪽 능선에서 축성의 흔적을 보았다. 처음에는 새목재가 황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만복대에서 새목재로 내려간 능선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3차 답사는 새목재 남쪽 마을터와 만복대골 집터 흔적을 보고 내려왔다. 이날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으나 포위망이 더 좁혀졌다. 이렇게 답사를 할 때마다 시행착오를 겪는다. 생각도 수시로 바뀐다. 달궁 성터 뒤의 잘록한 고개가 황령이면, 황령암에서 황령→정령치→파근사→남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4차 답사는 버드재 마을에서 직접 골짜기를 따라 바로 들어갔다. 지난 번 새목재에서 직접 성터로 가면서 중간까지는 답사하였으니 주변의 풍광이 눈에 익숙하다. 전답과 집터, 샘터와 확도 보이는데 하이패스하고....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암자터 두 곳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다시 전답 터와 거대한 석축이 나타난다. 석축의 길이 약 40여 m, 높이 2.5m 정도 된다. 이곳이 황령암터라면 북쪽에 황령이 있어야 한다. 돌포장 흔적을 따라 작은 능선을 넘으면 암자터가 또 있다. 황령암터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황령으로 올라갔다. 현장을 답사하면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라는 퍼즐이 맞춰진다. 정령치 도로와 달궁 산성 사이 잘록한 고개가 황령이 된다.

 

  5차는 남원의 지리산아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달궁마을에 주차를 하고 버드재 마을에서 올라갔다. 퇴계 선생 말씀에 "백 번을 누여야 실이 하얗게 되고, 천 번을 갈아야 거울이 밝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답사는 한 번 할 때 다르고, 열 번 할 때 다르고, 백 번 할 때 다르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평탄한 계곡은 물고기의 뱃속처럼 넓어진다. 이 암자터는 정령치 도로 바로 아래에 있다. 황령암터(추정)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포장된 돌길에 쓰러진 썩은 나무도 치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았다. 일행들과 빽빽한 산죽을 헤치고 황령으로 올라갔다. 산성의 매막봉 능선에서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황령암터로 내려갔다. 만약 이곳이 황령암터라면 황령은 어디일까.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언양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두 번 만났다. 매막봉은 이름이 무색하다. 평탄 작업을 한 듯 넓은 터로 보인다. 답사를 마치고 장항마을에서 외령마을까지 신선둘레길을 걸었다. 1611년 유몽인은 이 길이 아니고 소동폭포에서 만수천(황계)을 따라 올라간 것으로 추정한다. 소동폭포로 이동하여 매동마을에 살았던 율포(栗圃) 박상호(朴相湖)와 연포(蓮浦) 박동한(朴東漢)을 만났다. 소동폭포의 이름은 소동파의 전적벽부 첫머리 '임술지추 칠월기망(壬戌之秋七月旣望)'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이곳은 율포(栗圃) 박상호(朴相湖), 삼은(三隱) 박상래(朴翔來), 연포(蓮浦) 박동한(朴東漢), 춘강(春崗) 김창순(金昌珣) 네 사람이 임술년(1922년) 7월 의은정(疑銀亭)을 지은 후, 술잔을 나누고 시를 읊조리며 노닐던 곳이다. 계곡에 의은대(疑銀臺) 석각이 남아있다. 관선재에 가서 율포(栗圃) 후손의 연락처를 받았다. 율포(栗圃) 석각은 산속에 있다고 한다. 끝.

 

☞  황령암과 황령에 대한 문헌의 기록 : https://lyg4533.tistory.com/16488890

 

※ 주의 :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오류가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 추정 황령암터: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산 155-3 

 

덕동리 산 155-3 주변이 황령암지
돌포장길 I
돌포장길 II
돌포장길 III
돌포장길Ⅳ

 

 

추정 황령: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산 155-3 

 

 

 

▶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황령암터: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768번지

 

 

 

성터에서 언양골 내려가는 길

 

 

 

 매막봉

 

매막봉
매막봉

 

 

 천년송

 

 

 

▶ 신선 둘레길 : 장항리-곰재-참샘-외령마을

 

 

 

▶ 수월대(흑담)

 

 

 

▶ 소동폭포와 의은대: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산 40-2번지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산 40-2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산 40-2
의은대(疑銀臺)

 

   박상호(朴相湖)는 퇴수정의 주인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 1825~1907)의 둘째 아들이다. 박동한(朴東漢, 1875~?)은 박상철(朴相喆, 義府都事 行泰川郡守)의 아들로  박치기(朴致箕)의 장손자이다. 박상호(朴相湖)와 숙질간이다. 소동폭포는 소동파의 「전적벽부」 첫 구절에 나오는 "壬戌之秋 七月旣望"과  석각의 "壬戌 七月"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소동파를 흠모하여 '소동폭포'라고 이름한 듯하다. 석각 시기는 임술년이니 1922년이다. 의은대(疑銀臺) 석각 또한 이 시기에 함께 석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운성지』 속편에 의은정(疑銀亭)의 원운(原韻)과 기문(記文)이 『운성지』 구지(舊誌)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다.(운성지에 없음) 1870년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는 퇴수정을 지었고, 1922년 박상호(朴相湖)와 박동한(朴東漢)은 관선재(觀善齋)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