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장당골 石南巖藪 観音巖의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다음 내용은 전국 방방곡곡 승탑과 불적을 찾아 답사하시는 선과 임병기님의 답사기이다. 작년에 내게 석남암수(石南巖藪)에서 '巖藪' 의 의미를 물어오신 일이 있다. 고전번역원 DB를 검색해보니, 명재유고(明齋遺稿)의 문하생 감사(監司) 이탄(李坦)의 시에 '깊은 산 수풀 속에 둥지를 트니/留着在巖藪', 김도수.남유기(南遊記, 1727년)에 '쓸쓸히 홀로 깊은 산속에서 사는 자가/蕭然孤棲於巖藪之中者',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년∼1933년)의 암서집(巖棲集) 권23(1909년) 송자경뢰사(宋子敬誄辭)에 '깊은 산속에 은둔한 이를 찾아가/訪隱淪於巖藪兮', 정다산의 시문집 7권에 '긴 여름날을 홀로 암수에 붙여 있노라니/長夏無伴寄巖藪',의 용례가 있다. 이외에도 한국 고전번역원 종합 DB에는 퇴계집 등 30여 곳에 암수(巖藪)의 용례가 있으며 '깊은 산속'으로 국역하였다. 불교와 불적에 까막눈이 뭔가 싶어서 선과님의 허락을 받고 블로그에 옮겼다. 자료를 공유해주신 임병기 님께 감사드린다.
☞ 암수(巖藪) : 암(巖)은 산(山)을, 수(藪)는 숲의 의미도 있지만 물(水)를 의미한다. 山澤(산택), 山野(산야), 산수(山水), 산천(山川) 즉, 천석(泉石), 자연(自然)을 뜻한다. '출사하지 않고 시골에 묻혀 지낸다.'의 의미도 있다. 수도를 하는 승려나 은자들이 숨어사는 '깊은 산속' 으로 이해가 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 선과 임병기님의 석남암수(石南巖藪)에 대한 의견
지리산 장당골 석남암수(石南巖藪)로 비정되는 폐사지와 석조 비로자나불의 원래 자리인 석남암수(石南巖藪) 관음암(觀音巖)을 답사하였습니다. 현재는 석남암수(石南巖藪)를 석남암사(石南巖寺)로 특정하고 문화재 명칭도 석남암사(石南巖寺) 비로자나불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답사 결과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과 다른 생각이 들어 답사기를 겸하여 의견을 밝힙니다.
석남암수 비로자나불에 대한 연구 논문은 몇 편 있으나 석남암수지 또는 석남암사지에 대한 글은 검색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자유롭게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비제도권 무지렁이의 특권으로 일천한 안목을 전개해보겠습니다. 학위도 없고, 전공자도 아니며, 오직 폐사지 답사를 즐기는 사람의 눈에 비친 시각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 말사입니다. 정확한 사적은 전하지 않지만 두산백과사전을 비롯 대부분 자료에는 신라 말 무염(無染.801~888)이 덕산사(德山寺)로 창건하였으며,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원사의 성보 유물로는 766년 조성한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삼층석탑이 유존합니다.
특히, 비로전에 봉안된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제호의 영태2년 명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로 불교사와 불교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 불상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근거로 지정명칭이 석남암사지(石南巖寺址)인지 의문입니다. 국보 233호인 영태이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에는 분명하게 석남암수(石南巖藪) 명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 출처 문화재청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 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 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년명(紀年銘)의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 자료가 부족한 고대 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출처 문화재청)
3.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상, 중, 하대석과 불신, 광배를 완전하게 갖춘 통일신라 불교 미술의 정점인 8세기 중엽 불상입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등, 무릎을 깎아 다소 양감이 떨어지며, 무릎도 낮아 보입니다. 그러나 상호와 풍만한 가슴은 조성시기를 보여줍니다. 소발, 육계가 높고, 이마에 백호가 있으며, 원만상입니다. 불두도 옮기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후보한 까닭으로 삼도가 불분명합니다. 지권인 수인은 낮게 표현하였으며 결가부좌 자세입니다.
팔각 하대석에는 복련을 새기고 중대석은 우주를 모각하여 팔각을 구획하였으며, 강대석에는 앙련을 조식하였습니다. 중대석에는 사리공이 있으며, 상대석 뒤편에는 광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가 있습니다. 주형 거신 광배는 훼손이 심합니다. 두광은 두 겹의 선으로 표현되었고, 그 안에 당초문과 중심에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신광은 2중선을 새겼으며, 외연에는 불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원형은 불명확합니다.
