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 터를 찾아서 I(230221)

도솔산인 2023. 2. 21. 21:04

황령(黃嶺)과 황령암(黃嶺庵) 터를 찾아서 I

 

 

 일 시 : 2023 2 21(화)

 코 스 : 버드재-암자터A-암자터B-암자터-황령암터-황령-암자터C-만복대 동릉-황령암터-암자터-버드재

 인 원 :  2

 날 씨 : 맑음(영하 7도)

 

 

 

  나는 불교에 대한 아무런 지식(知)이 없거니와 암자터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인문학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취미로 답사를 다니는 수준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10여 년 전 '세석산장 앞 영신사지說'이 대세일 때, '영신암과 영신대는 하나다.'라는 의견을 낸 일이 있다. 사고를 친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소년대, 행랑굴, 청이당, 두류암, 상류암, 노장대, 향로봉, 미타봉, 소림선방 등 선답자들과 다른 의견을 내서 미움과 질시(嫉視)를 받았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염려스럽지만, 황령암터도 몇 차례 답사를 하고 다른 의견을 내기로 했다. 지리산에 다니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황령과 황령암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다. 황령은 만복대 동릉 주능선에 있는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이다. 황령 남쪽에 황령암이 있다. 달궁 남쪽 골짜기가 황령골이다.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가 흐른다. 이를 종합하면 황령과 황령암을 떼어놓고 논할 수 없다. 지난주 일요일 새목재를 황령으로 생각하고 새목재 남쪽 마을터를 답사하였지만 절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황령과 황령암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고 오리무중에 빠졌다.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면, 산성터 뒤의 고개가 황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曺교수님이 낭패불감(狼狽不堪)의 내 심정을 어찌 알고 먼저 연락을 주셨다. 오늘 답사는 산성터에서 정령치 도로 사이에 잘록한 고개와 고개의 남쪽 사면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버드재 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면 물탱크 뒤로 길이 숨어있다. 골짜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계곡의 응달은 너덜지대이고 양달은 토질이 좋아 전답과 집터가 계속 이어진다. 지리산길 지도에 나오는 암자터 A를 지나도 골짜기는 완만하다. 암자터 B에서 골짜기로 조금 더 오르면 드디어 황령암터가 나타난다. 퍼즐을 맞춰보니 성터 뒤의 잘록한 고개가 황령이고 그 남쪽에 황령암터가 있다. 끝.

 

※ 주의 :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오류가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황령(산성과 정령치 도로 사이 파란 선)과 황령암터

 

 

▶ 황령암과 황령에 대한 문헌의 기록

 

1.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그 북쪽에 중봉산(中鳳山)은 빈발봉(貧鉢峰)의 북쪽에 솟은 봉우리이고 산등성이 절벽 아래에 적조암(寂照庵)․무주암(無住庵)등의 암자가 있었다.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이 있었고 봉우리 서쪽에는 방장산이 있었다. 산봉우리에 만복대(萬福臺)가 있었으며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북쪽에는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黃嶺庵)이라고도 하였다. 이 반야봉 남쪽에는 고모당(姑母堂_노고단)이, 고모당의 남쪽에는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우번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이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그 동쪽이 바로 쌍계동(雙溪洞)이었다. 빈발봉이 봉우리의 동쪽에 있었고 천왕봉(天王峰)도 그 동북쪽에 있었다.

 

 

2. 1545년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

 

   산은 혼돈(混沌)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해동 : 우리나라) 안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山也 混沌之骨也 海也 混沌之血也 東海中有一山 名智異山也 山之北麓 有一峯 名般若峯也 峯之左右 有二嶺 名黃與鄭也]

 

注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문제의 이 문구가 오히려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원문을 확인했으나 "반야봉의 좌우에 두 고개(황령과 정령)가 있다."라는 의미이다.

 

  옛날에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즉위한 지 3년(BC 84)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재를 이름하고, 도성을 72년 동안 보호하였다. 그 뒤 신라 진지왕(眞智王) 원년(576)에 운집대사(雲集大師)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그 암자의 규모는 가운데 황금전(黃金殿)이 있고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옥교(白玉橋)가 있어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마치 安養世界(극락세계)와 비슷하였다.

