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불교유적

함양군 마천면 군자사지 승탑 지대석과 옥개석(201206)

도솔산인 2021. 5. 27. 09:08

함양군 마천면 군자사지 승탑 지대석과 옥개석(201206)

 

 

▣ 일 시 : 2020년 12월 06일(일)

▣ 코 스 : 군자사터-도마사터-벽송사-신농산삼약초원-천진전-마적사터

▣ 인 원 : 4명(문 회장님, 일정 민선생님, 선과님)

▣ 날 씨 : 맑음(포근함)

 

 

☞ 옛 숨결 그 정취를 찾아 : https://blog.daum.net/12977705/8727049?category=5252

 

 

지대석 부재
지대석 부재
옥계석

 

▶ 참고자료 : 군자사 관련 옛 문헌의 기록

 

1.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나.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다.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사찬한 天嶺誌

 

지리산에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신라 진평왕이 지위를 피하여 이곳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 국도로 돌아간 뒤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有兪好仁詩 ○今無)

 

注 1888년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注 폐사 시기는 1888년 이전으로 보임.

 

라. 연대 미상의 마천 당흥 부락 마애석각 명문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2. 선인들의 유람록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戰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고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다.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 8월 22일, 저녁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는데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절의 서쪽 구석에 화려한 단청 칠을 한 새로 지은 별전이 있는데 삼영당(三影堂)이라고 했다. 삼영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라.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

 

○ 8월 26일, 다시 20리를 가서 군자사에 이르렀다. 함양군수 윤천(尹○)이 두 명의 악공 및 안주와 술을 보내왔다. 절 앞에는 옛날 영정(靈井 : 신령스러운 우물)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는데 뒤에 군자사로 개칭하였다. 무엇을 근거해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마.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바. 기타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 1571년 양경우, 1586년 양대박, 1651년 오두인, 1767년 홍씨, 1780년 이동항,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유람록 등에 나오는데 진평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참고 자료에서 제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