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마적사터와 미타봉 소림선방 힐링 산행(220729~31)

도솔산인 2022. 7. 31. 14:51

마적사터와 미타봉 소림선방 힐링 산행(220729~31)

 

 

▣ 일 시 : 2022년 07월 29일(금)~31일(일)

▣ 코 스 : 세진대-천진전-마적사터터-송대마을-미타봉샘-미타봉-무명암자터-송대마을-단옥재

▣ 인 원 : 3명, 토요일 + 1명

▣ 날 씨 : 흐리고 비

 

 

 

  지리산길 지도에 대종교 시설인 천진전 마적사지로 표기하고 있다. 선답자들이 천진전에 있는 석불 대좌 하대석을 보고 판단한 듯하다. 천진전은 전답 자리로 물이 표출되어 지표수가 흐른다. 대종교에서 복토를 하였지만 용출되는 수맥을 잡지 못했다. 또한 천진전에서 용유담은 보이지도 않는다. 절터가 될 수 없다. 석등 하대석도 이름이 틀린다.  '석불 대좌 하대석'이다. 1980년 무렵 천진전 단군 교당 강길룡 처사가 마적사터 위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포클레인으로 옮겨갔다. 마적사터 입구 독가에 사시는 김성수(94세) 어르신 부부의 말씀이다. 직접 보셨다고 했다. 이분들은 50여년 전(66년) 이곳에 정착했다. 천진전 터는 신농산삼약초원 강재두 사장 백부님 소유의 논으로 40년 전 대종교에 팔았다고 한다. 마적사터는 지금은 전답으로 변했지만, 주춧돌과 와편이 흩어져 있고 우물도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는 용유담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적사가 폐사된 뒤 우물터 옆은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1856∼1939) 공이 살았던 집터이다. 석불 대좌 하대석은 제작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고 한다.(선과님)  휴천면 송전리 603번지와 604번지 일대 마적사지로 추정한다.

 

 

 

세진대(洗塵臺)의 옛 이름은 유환대(瑜環臺) 또는 유가대(瑜珈臺)이다.

 

▶ 마적사에 대한 옛 문헌의 기록

 

가.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1611년 4월 3일 임신일.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呑村)을 지나는데 옛일에 대한 감개가 무량하였다. <중략>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略彴)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참 뒤 하늘에 구름이 뒤엉키더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추었다.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젖은 풀잎이 옷을 적시고 다래 덩굴 가지가 얼굴을 찔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와 넝쿨을 잡고 겨우 올라가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 천령지와 함양군지의 기록

 

1) 천령지의 기록

마적사는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도사가 거처하던 곳을 이름하였다. 앞에는 유환대(瑜環臺)가 있고, 아래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고, 수잠탄(水潛灘) 위가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지금은 없다. [원문] 馬跡寺在智異山 以高僧馬跡所居爲名 前有瑜環臺 下有水潛灘 灘上卽龍遊潭 今無

 

2) 함양군지의 기록

마적사는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 도사가 거처하던 곳을 이름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아래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고, 수잠탄(水潛灘) 위가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전부터 없었다. [원문] 馬跡寺在智異山 以高僧馬跡所居爲名 前有瑜珈臺 下有水潛灘 灘上卽龍遊潭 前無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1856~1939)

 

 

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頭流錄)

조금 후 마적동으로 향하는데 남사 어른(성칠)이 앞장섰고 문선비도 동행하였다. 문중의 어른 우여(遇汝 강지주)氏의 집에 이르러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었다. 술을 몇 순배 마신 뒤 파하였다. 그 이웃에 사는 박창서 어른 또한 다과를 보내 대접하였으니 그 마을의 풍속의 순후함과 옛정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어 서로 칭찬하여 떠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이웃들 또한 한 마디로 같이 그러하였다.(이재구 선생 역)

 

 

석불 대좌 하대석(하대석과 지대석 일체형)
마적사 터 추정지
處士高靈申公聖桓幽居所 辛巳三月○日 '처사 고령인 신성환(申聖桓) 공이 은거했던 곳'이고 辛巳년은 1941년, 2001년이다.

 

  적은(跡隱) 강지주 (姜趾周 1856∼1939) 선생의 묘소와 돌배나무가 있던 자리 인근의 바위에서 마애 석각 명문이 있다. 명문의 내용은 '處士高靈申公聖桓幽居所 辛巳三月○日 '처사 고령인 신성환(申聖桓) 공이 은거했던 곳'이고 辛巳년은 1941년, 2001년이다. 강재두(跡隱의 玄孫) 사장의 말에 따르면 고모할머니가 고령 신씨 댁으로 시집을 갔고, 마적사지 위의 산(휴천면 송전리 산 53-2번지)이 지금도 고령 신씨 종산이라고 한다. 바로 이 부근을 마적사터로 추정한다. 

 

 

마적사 우물터
와불산 불두가 미타봉이다.
미타봉
大1
隱屛岩(은병암) 姜時永(강시영)[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은병암(隱屛岩) :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1866(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집필(1996) 오성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은병암의 강시영이라는 인물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大2
샘터 표시 케른
일강 바위
향로 모양의 바위
왕산과 필봉
선녀굴과 미타봉 사이에 암자터가 있다.
암자터
미타봉 방향으로 길이 구축되어 있다.
금대산 단옥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