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칼럼니스트와 지리산 남유기행 I
▣ 일 시 : 2022년 07월 22일(금)~23일(토)
▣ 코 스 : 구룡폭포-와룡정-기담-소년암-목압서사-고불사-만월암
▣ 인 원 : 2명(조용헌님)
▣ 날 씨 : 맑음
1. 구룡폭포
이 계곡은 지리산 국립공원 북부지소가 있는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펼쳐지는 심산유곡이다.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이 계곡은 길이가 약 3㎞이다. 정상에 오르면 구곡경의 구룡폭포가 있다. 남원 8경 중 제1경인 구룡폭포 아래에는 용소라 불리는 소가 형성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지리산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구룡계곡의 스카이웨이는 한층 편리하게 이곳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해준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정령치간 도로는 뱀사골(반선)과 노고단으로 이어져 지리산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구룡계곡, 일명 용호구곡을 구간별로 소개하면, 제1곡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미치고 있는 송력동폭포를 1곡이라 하며, 이곳을 흔히 약수터로 불린다.
제2곡 매표소를 조금 오르면 높이 5m의 암벽에 이삼만이 썼다는 용호석문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이 2곡으로 불영추라 한다.
제3곡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 있는 황학산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암이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4곡인데, 학들이 이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해서 학서암이라 한다.
제4곡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유난히도 흰 바위가 물에 닳고 깎여 반들거리고, 구시처럼 바위가 물살에 패여 있다. 또 거대한 바위가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건너편 작은 바위는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같다 하여 서암이라고 하며, 일명 구시소로 더 알려져 있다.
제5곡 구시소에서 1km 지점에 45도 각도로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린곳에 깊은 못이 5곡인 유선대이다. 유선대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금이 많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신선들이 속세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병풍을 치고 놀았다 하여 은선병이라고도 한다.
제6곡 유선대로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과 그밖의 여러갈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계곡 물이 여기에서 모두 합류한다.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뾰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듯하여 그 봉우리 이름을 지주대라 하고, 이곳을 6곡이라 한다.
제7곡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꺾이면서 북쪽으로 1km지점에 거의 90도 각도로 깎아지른듯한 문암이라는 암석층이 있는데, 이에 속한 산이 반월봉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층층암벽을 타고 포말려 비폭동이라 하며 이를 7곡이라 한다.
제8곡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해서 석문추라 하는데,바로 이곳이 8곡이다. 경천벽이라고도 부른다.
제9곡 경천벽에서 500m 상류 골짜기 양켠의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에 각각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꿈틀 거린 듯하므로 교룡담이라 하고, 이곳이 바로 9곡이다. 바로 구룡계곡의 백미,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지닌 구룡폭포이다.
출처 : 다음 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2.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섬진강변에 용호정이 있다. 용두리라는 지명과 용호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주목하였다. 1611년 4월 7일 아침 유몽인은 일행인 승주(순천) 수령 유영순(柳永詢)과 재간당 김화(金澕)와 쌍계사에서 작별을 한다. 두사람을 전송한 뒤 생질 신상연(申尙淵), 신제(申濟)와 함께 불일암을 유람한 후 쌍계사를 출발한다. 화개를 지나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어간다. 여기에서 와룡정(臥龍亭)의 위치를 토지면 용두리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으로 추정한다. 섬진강 물속의 바위가 '물에 잠긴 용(潛龍)의 형상'으로 보였다.
卧龍亭[와룡정]-유몽인(柳夢寅)
巖居寥落兩三家 : 바위는 두어 집뿐인 쓸쓸한 곳에 위치하고
臺下江聲繚白沙 : 높은 대 밑 강물소리 백사장을 둘러 흐르네.
地暖南溟饒翠篠 : 남쪽 지방 따뜻하여 푸른 조릿대가 무성하고
山高方丈足靑霞 : 높고 높은 방장산엔 푸른 노을이 넉넉하네.
舟人捩柁叉銀鱖 : 뱃사공은 키를 틀어 은빛 쏘가리를 낚아채고
村女持鑱擷玉椏 : 시골 여인은 칼을 들고 옥빛 나물을 뜯는구나.
堪笑龍城五斗米 : 녹봉 위해 남원에서 벼슬하는 신세 우습구나
堆床朱墨鬢成華 : 책상에 위 공문에 귀밑머리 허옇게 세었다네.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강정화)
注 용성(龍城) :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오두미(五斗米) : 닷 말의 쌀로, 고을 수령의 녹봉을 말한다. 도잠(陶潛)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현(縣)을 순시하자, 도잠이 탄식하며 “내 어찌 오두미의 녹봉을 위하여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꺾을 수 있겠는가.” 하고, 현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떠나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4월 7일 병자일 순지가 작별을 고하며,“나는 몇 년 전에 청학동을 유람하여 이제 다시 가볼 필요가 없으니, 어찌 곧장 돌아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김화도,“저도 전에 청학동을 실컷 구경하였습니다. 농사철이 되어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갈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전송한 뒤 돌아와 혼자 신상연(申尙淵)의 무리와 함께 동쪽 고개를 넘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중략> (불일암을 유람하고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를 지나),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이 날 남원부의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 4월 8일 정축일.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관아로 돌아왔다.