석조비로자나불 반출 경위(출처 : 영태 2년 명 석비로자나불 조상기에 대하여. 김성주. 박용식.2013년) 박경원·정원경(1983), 박경원(1985), 문명대(1992)에 의거하여 영태2년명 석비로자나불 사리합과 관련된 불상, 좌, 사리합 등의 발견 경위를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가. 1947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의 이성호 형재가 지리산 중턱에서 나무를 하다가 석조로 된 불상을 발견하여 지게에 지고 내려와서 집안에 모심(이때 불상이 너무 무거워 불상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불상을 깎아 내냈으며 운반 도중에 지게가 넘어지는 바람에 목 부분이 훼손되기도 했다.)
나. 1954년 이 부처님을 내원사에 모시게 됨.
다. 1966년 신라 오악 조사팀의 조사 시에 내원사 경내에서 발견됨.
라. 이후 다른 마을 주민에 의해 석조 비로자나 부처님이 있던 좌 중석에서 사리합 발견 및 반출
마. 사리합의 내용물을 꺼내어 탄화된 내용물은 버리고 성냥갑 만한 사리합은 보관하다가 사리합을 꺼낸 사람들에게 흉사가 겹치자 보관하고 있던 사리 함을 버렸다고 함.
바. 사리합은 여러 경위를 거쳐 1981년 최종적으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됨.
사. 문화재청에서 부처님의 대좌를 1992년에 불상이 있는 내원사로 옮겼으며 현재 내원사에는 비로전(毘盧殿)을 짓고 원래 부처님, 광배, 좌를 맞추어 모시고 있음.
4. 납석제호 명문(부산박물관 소장)
가. 사리합 몸통 부분 기록
永泰二年丙午七月二日 ?法勝法縁二 并內奉過去为?又易 豆溫哀郞願为石毗廬遮?佛 成內無垢浄光陀羅尼并 石南巖藪観音巖中 在內如 願請內者 豆溫愛郞?神又易 ?二? ?見內人?向尓頂礼为? 遙聞內?随喜为內? 影中逕類?吹尓逕風 逕所方處一切衆生?一切 皆三惡道業滅尓自毗盧遮?是覺去世为尓誓 內之(원문확인 필요)
영태 2년(766) 병오 7월 2일에 석법승 석법연 두 승은 아울러 (두온애랑의 유지를)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이 원하시던 석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무구정광 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두었다. 발원하는 내용은 두온애랑이시거나 두 승들이거나 혹 (불상을) 본 사람이나 (불상을) 향해서 정례한 이나 멀리서 (불상의 소식을) 들은 이나 수희한 이나 (불상의) 그림자를 지난 무리나 바람이 불어서 지난 곳의 방처 일체중생들이나 일체 다 삼악도에 떨어질 업을 멸하여서 스스로 비로차나부처님인 줄 깨달아 세속을 떠나게끔 서원한다.
나. 사리합 밑면 부분 기록
內物是在之 [∼] 此者㤙恒性为 一二个反藥者大 弘病一无爲趣丂
내물이다 이것은 (두온애랑의) 은혜들의 항성을 위해 한두 개 반의 약은 크게 퍼진 병을 없애기 위한 뜻의 공교함이다.
☞ 납석제호 명문 출처...영태 2년 명 석비로자나불 조상기에 대하여 김성주, 박용식(2013년)
5. 石南巖藪(寺)址와 관음암(觀音庵)의 오류
가. 석남암수 관음암(石南巖藪 観音巖)
관음암(觀音巖) 전면은 거대 바위 암벽입니다. 흰빛이어서 백의관음에서 유래한 바위 이름일까요? 인터넷에는 사지와 관련하여 오류가 난무합니다.아마도 직접 답사하지 않고 잘못된 자료를 마구잡이로 퍼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네이버 사이트에 등재된 내용입니다. "바위 위 절터"라는 설명은 물론이고 벌써 내원사로 옮긴 광배도 현장에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비로자나불상은 지리산 자락에 속하는 산청 지역의 한 산봉우리쯤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위 절터에 있었다. 이 바위 절터는 앞에서 바라보면 남쪽과 서쪽이 거대한 절벽이지만 산 정상에서 내려온 능선의 끝단과 연접되어 있어 협소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대좌 및 광배석은 아직 원위치에 남아 있다,"
나. 石南巖藪(寺)址와 관음암(觀音庵) 대표적인 오류
1) 석남암수지 石南巖藪(寺)址. 또는 관음암(觀音庵)으로 표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었던 터는 절(寺)은 고사하고 암자(庵子)도 들어설 수 없는 좁은 공간으로, 사찰 산신각처럼 단칸 전각이 겨우 앉을 협소한 터입니다. 그런데도 절터, 암자터라는 기록이 많이 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비로자나불 본래 위치는 석남암수( 石南巖藪) 관음암(觀音巖)이 정확한 지명이며 그 외의 표현은 모두 오류입니다.참고로, 암자터는 거주 공간과 식수 공급이 최우선 고려 사항입니다. 심산유곡 폐사지 답사에서 터를 구분할 때에 샘터가 없으면 암자터가 아니라 단기간 머무는 기도터입니다.
