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덕평마을 천우동(天羽洞) 석각

도솔산인 2021. 12. 29. 17:14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덕평마을 천우동(天羽洞) 석각

 

 

천우동(天羽洞) 석각은 청학동이라고 알려진 곳의 하나인 덕평동(德平洞)에 있다. 움막터 샘터 뒤의 바위에 천우동(天羽洞)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 이청련서(李靑蓮書) 세로로 새겨져 있다. '李靑蓮書'는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능하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이다. 경태제(景泰帝)는 중국 명나라 7대 황제(재위 1449~1457)로 이름은 주기옥(朱祁鈺)이다. 묘호는 대종(代宗)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경태제(景泰帝)는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天順帝)의 이복 아우로 정통제(正統帝)가 몽골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잠시 왕위에 올랐다. 영종(英宗)이 풀려나면서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임오년(壬午年)은 대종(代宗)의 재위하였을 때가 아니고, 영종이 복위한 천순(天順) 6년으로 1462(세조 8년)년이다.

 

이청련(李靑蓮)은 「청학동결(靑鶴洞訣)」을 남긴 인물이다. 석각의 주인인 이청련이 지리산 속에서 중국의 황제가 바뀐 것으로 모르고 경태제(景泰帝)의 연호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여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이후백[李後白, 1520(중종 15)~1578(선조 11)]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호가 청련(靑蓮)이고 그의 문집이 청련집(靑蓮集)이다. 천우동 석각 이청련(李靑蓮)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후백(後白)은 뒤에 태어난 이백(李白)이라는 의미이다.

 

注 우화등선(羽化登仙) :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는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은 호북(湖北)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을 찾아 〈적벽부〉 2수를 지었다. 〈전적벽부〉에서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 나온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다.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천우동(天羽洞)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신선의 세계인 덕평동천(德平洞天)을 일컫는 의미이다.

 

 

▶ 화개면지 화개동의 각자들

두류만묵(頭流萬墨)이 아니고 두류만첩(頭流萬疊)으로 보인다.

 

☞ 기담(妓潭)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석각 : https://lyg4533.tistory.com/16488613

 

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촛대봉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 탁본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촛대봉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 사진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注 이청련(李靑蓮) : 조선 전기 세종과 세조 연간에 지리산에 은거했던 인물로 보인다. 촛대봉의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와 덕평마을 천우동(天羽洞) 석각과 청학동결(靑鶴洞訣)의 이청련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는 사람이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듯하다. 천우동(天羽洞) 석각에서 '경태임오춘(景泰壬午春)'청학동결에서 '조선사기(朝鮮史記)'이르기를(朝鮮史記中有曰)의 문구가 조선시대 인물임을 반증한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로 재위 기간이 8년(1449~1457)이다. 고려낙운거사와 고려처사라고 한 것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인물로 이해가 된다. 

 

 

☞ 이청련청학동결李靑蓮靑鶴洞訣

 

지리산 주위의 각 성씨들을 논하면 박()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크게 창성하는 땅이다. 이 중에서 이() () () () ()이 먼저 발현하였다. 조선사기(朝鮮史記)이르기를 지리산 남쪽 기슭에 청학동이 있는데 제비의 둥지 모양으로 조선의 이름난 터이다. 혹은 적야(磧野)라고 하고 혹은 학야(鶴野)라고도 하며 또는 사삼동(沙蔘洞)이라고도 한다. 청학동 뒤에는 돌이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물은 서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 청학동 입구에는 돌문이 있고 그 안쪽에는 돌 샘이 있다.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은 백 사오십 세이고 중간 수명은 백이삼십 세 이 며 가장 낮은 수명이 구십 세이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백운산 세 봉우리가 정남 쪽의 안산(案山)이다. 남해의 물이 앞에 임하였다. 일천여호()가 살 수 있으므로 일천여 석(石)의()의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땅이 높으나 서리는 늦게 내리므로 한 되의 곡식을 심으면 한 석()의 수확을 하니 무한히 큰 땅인 것이다. 천운(天運)이 바로 당면하고 시운(時運)이 스스로 열리면 자연히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영남의 뛰어난 선비 이십여 명이 모여서 마을을 세우니 10년 안에 마을을 이루어서 100여호()가 될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면 석문이 우레에 깨어지고 큰 수레 마차(駟馬)가 출입하게 될 것이다. 40년 안에 공경(公卿)과 장상(將相), 명사(名士) 현인(賢人) 달사(達士)가 배출될 것이다. 문관이 일천이요 무관이 일만인 땅이로다. 이 골은 각 성씨가 모두 흥성하는 땅이다. 고려처사 이청연이 씀.

 

李靑蓮靑鶴洞訣

 

地理各姓論朴柳姜鄭趙崔權閔金宋許愼沈黃河表梁南尹洪徐張禹吳盧成林孟千都蘇薛房大昌之地 此中李柳河姜鄭先發也 朝鮮史記中有曰 智異山南麓有靑鶴燕巢形 朝鮮名基也 或云磧野 或云鶴野 或云沙蔘洞 洞後有石角三峰 其下有光岩 谷水西山山東流 洞口有石門 其內有石泉 上壽百四五十 中壽百二三十 下壽九十矣 壬坐丙向 白雲山三峰爲正案 南海水當前 居千餘戶則作畓千餘石地 地高霜晩 升種石出 無限大地也 天運正當 時運自開 自然指路之人出之 嶺南尊士二十餘人會設則 十年內成村百餘戶 二十餘年雷破石門駟馬出入 四十餘年內卿相名賢達士出 文千武萬之地 此洞各姓亦皆興旺之地也

 

高麗處士李靑蓮記

 

 

▶ 이후백[李後白, 1520(중종 15)~1578(선조 1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1535(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仁宗)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 재임 시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