☞ 최온(崔蘊, 1583~1659) :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다. 광해군 1년(160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임금의 패륜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류산 아래에 지금의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 섬진강 기슭에서 초막 용두정(龍頭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그는 남원 출신으로 1589년에 증광시(增廣試)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한림(翰林) 검열(檢閱)이 되었고 임란에 권율 장군의 계청으로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 1554~1604)의 아들이며 성만 최연(崔衍 1576~1651)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 사업(司業)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653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배향되었다.
3.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사자곡과 기담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과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에 기담(妓潭)이 등장한다. 유몽인 길 전구간을 부분 답사하면서 마지막 남은 지명이 기담(妓潭)과 사정(獅頂)이다. 기담과 사정은 의신사(義神寺)가 있는 의신마을과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신흥마을 사이에 있다.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를 읽어보면 포위망이 좁혀진다. (세이암을 지나)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오두인은 현재 신흥교 서산대사길 초입의 벼랑길 구간을 사자곡(獅子谷)이라고 하고 있다. 오두인의 여정은 세이암을 출발하여 기담에서 쉬고 대성교에서 능인암을 거쳐 은정대로 올라갔으니, 기담과 사정(사자곡)이 신흥교에서 대성교 사이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유람록에 등장하는 지명 중 장구목(缶項), 노루목(獐項嶺), 사자목(獅子項), 아홉 모롱이(九隴) 등은 지형의 형태에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사자목(獅子項)은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은 벼랑 위에 좁고 험한 길이다. 사정(獅頂)은 사자곡(獅子谷) 벼랑길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 지리산 서산대사길(지리산 옛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거쳐 의신계곡을 지나 지리산 주능선의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면으로 넘어가던 길 중에서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 구간 4.2km를 말한다. 신흥사가 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던 의신마을을 연결한 옛길이다. 서산대사가 16살 때 화개동을 유람하다 출가해 두 차례에 걸쳐 18년을 머물며 수행하는 동안 다니던 옛길로 서산대사길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옛길은 보부상들이 하동, 광양 등 남해안의 해산물을 함양 등 내륙지방으로 운송하던 길이다. 봇짐, 등짐장수들이 광양 등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을 이고 지고 벽소령 넘어 함양 쪽으로 팔러 다니던 길이자,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구워낸 참숯을 화개장에 팔러 넘나들던 옛길이다. [펌] 서산대사 길은 하동군이 예산을 지원하고 공단에서 시공을 발주하였다. 2012년 착공을 하였지만 주민들의 민원이 많아 2013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여기가 사자곡(獅子谷)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도에서 보면 더욱 확연하다. 의신 마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사지 고개', '사징이 고개', '사지넘이 고개'라고 부른다. 버스가 없던 시절 의신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화개장에 다녔다고 한다. 의신과 대성마을 아이들이 왕성초등학교를 다니는 등굣길이기도 하다. 왕성초등학교는 범왕리와 대성리에 한 글자씩 따서 학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고개 이름의 유래를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 사지(死地) 고개로 알고 있었다. 유몽인은 청류가 흐르는 기담으로 내려서면서 이 고개를 바라보고 의신사 승려의 설명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사정(獅頂)은 본래 '사자넘이 고개'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지넘이 고개'로 음이 전성(轉聲,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사투리에서 많이 나타난다. 후설(後舌) 모음(ㅏ)이 발음하기가 불편하여 전설(前舌) 모음(ㅣ)으로 변하는 음운 현상을 '전설모음화'라고 한다.
4. 1611년 유몽인과 1651년 오두인의 유람록에 나오는 기담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바위를 쓸고 앉아서 데리고 온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다. 함께 놀러온 여러 사람도 뒤이어서 모두 당도하였다. 서로 한 차례 씩 심호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곳을 정류석(停留石)으로 소개한 기록을 보았는데, 유람객들의 쉼터라는 의미는 맞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설명을 유보한다.
▶ 기담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의 석각
기담(妓潭)은 글자 그대로 기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주연(酒筵)을 펼칠 수 있는 넓은 반석과 담(潭)이 갖춰진 곳이다. 소인 묵객들이 쉬어간 곳이니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이 초서로 쓴 7언절구 필획과 작자 미상의 석각이 있다. 초서로 쓴 칠언절구 필획 옆에는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사람의 본성은 마음의 이치요. 마음은 사람의 본성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문구와 '秀堂 金敎潤, 雲樵 高炳斗, 金彰坤'의 인명 석각이 있다. 인명 석각은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과 함께 유람을 왔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필자 석각이 있는 넓은 암반과 소(沼)를 기담(妓潭)으로 보고있다.