2) 관음전(觀音殿)으로 표기
개인적으로 비로자나불이 눈, 비, 바람에 노출된 노천에 봉안되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문병대 박사의 위 논문에는 현장 답사 때 기와 조각과 주초가 남아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와가 산재하고 대좌와 광배가 흩어져 있었으며, 주춧돌 등 건축부 재도 남아 있었다. 석불을 봉안한 아담한 毘盧殿 또는 寂光殿 건물이 서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듯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이 주인이며, 비로자나불은 화엄전, 비로전, 각황전, 대적광전, 적광전에 모시는 불상입니다. 이러한 오류 또한 관음암(觀音巖)을 관음암(觀音庵)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기인되었을 것입니다. 역시 잘못된 표현이며 관음전(觀音殿)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이기 때문에 오류입니다.
3) 석남암수(石南巖藪)
비로자나불 중대석에서 발견된 영태 2년 명납석제호 명문 중에 석남암수 관음암중 내재여(石南巖藪 観音巖中 在內如)는 석남암수 관음암(石南巖藪 観音巖)에 모셨다로 해석되며, 위 논문과 문병대 박사 논문에는 석남암수(石南巖藪)와 석남암사(石南巖寺)를 혼용하여 쓰며 사찰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① 영태 2년 명 석비로자나불 조상기에 대하여. 김성주. 박용식. 2013년
"‘藪’는 동화사(桐華寺)가 동화수(桐華藪)로 표기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김성주·박용식 교수는 문병대 박사의 주장을 인용한듯하다.
② 지권인 비로자나불의 성립 문제와 석남암사 비로자나불상의 연구. 문병대 박사. 1992
"藪는 숲인데 원래 인도에서 사원의 시초는 이른바 Arama로서 바로 園林(숲)에 있었다. 마을 가까이 있는 언덕이나 숲이 불교 초기에는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후에는 종합 사원인 僧伽藍(Samgarama)으로 승격되는데, 역시 叢林, 즉 큰 숲인 셈이다. 따라서 石南巖藪는 石南巖寺인데, 桐華寺 또는 桐華藪를 같이 쓰고 있는 바와 같이 石南巖藪 또는 石南巖寺를 함께 사용하는 것 같다."
③ 석남암수(石南巖藪)에 대한 임병기님의 견해
"石南巖藪観音巖中 在內如 "(석남암수 관음암중 내재여)
우선, 납석제호 명문은 일반적으로 '석남암수(石南巖藪) 또는 석남암사(石南巖寺) 관음바위(觀音巖)에 모신 비로자나불'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암수(巖藪)를 절(巖寺)로 해석해도 암자(觀音庵)가 아니어서 관음바위(觀音巖)는 어색합니다. 즉, 사찰 부속 암자라면 당연히 암자 암庵(부석사 영산암, 해인사 백련암, 실상사 백장암, 화엄사 구층암, 송광사 불일암, 대흥사 진불암...)이어야 합니다.
수(藪)는 사(寺)와 동의어가 아닌 글자 그대로 바위와 숲으로(암수, 巖藪) 해석하고 싶습니다. 또한 석남(石南)은 지명의 고유명사로, 석남에 있는 바위와 숲으로 해석하면 석남암수 관음암(石南巖藪 觀音巖)은 '석남의 바위가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의 관음바위'로 이해됩니다. 석남(石南)을 석남봉(石南峰), 석남곡(石南谷)으로 판단하면 석남암수 관음암중 내재여(石南巖藪 観音巖中 在內如)는 '석남봉(곡)의 바위와 숲이 우거진 곳에 위치한 관음바위에 모신 비로자나불로 자연스럽게 읽혀집니다.
