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조용헌 칼럼니스트와 지리산 남유기행 II

도솔산인 2022. 7. 28. 19:03

조용헌 칼럼니스트와 지리산 남유기행 II

 

 

▣ 일 시 : 2022년 07월 23일(토)~25일(월)

▣ 코 스 : 음정-벽소령 대피소-덕평마을 천우동-도덕봉-벽소령-음정마을

▣ 인 원 : 3명(일정 민병태님, 조용헌님)

▣ 날 씨 : 첫날 둘째날 흐림, 셋째날 맑음

 

 

  지난해 10월 9일~10일 일정 민병태 선생과 영신암에서 의신사까지 유몽인의 하산길을 답사하였다. 덕평 마을에서 의신사의 하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어느 길이라고 특정하기 어렵다. 답사 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다시 읽게 되었고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검각(劒閣)보다 더 험하였다.'라는 문구에 주목하였다. 유몽인은 험한 하산길을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詩에 나오는 검각(劒閣)에 비유하였다. 먼저 답사한 曺규완 교수님은 '지세가 험하여 천혜의 요새다.'라고 하였고, 조선일보 논객 趙용헌 선생은 칼럼에서 '도덕봉 일원을 지리산의 요새'라고 표현하였다. 趙선생은 의신사를 당취의 본부로, 더덕봉과 덕평 마을을 당취(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께 답사한 강호 동양학 趙용헌 선생은 단번에 "철수(鐵手) 검각(劒閣)의 형국, 오른손의 엄지는 원통암,  검지는 검각, 중지와 약지, 소지는 상철굴, 중철굴, 하철굴"로 읽어냈다.

 

注 釰閣 :  중국 장안(長安)에서 촉(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검(大劍)ㆍ소검(小劍)의 두 산의 요해처(要害處)임. 지세가 험난해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를 말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는 표현이 나온다. 

 

 

1611년 4월 5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劒閣)보다 더 험하였다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그제야 우리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自靈神行四十里許山之嶄絶過於釰閣而風磴直下不作百八盤之勢緣而下者如自靑天落黃泉牽蘿引繩自卯至申而俯瞰繁綠之隙猶黯黯然不見底深矉太息幾乎齰指而垂戒矣然後下入幽谷披高竹㝷義神寺而宿夜聞杜宇亂啼溪聲繞榻始覺吾遊逸乎人間世矣.<1611년 4월 5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조용헌의 영지 순례] 당취 총대장 서산대사 키운 지리산 요새의 수수께끼

지리산 의신사(義神寺)에 소속된 암자가 31개쯤 있었다고 한다. 그 암자 중의 하나가 원통암(圓通庵)이다. 해발 700m에 있는 원통암은 의신사에서 30~40분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청학이 알을 품는다는 청학포란(靑鶴抱卵)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원통암 뒤의 봉우리가 도덕봉인데, 이 도덕봉의 꼭대기 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이 도덕봉 꼭대기의 바위 부분이 청학의 머리에 해당하고, 도덕봉 양옆의 봉우리 형태가 청학이 적당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둥그런 형태의 봉우리 꼭대기에 날카로운 바위가 있으면 매나 독수리, 학으로 간주하고, 바위가 없이 그냥 둥그런 형태면 닭이나 봉황으로 본다. 도덕봉은 매나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바위는 아니고 그보다는 뭉툭한 바위에 해당하므로 청학으로 본 것 같다. 거기에다가 원통암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너 겹으로 거듭 둘러싸고 있다.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은 것으로 본다. 두껍다는 이야기이다. 암자 터를 좌우에서 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아줄수록 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고 보존된다. 이러한 명당의 조건을 갖춘 원통암에는 당시에 숭인장로(崇仁長老)가 머물고 있었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①산세가 검각보다 험하고, ②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③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으로 요약된다. 산길에서 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나오는 검각(釰閣)이 핵심 키워드이다. 도덕봉은 두 개의 암봉이다. 유몽인은 도덕봉을 검각산의 대검산 소검산으로 이해하고 험한 산길을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비유한 듯하다. 