여기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소나무가 있는 붉은 절벽 아래 바위 암반 위에 초서로 쓴 두류만첩(頭流萬畳) 석각이 있다. 맨 마지막 글자가 마모가 되어 판독이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두류만묵(頭流萬墨)으로 읽고 있다. 혹시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최문창찬(崔文昌贊, 4言 12聯)의 9聯에서 '倻山千丈 : 천 길 높은 가야산에 들어가고/頭流萬疊 : 만 겹 깊숙한 두류산에 의탁했네.'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은 아닌지. 지리산을 유람한 유호인의 뇌계집(㵢谿集) 七言律詩 ‘등구사탄이당(登龜寺坦夷堂)’에 '好在頭流萬疊山(좋은 경치 두류만첩산에 있어)'라는 시구가 있다. 두류만묵(頭流萬墨)이 맞는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화개면지에 “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라는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注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 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_한국학 중앙연구원
一經一緯有誰知 : 날줄이 하나이면 씨줄도 하나임을 누가 있어 알겠는가
雖由縱橫亦不知 :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네.
疑惑人人莫深究 :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는 사람들아 깊이 연구하지 마소
相從織者自然知 : 베 짜는 이와 친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네.
東樵又題 동초가 또 짓다.
출처 : 지리99
▶ 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
頭流萬疊(두류만첩)은 석각이 마모되어 마지막 글자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頭流萬墨(두류만묵)은 어휘가 생경스럽다. 화개면지의 설명(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두류산을 찾아오는 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이라는 의미인가. 개인적인 생각은 頭流萬疊(두류만첩)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과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시문에 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의 시어가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기담(妓潭)에서 영신봉이 보인다.(관련 시는 붙임 자료에 첨부)
▶ 붙임 참고 자료(유람록과 관련 시)
가.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 4월 6일 을해일. 드디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갔다.[遂下紅流洞. 竝溪而行.]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맑은 시냇가로 가서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의 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들어 돋움 발로 구경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문고, 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홍류(紅流)란 사영운(謝靈運)의 시 ‘돌층계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磴射紅泉〕’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홍천(紅泉)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지금 내가 기담(妓潭) 가로 옮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경(眞境)이 허물을 뒤집어씀이 심하구나.이에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다. 나와 순지는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으나, 두 승려가 말하기를,“합하를 모시고 내려가 시냇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속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집니다.”라고 하여서, 시를 소매 속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지팡이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이곳을 떠나 내려가다가 한 줄기 시냇물과 한 맑은 연못과 한 무더기 봉우리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注 영산회상(靈山會上) : 불교의 음악인 ‘영산회상곡’의 준말.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의 내용을 노래한 곡으로 조선 세종 때 지은 것이다. 보허사 : 「보허자」의 다른 이름. 조선(朝鮮) 영조(英祖) 이후(以後)부터 쓰였는 데, 순조(純祖) 때 이 이름의 거문고 악보(樂譜)가 전(傳)해져 「관악보허자」에 상대(相對)하여 「현악보허자」라고도 함.
나.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頭流山記)
○ 11월 4일, 그 해가 무오년(1618년)이라면 지금부터 30여년 전이다. 지난날의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이 여우와 토끼가 노는 터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30년 동안의 하나의 큰 변(變)이다.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구경하는 동안에 서러운 감회가 계속 일어났다. 절 앞의 계석은 산중에 으뜸인데 각은 '능파각'라고 하고 대는 '세이대'라고 한다.(寺前溪石. 甲於山中. 閣曰凌波. 臺曰洗耳)[수정] 계단 좌측에 동불상 하나가 가시덤불 사이에 서 있으며, 그 좌측에도 역시 이런 동불상 하나가 있다. 옛적에 절의 좌우에 나란히 세워 둔 것이다.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바위를 쓸고 앉아서 데리고 온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다. 함께 놀러온 여러 사람도 뒤이어서 모두 당도하였다. 서로 한 차례 씩 심호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다. 성여신의 崔文昌贊과 유호인의 登龜寺坦夷堂
登龜寺坦夷堂(등구사 탄이당)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好在頭流萬疊山 : 좋은 경치 만겹 두류산에 있기에
暫偸休暇此登攀 : 잠시 틈을 내어 여기에 올랐노라.
金堂玉室尋前約 : 금당과 옥실 옛 언약대로 찾으니
碧嶺丹崖摠舊顏 : 푸른 고개와 단애가 옛 안면일세.
