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비문정려

효열부김해김씨사적비(孝烈婦金海金氏事蹟碑)

도솔산인 2021. 11. 4. 06:06

효열부김해김씨사적비(孝烈婦金海金氏事蹟碑)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陽丁마을(삼정리 산 35-5번지)

행적자 : 김해김씨   연대 : 1978년

 

[개요] 부군이 생감을 먹다가 급체로 죽음에 부인께서 부군을 따라간다고 목을 매어 죽는다고 몇 차례 하였음. 이 비석은 효부 열녀의 행실을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1929년 당시 각 유림단체에서 인정하는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에 의해서 건립한 것이다.

 

孝烈婦金海金氏事蹟碑

 

謹按經學院表彰文에 孝烈婦 金海金氏가 있으니 부인은 文敏公 후손 휘 익손의 맏따님으로 平山人 장절공 후손 申龍會 호 松雲의 처이다. 부인이 시부모에세  정성으로 효양하고 이웃에게 돈후하니 이웃간에 모두 賢婦임을 칭찬하였다. 부인이 28세 때 부군께서 생감을 자시고 急滯로 逝去함에 갑작스레 당한 痛嘆之事라 수일을 애통해 하다가 차라리 이렇게 슬프게 외로이 살바에야 죽어 부군을 따라감이 옳다고 하고, 뒷 골방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려는데 때마침 시숙모에게 발각되어 수시간 후 소생하였다. 그러나 부군 喪을 치른 후에도 몇 차례 자결하려 하였으나, 온 식구들이 끈질긴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도 부녀자는 三從之道를 따라야 한다고 부군 따라감을 주장하였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婦道를 닦은 훌륭한 孝烈婦의 행실은 향리에 널리 퍼져 반듯이 旌閭閣을 지어 새겨서 부녀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런 훌륭한 孝烈行이 세월의 흐름이 장구함에 따라 차차 인멸될까 염려하여 부인의 종손 禹煥이가 나에게 찾아와 비문을 청함으로 내 不文으로 사양하다가 그 효열사실이 거룩하여 몇 글자를 적어 후세 부녀자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도다.

 

서기 1978년 무오 5월  일

 

驪陽 陳永達 撰

 

褒彰完議文

 

本訴刱建先聖廟 重刊五倫行實 以爲存聖獎善 而列郡單子 次第來到中 謹按慶南有司及多士薦狀 則本道咸陽郡馬川面三丁里 烈行金海金氏 文愍公諱馹孫後貴眞女 平山人壯節公後 左議政諡文僖十四世孫 贈吏曹參議諱義元孫 贈嘉善諱權子 申龍熙號松雲妻也 生長禮家夙著閨範矣 及適人克執婦道誠事 舅姑敬待君子治家之節 必勤必儉敦族而族宜 交隣而隣厚 伊來二十年間 舅姑俱沒喪葬助夫 營辦極備稱禮哀泣過度 弔者莫不感歎 家運孔否 夫君以柹蔕 卒然永逝變出急遽之地矣 夫人夭心終一之義入後房 結項之際 適其媤叔母見 而急救自午至夜得甦 迺於終喪之夕 亦自裁未果意 謂從夫殉節 自有素定也 奉先育子永保門戶守貞全節 其子眞守克奉母儀孝篤行善 而悲其母懿蹟之無聞 願得士林之公儀師達 鄕校校宮僉員感其烈行 輪布各道郡 同聲讚揚於是 及聞本所先付鋟梓壽傳芳名 使之繼建閣碑廣樹 美風以圖 不朽之意 成此完議文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年 己巳三月 日

 