 

도덕봉에 오르니 영신사→덕평(천우동)→도덕봉(검각산)→하산한 능선(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의신사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도덕봉에 BC를 구축하고 요해처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였다. 기도터와 석축, 석굴과 샘터를 샅샅이 살폈다. 박회성(朴回城)처럼 자연 망루 위에 투석을 위해 모아놓은 돌도 있었다. 도덕봉 주변은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釰閣)였다. 먼저 대성골 초입 의병총이 떠올랐다. 덕평 고원과 도덕봉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서산대사의 승병들과 한말 하동지역 항일 의병들의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해가 되었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에 상원진과 백무진이 나온다. 상원진이 상원사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지난 2월 20일 상원사터를 답사하였다. 상원사터에서 상원사골로 650m를 올라가면 곧바로 박회성이다. 추성리 주민들은 대부분 박회성을 대궐터로 알고 있다. 1908년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에 "대궐기(大闕基)를 도적의 소굴"로 언급하고 있다. 일본군 진중일지의 대궐기(大闕基)는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하는 대궐터가 신동국여지승람 박회성이다. 지난 3월 24일(목)~25일(금) 의병장 석상용의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대궐터)에서 막사터와 석루(石壘)를 찾았고, 샘터와 깨진 솥단지 조각을 확인하였다.

 

  1907년 2월 13일(음 12.31) 새벽 양한규(1844~1907)와 고광순(高光洵, 1848~1907)등, 연합 의진은 남원 주둔 진위대 장병들의 연말연시 휴가를 틈타 별다른 격전 없이 남원에 입성한다. 그러나 양한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중 적탄에 맞아 순국하고, 전열을 재정비한 진위대의 공격으로 연합 의진이 패퇴한다. 대장을 잃은 양한규의 일대(一隊)와 고광순 의진은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문수사와 연곡사가 호남 의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10월 17일(음 9.11)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과 부장 고제량(高濟亮, 1849~1907) 이하 20여 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순국한다.

 

注 진위대 :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

 

  고광순과 고제량 등 수뇌부를 잃은 의병들은 외당재, 내당재를 넘어 의신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을 전후하여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 전사한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바른재를 넘어 마천으로 숨어들어 마천면 추성리 출신 석상용 부대와 합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대가 상원진과 백무진이다. 1908년 4월 29일 두 부대가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입석 수비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일본군 14 연대 입석 수비대와 함양 수비대가 1908년 6월 18일~22일 박회성 대궐터의 상원진을 토벌한다.

 

  마천면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을 접하게 되었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은 고 이종인(1896~1982) 공의 저술이다. 이공은 석상용 선생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나이가 26세 연하이다. 이공은 석장군이 1917년 출옥하여 1920년 별세할 때까지 3년간의 구술을 메모하였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1974년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마천면에 상원진과 백무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원사터를 답사한 후 이렇게 퍼즐이 맞춰졌다. 석상용의 상원진은 박회성에서 백무동으로 은밀하게 이동하여 도마마을에 은신해 있다가, 1908년 4월 29일(음 3.29) 그믐 밤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상원진이 백무진과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다. '이유인즉은 의병진에 시계가 없었다.'고 한다. 5월 11일(음 4.12) 석상용 의진을 도운 도마마을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당시 마천면 노지현(1861~1927) 면장이 생명을 무릅쓰고 나서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 수비대 14 연대『진중일지』의 기록은 상원의진 터를 박회성 대궐터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 수비대 14연대가 1908년 6월 18일에서 22일까지 상원의진을 토벌한 기록이다. 호남 의병의 이동 루트는 남원→구례→화엄사→밤재→문수사느진목재→연곡사→농평마을→외당재→칠불사→내당재→삼정→바른재→오공능선백무동→박회성으로 이어진다.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화엄사에서 밤재, 느진목재, 외당재와 안당재를 넘어 삼정마을까지 연결하였다.(220521~22) 이어서 6월 11일~12일 양일간 덕평마을에서 바른재→오공능선→백무동까지 답사를 하였다. 일본군 기록에 투항한 항일 의병 명단이 있다. 대부분 마천면 출신이다. 참담한 일이 아닌가. 

 

  필자는 선인들의 유람록을 답사하다가 한말 의병 길을 만났다. 어떤 답사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답사할 때마다 생각이 바뀐다. 자료를 정독하지 않고 답사를 한다면 발과 입이 산행하는 것이다. 정독하고 답사를 하더라도 몰입하지 않으면 격화소양(隔靴搔癢)이다.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다. 함께 답사한 사람과 의사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만의 생각은 대통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다. 귀를 열어야 눈이 비로소 보인다. 남의 말을 듣고 경청하는 것도 실력이다. 백번의 누여야 실이 하얗게 되듯 에너지가 켜켜이 응축되었을 때, 통연(洞然)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당일 답사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루에 갈 길을 열흘을 걸어야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4박 5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박사님 曰 "최소한 열 번은 와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완벽한 답사는 없기 때문이다.

