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내 계곡(飛離嬭溪谷)과 구시소(槽沼) 병렴곡(屛簾谷) 석각
▼ 비리내 계곡(飛離嬭溪谷)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음정길 97(한일리조트)
행적자 : 없음 연대 : 미상 석각시기 : 현대
[개요]
비린내골의 유래는 ① 선녀와 나무꾼 전설, ② 생선 장수 설, ③ 빨치산 피비린내 설, ④ 비연래(飛燕來) 설 등이 있다. 석각 명문의 '비리내(飛離嬭)'는 "날개옷을 입고 날아서 하늘로 떠난 선녀"라는 의미로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에 의거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에서 태어난 함양의 한학자 치암(耻菴) 이용근(李榕近, 1938) 옹의 '비린내골의 유래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의 비리내(飛離奶)에서 유래했다.'라는 주장과 일치한다. 嬭(㚷)와 奶는 동자로 '어미'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국지명총람》 「경남편2(1980)」과 《마천면지(1994)》에는 '비연래(飛燕來)골'로 설명하고 있다.
▼ 구시소(槽沼)
▼ 구시소(槽沼) 屛簾谷 甲子暮春 澹窩 洪純甫 歷堂 석각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삼정로 449(휴양림산장 대표 차재권, 010-4531-7637)
행적자 : 홍계희[洪啓禧, 1703년(숙종 29)~1771년(영조 47)] 연대 : 조선 영조 석각시기 : 1744년(영조20년)
[개요]
병렴곡(屛簾谷)은 구시소(槽沼)로 흘러내리는 계류를 가리키는 듯하다. 넓은 반석에 옥구슬이 병풍과 발을 드리운 것처럼 계곡물이 구시소로 흘러내린다는 의미이다. 석각의 내용은 '병렴곡 갑자모춘 담와 홍순보 역당[屛簾谷甲子暮春澹窩洪純甫歷賞 : 병렴곡 갑자(1744)년 늦은 봄 담와 홍순보가 두루 구경하다.]' 14자이다. 담와(澹窩)는 조선 영조 대에 경기도관찰사와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홍계희(洪啓禧, 1703~1771년)의 號이고 순보(純甫)는 그의 字이다. 석각 시기인 갑자모춘(甲子暮春)은 1744년(영조20년) 늦은 봄이다. 석각이 있는 위치는 벽소령에서 소금쟁이 능선을 내려와서 광암동과 하정마을 소금길의 길목인 구시소(槽沼)에 있다. 구시소(槽沼)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벽소령과 형제봉의 부자암이 정면으로 보인다.
구시소(槽沼)에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다. " 옛날 선녀 몇 사람이 내려와 구유처럼 생긴 소(槽沼)에서 목욕을 하였다. 이름을 인걸(人傑)이라고 하는 한 사내가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엿보다가 아미선녀(阿美仙女)의 우의(羽衣)를 몰래 훔쳤다. 아미선녀는 옷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인간 세상의 사람이 되어 인걸과 동거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두 아들이 장성한 뒤 어느 달 밝은 밤에 부부가 즐겁게 노닐다가 우의를 선녀에게 건네주니, 아미선녀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멀리 사라졌다. 부자(父子)가 서로 바라보며 절규하다가 마침내 바위로 변하였다. 세상에서 부자바위[父子岩]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황당하고 막연하게 말하는 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마을에 운학동(雲鶴洞)이 있고 산에 벽소령(碧簫嶺)이 있으니, 선녀가 내려온 것을 거의 예측할 수 있다.<선유정기문(정창학, 1976)>
홍계희[洪啓禧, 1703년(숙종 29)~1771년(영조 47)]는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와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澹窩)이다.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진(洪受晋)이고,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洪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 홍계희[洪啓禧, 1703년(숙종 29)~1771년(영조 47)]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澹窩)이다.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진(洪受晋)이고,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洪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7년(영조 13)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언이 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로 특진하였다. 이어 수찬을 거쳐, 1742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휼정책을 살폈다.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 복명해 영조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1743년 부사과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 혐의를 탄핵했다가, 당색으로 공격했다는 의심을 받아 삭탈당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승지로 특채되었다.
1747~1748년 일본 막부의 9대 장군 도쿠가와[德川家重]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상사(通信上使)로 뽑혀, 부사 남태기(南泰耆), 서장관 조명채(曺命采) 등 일행 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이 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하였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시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 때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해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 시행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상 문제가 많다는 중신들의 비난을 받고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전출되었다. 1754년 이조판서로 재기용된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 및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762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케 함으로써 세자가 죽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는 유학자로 자처했으나 그보다는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많은 관심을 보인 개혁 실천주의자였다. 이는 그가 젊어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유형원(柳馨遠)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 여겨진다. 그의 개혁관은 1749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며 올린 시폐개혁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개혁안에는 과거제를 철폐하고 명나라의 관리 임용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과제조(科制條)」, 한천소시(翰薦召試)의 철폐와 대간제도의 개선책을 제시한 「관제조(官制條)」, 5군영을 철폐하고 훈련도감과 어영청만을 두되, 정병(正兵)의 수를 늘리자는 「군제조(軍制條)」, 양역(良役)의 모순을 시정하려 한 「균역조(均役條)」 등 네 가지 안건이 담겨 있다.
이 중 세 가지는 조신(朝臣)들에 의해 모두 거절되고, 군역조만이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양역의 폐단이 양반이 역을 맡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생 구제와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에게 군포(軍布)를 내게 해 양역에 충당하자는 유포론(遊布論)을 제기했다. 이 개혁안은 사림의 맹렬한 비난으로 취소되고, 대신 경제력을 나타내는 전결(田結)에 부과되는 결포론(結布論)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이 결포제조차도 대부분 지주 관료층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토지 1결에 2두(斗)의 결미(結米) 내지 결전(結錢)의 형태로 균역법에 부분 반영되었다. 그는 노론 이재의 문인을 자처했으나, 대다수 이재 문인들로부터는 배척당한 인물이었다. 한때는 조현명·송인명·김재로 등 탕평파에 접근해 출세했으나, 후일 조현명 등과 불화하면서 멀어졌다. 그 대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형조판서 윤급(尹汲), 참판 이기경(李基敬) 등과 결탁하였다. 그리고 영조 계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내통하는 등 권력을 좇아 처세한 탓에 사림들로부터 소인 내지 간신으로 지목되었다.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나, 두 손자가 정조시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두 아들(洪趾海·洪述海)과 일가가 처형당하게 되자,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이재의 뇌암서재(雷巖書齋)에 배향하자는 충청도 유생의 논의가 있었으나, 이재 문인의 반대로 유산되었다. 글씨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다. 그리고 편저로는 『균역사실(均役事實)』·『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목변통사의(均役事目變通事宜)』·『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해동악장(海東樂章)』·『명사강목(明史綱目)』·『경세지장(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사곡록(寺谷錄)』·『창상록(滄桑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정만조,『동덕여대논총』10,1977)
「균역법의 선무군관」(정만조,『한국사연구』18,1977)
집필자집필 (1998년)정만조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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