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자해지(結者解之) 아홉모롱이길을 찾아서
▣ 일 시 : 2022년 07월 10일(일)
▣ 코 스 : 세진대-신농산삼약초원-송대마을-은병암-미타봉샘-미타봉 소림선방-사립재골 습지-방장문-강계형 장구목-송대마을
▣ 인 원 : 3명
▣ 날 씨 : 맑고 흐림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산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산에 대한 취향도 가지각색이다. 산을 바라보는 시각도, 지명에 대한 해석도 제멋대로이다. 최근 들어서는 산행인구도 급감하여 지리 동부에 들면 만나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이 없으니 옛길은 자연적으로 묻히고 사라진다. 맞는 말이다. 선인들의 유람록길 복원도 요원하다. 시간과 비용 투자에 비해 가성비도 적다. 관심이 있는 사람도, 나서는 사람도 없다. 남들이 발굴한 자료를 보고 후답하는 것이 가장 실속이 있다. 점필재의 구롱 길에 시그널을 부착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케른을 쌓기 시작했다. 후답하는 분들이 길을 놓치는 일이 빈번하여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박 배낭을 메고 허리를 숙이고 쌓았다. 일단은 내가 붙인 시그널을 결자해지(結者解之)할 생각이다. 나는 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의문이 생기면 납득이 갈 때까지, 산류천석(山溜穿石 :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커다란 바위를 뚫는다는 말)의 심정으로 답사를 한다. 다른 말로 천착(穿鑿)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이다. 그냥 취미 수준으로 마구잡이에 불과하다.
30년 전 승용차가 없던 시절 방학을 이용하여 지리산 종주를 하였다. 1년에 기껏해야 10회 미만이었고,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구례로 내려갔다. 방학이 없었다면 박 산행도 못했을 것이다. 2008년 경 설악산 민간 대피소가 없어지고 설악은 발길을 아예 끊었다. 치밭목으로 옮겼다. 당일 산행에 대한 체력적인 부담이 박 산행을 하게 된 이유이다. 이제는 장거리 운전도 장거리 산행도 부담이다. 산에 드는 이유는 아직도 솔직히 모르겠다. 산행에 대한 중독인 개념이 없는 산수벽(山水癖)인 것 같다. 유람록 복원은 먼저 자신이 납득해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다. 타인을 설득할 수 없는 소설은 오래가지 못한다. 수불여수(數不如數)가 아닌가. 사람의 숫자가 많아도 한 사람의 깊은 헤아림만 못하다는 말이다. 구롱 길(九隴, 아홉 모랭이 길)을 이해하는데만 십수 년이 걸렸다. 2020년 3월 28일 구롱 길을 연결한 후에도 많은 분들이 도왔다. 지리산 마니아들과 후답을 하며 의견을 나누고 자료를 공유하였다.
유람록 답사는 발견의 희열이다. 오랜 몰입을 통해 발견의 즐거움을 느낀다. 시행착오가 많을수록 환희의 강도도 높다. 청이당 터 석축을 처음 찾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2017년 초파일 날 새봉에서 1박을 하고, 다음 숙영지가 영랑대였기에 등산화를 벗고 진주독바위에서 마냥 시간을 보냈다. 그날따라 지리 동부에 산객들이 많았다. 청이당터에서 그분들이 모두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날 마침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에서 개다래덩굴 사이로 청이당터의 석축이 보였다. 당터가 무너진 자리에 한 폭의 그림처럼 당집이 그려졌다. 유람록 복원의 한 가닥 실마리를 찾은 날이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행랑굴도 눈에 들어왔다. 관련 유람록 지명을 도표로 그리고 퍼즐을 맞췄다. 1618봉을 두류봉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내가 보기에는 창지개명이다. 말봉은 이유 없이 사라졌다. 노장대가 함양독바위가 되고, 진주독바위가 산청독바위로 둔갑했다. 1618봉 안부를 영랑재라고들 한다. 떼로 몰려다니며 소설을 써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최근 법계사 문창대에 다녀왔다. 아직도 문창대에 대한 결론은 얻지 못한 것 같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와 장편고시 유두류산시(遊流頭山詩) 86句에서 해당 부분의 기록을 보았다. 기록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해석이 어찌 다른지. 세존봉도 『진양지(晉陽誌)』의 기록과는 다르다. 사방에서 인문학을 운운하면서 왜 사람들은 말이 없을까. 지리산에 그렇게도 사람이 없는가. '영내(楹內)'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는 '현관 안'이라는 뜻이다. '영내(楹內)한다.'라는 말은 '자기 자식이나 자기편을 무조건 감싼다.'라는 의미이다. 이 어휘는 어머니께서 자주 사용하셨는데, 평생 내 편을 들어준 일이 없다. 영내(楹內)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한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지리산의 지명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맹목적인 추종을 하고, 대놓고 영내(楹內)를 하니 다른 의견을 낼 사람이 없다. 집단적인 묵살(默殺)은 한편의 인민재판이다. 소수의 의견을 다수가 짓밟는데 어떤 발전이 있을까. 지리산 인문학은 죽었다. 끝.
▶ 은병암(隱屛岩)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岩)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년(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은병암의 강시영이라는 인물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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