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

都約長 創立約長 代表 先聖廟 都有司 鄭成黙

約長 前判書 李載現

判書 閔京鎬 判書 閔丙漢 判書 南奎熙

參判 權益相 參判 李明翔 參判 李舜夏

參判 金在珣 參判 魚瑢善 參判 韓昌敎

待敎 閔厚植 承旨 申斗熙 參書 李秉賢

事務約長 參奉 李悳圭 直員 權寧萬 直員 李承鉀

主事 李鍾八 講師 吳載權 正字 韓熙元

講師 朱用瓛 主事 閔泰稷

京畿道都有司 承旨 李胤鍾 忠淸道都有司 直員 成樂冕

全羅道都有司 議官 李冕植 慶尙道都有司 講師 曺鎭英

江原道都有司 直員 金鳳柱 黃海道都有司 參奉 李丙直

平安道都有司 幼學 鄭桓淳 咸鏡道都有司 主事 李達勳

 

  유림 향약 본소에서 공자의 사당을 세우고, 오륜행실을 다시 간행하여 성현을 존중하고 선행을 장려하던 중, 이번에 여러 고을에서 도착한 단자들 중에서 경남 유사와 많은 선비들이 보내 온 추천서를 삼가 살펴보니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열녀의 행실을 실천한 김해김씨가 있다. 김해김씨는 문민공 김일손의 후손 귀진의 따님이고, 평산인 장절공 14세 후손인 좌의정 시호 문희의 후손이고 증직 이조참의 휘 의원의 손자이며, 증직 가선 휘 권의 아들 송운 신용희의 아내이다.

 

예의 바른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찍이 규수로서의 모범을 갖추었으며, 출가 하여서는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정성스레 행하는데 지극하였다. 시부모를 공경으로 모시고 군자가 집안을 다스리는 범절대로 반드시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집안을 돈독히 하고 이웃에게는 후하게 하였다. 20년이 지나자 시부모 모두가 세상을 떠남에, 남편을 도와 장례를 힘들여 지내고,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는데 슬픔과 눈물이 과도하여 조문하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의 운세가 기울고 남편이 감에 체해서(막혀서) 홀연히 돌아가시어 급박한 지경이 되었다. 부인께서는 일찍 죽을 마음(夭心)으로 끝내 한가지 뜻을 품고 뒷방에 들어가서 목을 맸을 때에 마침 숙모가 지나다가 보시고 급히 구원하여 낮에서 밤까지 소생시켰다. 喪을 마친 저녁에 이르러 또한 자살을 시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편을 따라 순절하려고 한 것은 처음부터 본래 작정된 일이었다고 한다.

 

선조를 받들어 모시고 자식을 길러 정조와 절개를 지켜 문중을 오래도록 보전하였다. 그 아들 진수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효도를 돈독히 하고 착한 행동을 실천하고 그 어머니의 아름다운 자취를 남들이 들어 알지 못함을 슬퍼하였다. 사람들의 공론과 사달을 얻어 향교와 고을 문묘 모든 회원들이 그 열행에 감복하여 각도와 군이 한 목소리로 이를 찬양하여 알리고자 하였다. 향약 본소는 먼저 책을 간행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오랫동안 전하고, 이로 하여금 비각을 건립하고 비를 세워 미풍양속을 널리 펴서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뜻으로 이 완의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공부자탄강 2470년(1929년) 3월 일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행실 중간 연원유림향약본소

도약장 창립약장 대판 선성묘 도유사 정성묵

약장 전판서 이재현 등

판서 민경호 판서 민병한 판서 남규희

참판 권익상 참판 이명익 참판 이순하

참판 김재순 참판 어용선 참판 한창교

대교 민후식 승지 신두희 참서 이병현

사무약장 참봉 이덕규 직원 권영만 직원 이승갑

주사 이종팔 강사 오재권 정자 한희원

강사 주용환 주사 민태준

경기도도유사 승지 이윤종 충청도도유사 직원 성낙만

전라도도유사 희관 이만식 경상도도유사 강사 조진영

강원도도유사 직원 김봉주 황해도도유사 참봉 이병직

평안도도유사 유학 정환순 함경도도유사 주사 이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