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불교유적

사리암터 승탑(부도탑) 지대석 발견(180706~07)

도솔산인 2018. 7. 8. 01:23

 

사리암터 부도탑(승탑) 지대석 대좌 발견(180706~07)

 

 

▣ 일 시 : 2018년 07월 06일 ~ 07일

▣ 장 소 : 하동군 화개면 소재 사리암터

▣ 인 원 : 2명(완폭대님과)

▣ 석 물 : 부도탑(승탑) 지대석

 

 

사리암 폐사지 승탑(부도) 터 위에 釘 맞은 판석이 흙속에 묻혀있다는 정보를 듣고, 2018076~7일 양일간 沙里庵址(사리암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첫날 흙을 일부 걷어내니 판석 중간에 원형 홈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서 임병기(30년 동안 전국 승탑을 모두 답사하신 분 http://blog.daum.net/12977705) 선생님께 캇톡으로 보내니 부도탑(승탑) 지대석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다음 날 주변의 흙과 돌을 걷어내고 계측을 해보니 가운데에 직경 60cm되는 원형 홈이 있고, 가로 140cm, 세로 110cm, 두께 15cm~25cm로 가공한 판석입니다. 먼저 하동군에서 기초 조사할 가치가 있는지 與否를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리암터 주변의 전답은 사유지로 쇠점마을 정재근씨 소유라는데 이분이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성종 연간에 등장하도적 장영기사리암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 사리암터와 도적 장영기 관련 문헌의 기록

 

1. 조선왕조실록

 

가. 예종실록 예종 1년 1469년(己丑) 11월 1일(辛巳日)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진주(晉州)의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이 광양현(光陽縣)의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도둑을 보리암(菩提庵)의 옛 터전에서 발견하였는데, 도둑들이 초막 19간을 짓고 제대(祭臺)를 설치하였으며, 버려두고 간 말이 14필 있었는데 안장을 혹은 찢어버리고 혹은 불살랐으며, 한 남자를 죽였다 합니다. 구례(求禮)의 백정(白丁) 철산(哲山)이 이르기를, ‘내가 구례현감을 따라 도적과 더불어 보리암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현감이 패배(敗北)하여 퇴각하자 도적이 군사 3인을 죽이고 도망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지리산(智異山)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므로, 신이 곧 진주로 가서 본주(本州)와 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등 고을의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화개동구(花開洞口)에 진을 치고 도둑들의 종적을 탐후(探候)하니, 도둑들은 사리암(沙里庵)의 옛 터전에 둔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진을 친 곳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고 산길이 험악하므로, 신이 불의(不意)에 엄포(掩捕)하고자 하여 군사로 하여금 모두 도보로 도둑들의 둔친 곳에 이르게 하니, 도둑들이 먼저 고개 위로 올라가고, 그에 앞서 여인(女人)과 치중(輜重)을 보내버렸습니다. 도둑 16인이 신의 선봉(先鋒)과 더불어 싸웠는데, 신이 30여 리를 추격하면서 모두 여섯 번 합전(合戰)하여 도둑 오덕생(吳德生)을 활로 쏘아서 잡고 그의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도둑들이 밤을 타서 크게 부르짖으며 관군의 진에 쳐들어 왔으나, 신의 복병(伏兵)이 배후에서 쫓으며 활을 쏘니, 도둑들이 이에 도망하여서 구례로 향하였습니다. 신이 40리를 따랐으나, 식량이 다하고 행군한 지 3일에 군사들이 피곤해 하므로, 군사들을 퇴각시키고 본진의 군사로 하여금 진을 쳤던 곳에 머물러 방호(防護)하게 하고, 탈취한 재산은 진주로 부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극균이 보병을 거느리고 도둑이 둔치고 있는 봉우리를 포위하자, 도둑이 그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나누어 지키게 하며, 관군 두 사람을 활로 쏘아 맞히고, 드디어 이극균을 핍공(逼攻)하므로, 이극균이 위로 공격하는 것이 불리하여 마침내 수리(數里)되는 곳에 물러와서 둔을 쳤다. 군졸 하나가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듣고 도둑들의 짓이라고 말하자, 모두 놀래어 도주하였다. 그때 날이 이미 어두우므로 모든 군사들이 서로 짓밟으면서 삽시간에 흩어졌다가 한참 뒤에야 적도들의 소행이 아닌 줄을알고 조금씩 도로 모여서 행군하였는데, 한밤중에 도둑들이 진으로 돌진(突進)하여 산에 불을 놓아 자취를 없애고 도망하니, 관군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출처 :태백산사고본3815A국편영인본8427분류사법-치안(治安)

 

☞ 조선왕조실록 慶尙右道節度使)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11001_002

 

 

나. 성종실록 성종 1년(경인) 147021일(경술)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장영기(張永奇) 등이 이달 21일에 장흥(長興) 땅에 이르렀으므로, 신이 부사(府使) 김순신(金舜臣)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포위하여 장영기를 사로잡고 그들의 무리 중에 서불정(徐佛丁)을 쏘아 죽였는데, 다만 김순신이 도둑의 화살에 맞아 가슴을 상하였습니다. 남은 무리들은 도망하여 달아났으므로, 다시 근심(根尋)하여 쫓아 잡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출처 : 태백산사고본131A국편영인본8462분류사법-치안(治安)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병마절도사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2001_006

 

조선왕조실록에 도적 장영기에 대한 기록은 여러 번 등장한다. 경상우도 절도사 이극균의 토벌군을 맞아 지형이 험준한 곳에서 진을 치고 저항하여 이극균이 끝내 진압하지 못하고, 도적 장영기는 지리산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성종 1년 1470년(경인) 2월 1일(경술) 전라도 병마절도사 허종과 장흥부사 김순신에게 전라도 장흥에서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2.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1472년 8월 17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창불대에 올라 해공이 신흥사동을 가리키며 위치를 설명하자 도적 장영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여러 구렁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 같은 지용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에게로 공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空指衆壑之會曰新興寺洞也李節度克均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永己狗鼠也以負險故李公之智勇而不能禁遏其奔逬卒爲長興守之功可嘆已)

 

 

3. 1652년 임진 516(병술) 전 장령 안방준의 상소

 

옛날 태평 무사(太平無事)하던 날에 장영기(張永起)·임거정(林巨正)과 같은 강적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장영기는 이극균(李克均)에게 패배하여 호남 지방으로 도망하여 죽었고, 임거정은 방어사 남치근(南致勤)을 파견하여 한 도의 병사를 출동시켜서 사방에서 포위하였으나, 서림(徐霖)이 투항하여 의로움에 향하지 않았더라면 1년 내에 적의 괴수를 쉽게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在太平無事之日强賊如張永起林巨正之徒相繼而起永起爲李克均所敗走死湖南巨正至遣防禦使南致勤動一道之兵四出追捕倘非徐霖投降嚮義則一年之內。)

 

 

 

 

 

 

 

첫날

 

 

 

 

 

 

 

탑신 폭 60cm× 높이 120cm

 

승탑(부도) 상단의 文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