 

  <중략> 이 암자는 신라를 지나 많은 세월을 겪는 동안에 신승(神僧)과 고사(高士)들이 중창하면서 대대로 살았더니 우리 中廟(중종시대)에 이르러 무술(戊戌, 1538)년의 난리에 모두 없어지고 다만 물소리와 산빛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희(性熙) 법사 또한 운수(雲水)의 도인으로서 가정(嘉靖) 23년 갑진(甲辰, 1544)년 봄에 그 터를 지나가다 개연히 절을 다시 일으킬 마음을 갖고 신사(神師) 강연(姜淵)의 무리들과 더불어 절을 세우고 시주를 널리 교화하니 물건은 마치 하늘에서 오는 것 같았고 공사는 귀신을 부리는 것 같아서 을사(乙巳, 1545)년 가을에 낙성을 보았다.

 

 

3. 서산대사가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上完山盧府尹書]


두류산으로 가서 내은적암에서 삼 년을 지냈으며,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삼년을 지냈습니다

 

注 이 기록만 본다면 놓고 본다면 내은적암의 위치도 문제가 있다. 도마 마을 도화골에 은적암터가 있다.

 

 

4. 1598년(戊戌) 조경남의 『난중잡록

 

○ 4월 10일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암(黃嶺庵), 운봉(雲峯)의 대암(臺庵)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5. 1753 용담(龍潭: 1700~1762) 스님의 황령암 중창기

 

(황령암)암자 뒤로는 우뚝 솟아 곧장 구름으로 들어가 만복(萬福)을 굽어 본다. 암자 앞에 우뚝 서 있으며 허공을 가로질러 있는 것은 생각하건대 반야봉이다. 바람을 막고 암자 우측에 우뚝 오묘한 봉우리가 서 있다. 수레 자취를 끊어버리고 암자 좌측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실상동(實相洞)이다. 암자(황령암)는 실상동 안에 있으면서 복, 지혜, 오묘함, 진실의 덕을 가지고 있다. ‘황령(黃嶺)’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법 위에서 중도(中道)의 본체를 잃지 않아서 아니겠는가? 그리고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黃溪水)가 있다.


<중략> 정묘년(丁卯年: 1747)이다. 그 해 3월에 팔인지화(八人之禍)를 당했는데 전각(殿閣)이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타버렸다. <중략> 그 해 1747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1749년에 대전(大殿)을, 1750년에 정루(正樓)를, 1751년에 익실(翼室: 좌우 양옆에 딸린 방)을, 1753년 5월에 단청공사를 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八人之禍 : 화재(八+人=火)

 

 

6. 1765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데 유허지의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휴정(休靜)대사의 황령기에는 휴정(休靜)대사의 황령기에는 한소제(漢昭帝) 3(BC 84-정유년) 마한이 한의 난을 피하여 여기에 도성을 쌓고서 황씨, 정씨 두 장군으로 그 일을 감독케 하고 그 재를 수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황령은 황장군이 지킨 곳이며, 정령은 정장군이 지킨 곳이다.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후 백성들이 달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십여 가구가 되었다. 신해년(1731, 영조 7) 홍수에 의한 산사태로 반야봉이 무너져 내리면서 엄몰(渰沒)되어 한 마을도 남지 않았다. 임금은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達宮 在智異山香爐峯下 廢礎 頹垣 至今尙存 僧休靜 黃嶺記: “漢昭帝三年 馬韓避辰韓之亂 築都於此 以黃 鄭二將 監其事 守其嶺 黃嶺卽黃將所守 鄭嶺乃鄭將所守云 未知何所據也 其後民戶之居於達宮者 數十餘家 辛亥大水沙汰 自般若峯頹下渰沒 一村無餘 自上降香祝以祭]

 

 

7. 1793년 도원 스님의 「두류산기」 

  남원의 심원동(深源洞)까지를 통틀어 만수동(萬水洞)이라고 한다. 만수동(萬水洞) 안에는 황령암(黃嶺庵)이 있는데, 이곳은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피한 곳으로 황령(黃嶺)과 나란히 우뚝하여 월령(月嶺)이라 한다. 물은 이곳으로부터 흘러나와 파근사(波根寺)에 이르러서는 골짜기처럼 되어 위아래로 12개의 용추(龍湫)가 만들어졌다.

 

 

8.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

 

  동남쪽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이 정령(鄭嶺)이다. 고개 위에 둘레가 10여 리나 되는 성이 있는데, 「황령기(黃嶺記)」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에 쫓겨 당궁(達宮)으로 피해 왔는데, 황(黃) 장군에게 황령(黃嶺)을 지키게 하고 정(鄭) 장군에게 정령(鄭嶺)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곳이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혹 그럴듯하지만, 또한 무엇을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오른쪽으로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에서 혈(血)을 이룬 곳이 파근사이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잔강(潺江, 신월리 잔수역)에서 멈춘다.