결론적으로 석남암수(石南巖藪)는 석남암사(石南巖寺) 보다는 석남 깊은 산속으로 생각됩니다. 납석제호 명문 '석남암수관음암중 내재여(石南巖藪 観音巖 中 在內如)'는 위 고문헌 해석을 참고하면 '석남 깊은 산속 관음바위에 모신 비로자나불'로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6. 석탑 부재와 석탑지(石塔址)
가. 석탑 부재
1) 지대석(1) : 장방형의 4매 부재, 지대석 겸 하층 기단 저석
2) 하층 기단(2) : 엇물림 결구로 추정, 저석은 생략
중석(2)-1. 우주와 탱주 1주 모각. 상층기단 중석과 탑신석에 비해 우주와 탱주를 굵게 표현
갑석(2)-2. 일석(추정)이며 약간의 물매가 있고, 내림마루 표현, 2단 굄을 낮게 조출.절수구 표현
3) 상층기단(3)
중석(3)-1. 4 매 부재를 혼합식으로 결구 추정. 탱주 1주, 우주 모각
갑석(3)-2. 1 매석. 부연과 절수구 표현, 약간의 물매. 내림마루. 2단 굄 조출
4) 탑신석(4) : 초층 탑신만 유존, 우주 모각, 상부에 사리공 있음
5) 옥개석(5) : 낙수면 물매가 급하나, 현수 곡선은 뚜렷하지 않으며. 전층 4단 층급 받침과 절수구 표현 풍탁공은 없으며, 1단 굄 조출, 3층 옥개석 찰주공
산포한 석탑 부재를 조합하면 2층 기단의 3층 석탑 입니다. 그러나, 석탑 부재는 비로자나불이 조성되었던 8세기 중엽의 석탑에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라 9세기(9세기 말?) 이후 석탑 양식입니다. 하층기단 탱주 굵기만 생각하면 그 이후 석탑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 합니다. 그렇다면, 비로자나불 조성 당시에는 사찰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기존의 사찰이 화재 등으로 폐사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배제하며, 사지에 남아 있는 유물 기준 입니다). 덧 붙이면 현존하는 지리산 권역(진주.산청.함양.하동.남원.구례)의 사찰(사지) 중 9세기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전하는 가람은 산청 단속사(지),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뿐 입니다. 여기서 8세기 중엽 석탑과 9세기 이후 석탑 양식의 큰 차이를 석남암수 석탑부재를 기준으로 비교하겠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6) 하층기단 중석의 탱주
-. 석남암수 탑부재는 1주
-. 9세기 이전 8세기 중후반 석탑의 탱주는 2주이며 9세기까지 이어집니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탑(7세기). 고선사지 삼층석탑(7세기).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8세기 초)은 3주
8세기 경주 불국사 석가탑. 경주 원원사지 동, 서 삼층석탑, 경주 마동사지 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삼층석탑. 성주 보월동 삼층 석탑 등등 은 2주
9세기 초기 석탑은 2주가 대부분이며 후반에는 1주로 간략화됩니다. 산청 지역의 9세기 탑 중에서 삼장사지 석탑의 탱주는 1주로 석남암수와 동일, 내원사.대포리. 범학리석탑의 탱주는 2주 입니다. 2018년 복원하여 진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범학리 석탑은 하층기단을 잘 못 복원하여 탱주가 생략된 상태입니다.
7) 하층기단 중석의 넓은 탱주
9세기 이전 석탑 하층기단 탱주에 비해 석남암수 부재는 탱주 가 넓게 표현되었으며, 굵기만 고려하면 시대는 내려 갑니다.
8) 상층기단 중석 탱주
- 석남암수 탑 부재는 1주
- 8세기 중엽 이후 9세기 이전 석탑 탱주는 2주, 그 작례는 위에 예시한 석탑입니다.
9세기 석탑에는 석남암수 탱주와 동일하게 1주이며 후반에는 생략되는 예도 많습니다. 위 산청지역 9세기 석탑도 석남암수와 동일하게 1주 입니다.
9) 옥개석 층급 받침
-. 석남암수 탑 부재는 전층 4단
-. 8세기 중엽 석탑 옥개석 층급받침은 전층 5단이며, 위에 열거한 석탑에 나타납니다.
9세기 석탑에는 석남암수 탱주와 동일하게 전층 4단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위 9세기 산청지역 석탑은 동일하게 전층 4단입니다(예외.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전층 5단)
10) 사리공 안치 위치
일반적으로 시기가 빠를수록 사리공은 석탑 상층부에 있으며, 사리공 위치가 석탑 하층이면 시대가 내려옵니다.
-. 석남암수지 사리공은 초층 탑신에 있습니다.