 

 

▶ 지리산 호남 의병 활동 요약

 

  가. 1907년 2월 13일(음 12.31) 양한규 의진과 고광순 의진 남원성 공격함.(양한규 전사함)

  나. 1907년 10월 17일(음 9.11) 녹천 고광순(高光洵)이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순국함.

  다. 고광순 의병장을 잃고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함.

  라.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 의신마을 하철굴암에서 야영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부분 전사함.

  마. 의신에서 생존한 호남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 의진에 합류하고 백무진과 상원진으로 재편함. 

  바. 1908년 4월 29일(음 3.29)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입석 수비대를 공격함.

  사. 1908년 5월 11일(음 4.12) 일본군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도마마을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려고 함.

  아.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에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 수비대가 대궐터를 토벌함.

  자. 석상용 장군은 부하들을 일본군에 투항을 시키고 자신은 5년 동안 지리산에 숨어 지내다가 1912년에 체포됨.  끝.

 

 

 

 

☞ 마천면 삼정리 소재 벽소령의 봉산 정계 금표석각 : https://lyg4533.tistory.com/16488715

 

 

 

 

▶ 천우동(天羽洞)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 이청련서(李靑蓮書)

 

  천우동(天羽洞) 석각은 청학동이라고 알려진 곳의 하나인 덕평동(德平洞)에 있다. 움막터 샘터 뒤의 바위에 천우동(天羽洞)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 이청련서(李靑蓮書) 세로로 새겨져 있다. '李靑蓮書'는 몇 차례 답사를 한후에야 육안으로 판독하였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이다. 경태제(景泰帝)는 중국 명나라 7대 황제(재위 1449~1457)로 이름은 주기옥(朱祁鈺)이다. 묘호는 대종(代宗)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경태제(景泰帝)는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天順帝)의 이복 아우로 정통제(正統帝)가 몽골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잠시 왕위에 올랐다. 영종(英宗)이 풀려나면서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임오년(壬午年)은 대종(代宗)의 재위하였을 때가 아니고, 영종이 복위한 천순(天順) 6년으로 1462(세조 8년)년이다.

 

  이청련(李靑蓮)은 「청학동결(靑鶴洞訣)」을 남긴 인물이다. 석각의 주인인 이청련이 지리산 속에서 중국의 황제가 바뀐 것을 모르고 경태제(景泰帝)의 연호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여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호가 청련(靑蓮)이고 그의 문집이 청련집(靑蓮集)이다. 천우동 석각 이청련(李靑蓮)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후백(後白)은 뒤에 태어난 이백(李白)이라는 의미이다.

 

注 우화등선(羽化登仙) :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는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은 호북(湖北)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을 찾아 〈적벽부〉 2수를 지었다. 〈전적벽부〉에서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 나온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다.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천우동(天羽洞)은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신선의 세계인 덕평동천(德平洞天)을 일컫는 의미이다.

 

注 이청련(李靑蓮) : 조선 전기 세종과 세조 연간에 지리산에 은거했던 인물로 보인다. 촛대봉의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와 덕평마을 천우동(天羽洞) 석각과 청학동결(靑鶴洞訣)의 이청련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는 사람이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듯하다. 천우동(天羽洞) 석각에서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과 청학동결에서 '조선사기(朝鮮史記)'에 이르기를(朝鮮史記中有曰)의 문구가 조선시대 인물임을 반증한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로 재위 기간이 8년(1449~1457)이다. 고려낙운거사와 고려처사라고 한 것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인물로 이해가 된다.