 

 

9. 1823 김선신의 『두류전지

 

  지리산 산중(황령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에 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처음 창건됐다. 가정 정유년(1537)에 중수했는데 대들보·기둥·서까래 등은 모두 예전 재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깨와 다리에 닳아 기둥의 형체가 요(凹) 자 모양으로 됐다. 사찰로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멀어 병화가 미치지 못한다.

 

 

10. 성해응(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반야봉 북쪽에 혼묵동과 월락동, 그 북쪽에 중봉산(中鳳山), 또 북쪽에 금봉산(金鳳山)이 있다. 반야봉(般若峯)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이 있고 묘봉암 북쪽에 보문암(普門菴)이 있으니, 일명 황령암(黃嶺菴)이다.[般若峯之北 有昏黑月落之洞 其北中鳳山 又其北金鳳山 峯西有方丈山 山頭有萬福臺 臺東有妙峯菴 菴北有普門菴 一名黃嶺菴]

 

 

11. 1752년 편찬된 『용성지』

 

  가. 황령과 정령

 

  지리산 첫 기슭에 있다. 모두 지극히 험준하다. 소(牛)나 말(馬)도 통하지 못하는 곳으로 부(府)의 서쪽 50리 거리(?)에 있다. 옛날 승려 청허당(淸虛堂)이 황령(黃嶺)에 관한 기록에서 일컫기를 '옛날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있었는데 그 즉위(卽位) 3년 마한(馬韓)의 임금이 진한(辰韓)의 난리(亂離)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황(黃)과 정(鄭) 두 장군으로 그곳과 그 일을 지키게 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 사람의 성씨(姓氏)로 재(嶺)의 이름으로 하였으며  그 도성(都城)을 보존한 것이 71년이었다.'라고 하였다. 성(城)이 퇴폐하고 성벽이 헐리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그 이른바 도성(都城)이라 한다면 세상에 전해오는 달궁(達宮)의 터이다. 이 두 재의 안에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남원(南原)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雲峯)에 소속한 땅이다.

 

나. 황령암

 

  지리산 산중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에 처음 창건된 사찰로 가정 정유년(1537)에 중수하였는데 대들보·기둥을 갈았으며 모두 옛날 재목이었다. 사람으로 하면 어깨와 다리가 갸름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기둥을 오목하게 하였다. 길이 지극히 험난하여 멀어 병화가 미치지 못하였다.

 

 

12. 1997년 간행된 『신운성지에 나오는 황령골과 새목재

  ① 황령골 : 달궁 남쪽에 있는 골짜기.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였다고 한다. ② 새목재 : 조항(鳥項). 보듸재(柳峙) 서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새의 목처럼 되어 있다. ③ 북당골 : 옛날에 불당이 있어서 불당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북당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13. 2020년 간행된 『남원의 산하』

                                                                                                                                           

  <문화유적과 명소> [황령암 터,정령, 황령]


  정령치와 황령, 황령암터에 대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1522년, 청허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해동: 우리나라)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과 정령이라 한다. …(중략)… 그 뒤 신라진성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서산대사의 「지리산 황령암기」의 서두로서, 황령과 정령의 실체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달궁(마한 도성)의 역사가 탄생하는 기록이다. "황령 남쪽에 황령암을 세웠다.”는 기록을 유추해 보면 황령암 북쪽에 위치한 산줄기는 황령암 터가 있는 매막봉 능선에 황령이 있어야 한다. 용성지는 황령과 정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지리산 첫 기슭에 있다. 모두 지극히 험준하다. 소나 말도 통하지 못한 곳으로 남원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옛날승려 청허당의 황령에 대한 기록으로서 일컫기를 옛날 한나라 소제가 있었는데 ……(중략)… 성이 퇴폐되고 성이 헐리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그 이른바 도성이라 한다면 세상에 전해오는 달궁 터이다. 이 두 재의 안에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는 옛날 남원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소속된 땅이다."

                                                                                                                                                                                                 

                        

                                           

▶ 황령암지(黃嶺庵址)

 

계단과 확
계단
황령암터
돌포장I
돌포장II
돌포장III
돌포장IIII
와편

 

 

▶ 황령(黃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