경주 감은사지.7세기. 3층 탑신석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7세기.3층 탑신석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8세기 초. 2층 지붕돌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 8세기 초. 3층 옥개석
경주 불국사 석가탑. 8세기. 2층 탑신석
창녕 술정리 삼층석탑. 8세기. 3층 탑신석
청도 봉기리 삼층석탑. 8세기 3층 탑신석
범어사 삼층석탑. 9세기.초층 탑신석
산청 대포리 삼층석탑. 9세기. 초층 탑신석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탑. 9세기. 초층 탑신석
산청 범학리 3층 석탑(진주 박물관). 초층 탑신석
1~10항 비교를 통해 석남암수 석탑부재는 9세기 말 이후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즉, 766년 관음바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 이후에 조성된 석탑 입니다.
나. 석탑지(石塔址)
사찰의 석탑 배치는 금당 앞에 조성하는 전탑후당(前塔後堂)이 전형입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처럼 전당후탑(前堂後塔)의 경우가 있지만 좌전우탑(左堂右塔) 설도 있으며, 우리나라의 유일한 배치입니다. 그리고 고려초기 산천비보 석탑(영동 영국사 망탑봉. 경주 남산 비파곡 2사지.경주 남산 늠비봉 오층석탑 등등)은 사찰 경내외 암반 위에 조성됩니다. 그런데 석남암수지의 석탑은 사역 최상층에 자리 잡은 전당후탑(前堂後塔)형 배치입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외에는 유례가 없는 배치이며, 고려초에 도입된 풍수 비보형 석탑도 아닙니다.
그 까닭은 766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766년에 봉안된 관음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사찰을 창건하면서 삼층석탑을 최상층에 건립하여 가람 배치의 전형인 전탑후당(前塔後堂)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물론 삼층 석탑 앞 중단 사역에는 불보살을 모신 전각을 배치했겠지만 사찰의 금당은 관음암(觀音巖) 비로자나불입니다. 결론적으로, 석남암수지에 흩어진 석탑 부재의 양식, 석탑지 위치를 고려하면 766년 관음암(觀音巖) 비로자나불을 봉안 후 9세기(10세기) 이후 창건된 사찰로 생각됩니다.
9세기 이후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는 석남암수의 사찰명은 전하지 않습니다. 제 논리라면 암수(巖藪)는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석남( 石南)이라는 고유지명이 유력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창건 이후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1632년에 발간된 진양읍지에 제가 예상한 지명이 들어간 사찰 이름이 등장합니다. 진양지(1632년)에 "본석남사(本石南寺): 덕산의 장당동(長堂洞)에 있더니 폐해진지 오래다."
분명 석남암수(石南巖藪) 또는 석남암사(石南巖寺)가 아니라 본석남사 (本石南寺)이어서 암수(巖藪)는 고유명사가 아닌 깊은 산속이라는 심증이 굳어집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속리산에 본(本)이 들어간 사찰이 있었으므로 본(本)의 의미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초창 때의 사명은 석남사(石南寺)이었으며, 어떤 연유로 폐사 후, 중건하면서 사명을 본석남사(本石南寺)로 하였다는 추정은 가능합니다.
또한, 삼장면 홈페이지에 실린 석남리 지명 유래에는 석남사 관련 내용은 없지만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석남리(石南里)는 본래 진주군 삼장면의 지역으로서 석남이라 하였는데, 윗마을은 상촌 또는 석상, 아랫마을은 하촌 또는 석하라 한다. 마을 가운데 큰 바위들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7.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석남암수(石南巖藪)는 사찰명이라기보다는 석남 깊은 산속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석남암사지로 비정되는 사지에 유존하는 삼층석탑 부재와 석탑지 위치로 판단하건데 766년 관음바위에 석비로자나불 조성 당시에는 사찰이 없었으며, 9세기 이후에 관음바위(觀音巖)의 비로자나부처를 주불로 모시고 삼층석탑을 조성한 후 전탑후당(前塔後堂) 배치의 산지 가람으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건 후 사적은 전하지 않으나 진양지 불우조에 의하면 1632년 이전에 본석남사(本石南寺)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건 시의 사찰 이름은 석남사(石南寺)임을 추론 가능 합니다.
더불어 석남사(石南寺)는 폐사되었지만 산아래 삼장면 석남리 석남 마을은 사찰 이름에서 유래된 동명이며, 아직도 주민들이 본석남사지를 보선암지로 인지하고 있는 까닭은 석남사가 폐사된 뒤 어느 시점에 보선암이 들어서서 근자까지 향화를 피웠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울러, 현장 발굴과 더불어 전공자 들의 현장 답사, 심도 있는 검토와 논의를 거쳐 석남암수(石南巖藪)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으면 좋겠습니다.(2020.03.15)
출처(선과님 블로그) : https://blog.daum.net/12977705/8726696?category=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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