 

 

▶ 이청련청학동결李靑蓮靑鶴洞訣

 

지리산 주위의 각 성씨들을 논하면 박(朴) 유(柳) 강(姜) 정(鄭) 조(趙) 최(崔) 권(權) 민(閔) 김(金) 송(宋) 허(許) 신(愼) 심(沈) 황(黃) 하(河) 표(表) 양(梁) 남(南) 윤(尹) 홍(洪) 서(徐) 장(張) 우(禹) 오(吳) 노(盧) 성(成) 임(林)맹(孟) 천(千) 도(都) 소(蘇) 설(薛) 방(房)이 크게 창성하는 땅이다. 이 중에서 이(李) 유(柳) 하(河) 강 (姜) 정(鄭)이 먼저 발현하였다. 조선사기(朝鮮史記)에 이르기를 ‘지리산 남쪽 기슭에 청학동이 있는데 제비의 둥지 모양으로 조선의 이름난 터이다. 혹은 적야(磧野)라고 하고 혹은 학야(鶴野)라고도 하며 또는 사삼동(沙蔘洞)이라고도 한다. 청학동 뒤에는 돌이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물은 서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 청학동 입구에는 돌문이 있고 그 안쪽에는 돌 샘이 있다.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은 백 사오십 세이고 중간 수명은 백이삼십 세 이 며 가장 낮은 수명이 구십 세이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백운산 세 봉우리가 정남 쪽의 안산(案山)이다. 남해의 물이 앞에 임하였다. 일천여호(戶)가 살 수 있으므로 일천여 석(石)의(石)의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땅이 높으나 서리는 늦게 내리므로 한 되의 곡식을 심으면 한 석(石)의 수확을 하니 무한히 큰 땅인 것이다. 천운(天運)이 바로 당면하고 시운(時運)이 스스로 열리면 자연히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영남의 뛰어난 선비 이십여 명이 모여서 마을을 세우니 10년 안에 마을을 이루어서 100여호(戶)가 될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면 석문이 우레에 깨어지고 큰 수레 마차(駟馬)가 출입하게 될 것이다. 40년 안에 공경(公卿)과 장상(將相), 명사(名士) 현인(賢人) 달사(達士)가 배출될 것이다. 문관이 일천이요 무관이 일만인 땅이로다. 이 골은 각 성씨가 모두 흥성하는 땅이다. 고려처사 이청연이 씀.

 

李靑蓮靑鶴洞訣

 

地理各姓論朴柳姜鄭趙崔權閔金宋許愼沈黃河表梁南尹洪徐張禹吳盧成林孟千都蘇薛房大昌之地 此中李柳河姜鄭先發也 朝鮮史記中有曰 智異山南麓有靑鶴燕巢形 朝鮮名基也 或云磧野 或云鶴野 或云沙蔘洞 洞後有石角三峰 其下有光岩 谷水西山山東流 洞口有石門 其內有石泉 上壽百四五十 中壽百二三十 下壽九十矣 壬坐丙向 白雲山三峰爲正案 南海水當前 居千餘戶則作畓千餘石地 地高霜晩 升種石出 無限大地也 天運正當 時運自開 自然指路之人出之 嶺南尊士二十餘人會設則 十年內成村百餘戶 二十餘年雷破石門駟馬出入 四十餘年內卿相名賢達士出 文千武萬之地 此洞各姓亦皆興旺之地也

 

高麗處士李靑蓮記

 

 

▶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 1535년 (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 재임 시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우동(天羽洞)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 이청련서(李靑蓮書)
당귀(當歸)

 

▶ 당귀(當歸)의 유래

 

  ‘당귀(當歸)’라는 이름은 중국의 옛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부인들은 남편이 싸움터에 나갈 때 당귀를 품속에 지니고 있게 하여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전쟁터에서 기력이 다하여 죽게되었을 때 당귀를 달여 먹으면 다시 기운이 회복되어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귀(當歸)의 의미는 ‘마땅히 돌아온다’는 뜻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당귀(當歸)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였다.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당귀(當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은 증봉(甑峯)을 거쳐 내려와 마암(馬巖)에 이르렀다. 따라온 종 손득이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당귀(當歸)를 많이 캔 관아의 의원을 만나 그 중 서너 뿌리를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올렸다. 당귀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어서 종들로 하여금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구나. 단지 ‘當歸’라는 약초만을 좋아할 뿐이니, ‘當歸’를 좋아함이 그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余等由甑峯而下 至馬巖 從童孫得就水而飮 遇一官醫多採當歸 取三四本以來進之 當歸是我素所好者 戒使勿遺 噫歸而不能歸 只好草之當歸 可謂好之得其實乎]" 살다가 잠시 경로를 이탈하였으면 당귀(當歸)하시라.

 

 

 

안당재, 바깥당재, 느진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