歲聿蒼茫鴻北去 : 해가 저물니 기러기 북으로 날고
黃花搖落客南還 : 황국 질때 객이 남으로 돌아오네.
鑾坡遠與雲林隔 :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에서 떨어지니
兩地歸來鬢已斑 : 두 곳에서 돌아오니 머리가 이미 반백이네.
출처 : 㵢谿集卷之六 / 七言律詩
金堂 玉室 : 부처를 모신 법당, 鑾坡(난파)→예문관(藝文館). 雲林(운림) : 평안북도 운산군 상원리의 동쪽 향산군과의 경계에 있는 마을.
이 시는 유호인의 뇌계집(㵢谿集) 권6에 登龜寺坦夷堂偶得三律錄似主人(등구사탄이당우득삼율녹사주인)이라는 제목의 3수중 첫번째 시이다.
崔文昌贊(최문창찬)
성여신(成汝信, 1546~1632)
風儀秀麗 : 풍모와 위의가 수려하며
精敏好學 : 정밀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네.
仙風超塵 : 신선의 풍치는 풍진을 초탈하고
道骨脫俗 : 도인의 풍골은 세속을 벗어났네.
十二入唐 :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尋師問業 : 스승을 찾아 학업을 물었네.
十八登第 : 열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歷授華職 : 화려한 관직에 두루 제수되었네.
草檄高幕 : 고변의 군막에서 격문을 지으니
老賊裭魄 : 늙은 도적은 넋이 달아났다네.
文章耀世 : 문장은 세상에 빛나고
名振中國 : 이름은 중원에 떨쳤네.
奉詔東還 : 조서 받들고 신라로 돌아오니
年二十八 : 당시 나이 이십 팔세였네.
遭時昏濁 : 시대를 만난 것이 혼탁하여서
無處寄跡 : 자취를 맡길 거처가 없었네.
倻山千丈 : 천 길 높은 가야산에 들어가고
頭流萬疊 : 만 겹 깊숙한 두류산에 의탁했네.
蟬蛻塵紛 : 어지러운 속세에서 허물을 벗고
嘯詠雲壑 : 구름 낀 골짜기에서 시를 읊었네.
題詩石古 : 시를 새긴 바위는 오래되었고
四字門矗 : 넉 자 새긴 석문은 우뚝하구나.
遺風仙跡 : 남긴 풍도와 신선의 자취
千載如昨 : 천 년이 지나도 어제 일 같구나.
출처 : 부사집 제4권 東方諸賢贊 1632년(壬申) 二十首
5.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여공대
홍류교(紅流橋)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 여공대(呂公臺)에 이르러 앉았다. 깊은 못 가에 나가 구경을 하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가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을 헹구기도 하였다.
유몽인의 두류록(2)
呂公臺(여공대) - 유몽인(1559~1623)
樹色溪聲一石㙜 : 신록의 나무숲에 물소리 들리는 바위라
靑山日仄不知廻 : 청산에 해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모르네.
陶然忽覺吾非我 : 활홀함에 문득 내가 아님을 깨달았으니
無慮何須更死灰 : 생각이 없다고 어찌 고목사회처럼 하리.
注 呂公臺(여공대) : 신흥교에서 쌍계사로 내려가는 시내에 있는 바위를 가리킨다.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여공(呂公, 姜太公)이 낚시하던 바위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고목사회(枯木死灰) : 불가에서 쓰는 말로 말라죽은 나무나 타고 남은 재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
출처 : 선인들의 두류산 기행시(최석기 외)
呂公臺(여공대) - 유몽인(1559~1623)
樹色溪聲一石臺 : 석대에서 숲 바라보고 계곡 물소리 듣느라
靑山日仄不知廻 : 청산에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줄 모르노라
陶然忽覺吾非我 : 흥에 겨워 문득 내가 내가 아님을 알았으니
無慮何須更死灰 : 굳이 식은 재처럼 사념 없을 필요 있으리
注 식은 재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형체를 진실로 말라 죽은 나무처럼 할 수 있으며, 마음을 진실로 식은 재처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마음이 외물에 전혀 동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출처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최예심 (공역) | 2018
6. 조해훈 선생의 목압서사
7. 고불사
8. 만월암
'♣ 六友堂記 > 산행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적사터와 미타봉 소림선방 힐링 산행(220729~31) (0) | 2022.07.31 |
---|---|
조용헌 칼럼니스트와 지리산 남유기행 II (0) | 2022.07.28 |
남두육성이 조림한 삼정산 능선을 찾아서 (0) | 2022.07.18 |
결자해지(結者解之) 아홉모롱이길을 찾아서 (0) | 2022.07.11 |
와불산 미타봉 소림선방 가는 길 (0) | 2022.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