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 취재 산행(200515~17)

도솔산인 2020. 5. 22. 06:38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 취재 산행(200515~17)

 

 

▣ 일 시 : 2020년 05월 15일(금)~ 17일(일)

▣ 코 스 : 새재-상류암터-청이당-구롱-방장문-집터-청이당(회귀)-행랑 굴(마암)-영랑대-청이당-상류암터-새재

▣ 인 원 : 一丁 민선생님, 休休子 趙龍憲박사, 山影 曺박사,  狂狂子 銷魂, 완폭대 조봉근, 가야산 정혜종, 土山 칠성님

▣ 날 씨 : 첫날 비, 흐리고 맑음

 

 

지난달 4월 21일 대둔산 석천암 천산 스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석천암에 있는 일엄(一广)의 마애 석각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에 대한 자료를 보내달라는 것과, 오후에 조선일보 주필&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가 석천암에 온다는 이야기였다. 일엄(一广)의 석각에 대한 자료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석천암을 향했다. 첫 만남이지만 글로 이미 만난 분이라 어색하지 않았다. 조박사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이 올랐다는 영랑대를 안내해 달라고 제안하였고, 화랑과 영랑대에 대한 이야기 나누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석천암에서 내려왔다.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15일, 16일이 하필(何必)이면 비 소식이다. 그래도 일정대로 산행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금요일 아침 익산으로 내려가 조용헌 박사를 픽업하여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려 지리산으로 향했다.

 

☞ 대둔산 석천암 마애 석각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에 대하여 : blog.daum.net/lyg4533/16488300

 

지리산 영랑대는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에서 유래한 곳이다. 영랑은 금강산뿐만 아니라 속초 영랑호 등 여러 곳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문헌에서 지명의 유래가 남아있는 곳은 지리산 영랑대뿐이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영랑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암(행랑굴)과 말봉(1617.4봉)은 화랑 영랑이 말을 타고 올라와 말을 매어둔 곳으로 구전이 전해진다. 이번 산행은 화랑의 훈련장으로 추정되는 청이당 터에서 영랑과 점필재가 올라온 아홉 모롱이(九隴 구롱) 길과 마암을 둘러보고 영랑대에 오르는 것이다.

 

청이당에 배낭을 데포 시키고 역으로 마지막 구롱(쑥밭재)을 넘어 아홉 모롱이 길로 나아갔다. 지난 3월 춘설이 내리는 날부터 구롱 길은 여덟 번째 답사이다. 이 길을 통해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관료와 사대부, 유생들은 물론 민초들까지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로 이용하였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군사와 백성들이 신라에 대항하였던 마지막 항전지로 추정한다. 주변에 산재(散在)한 창암성과 추성, 박회성, 사근산성, 독녀성과 왕등재성 등으로 미루어 금관가야 멸망(532년)의 비밀이 숨어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길을 맨 처음 구축한 사람들은 가야 인일 가능성이 높다. 가야를 합병한 신라는 청이당과 동부(洞府, 사립재골)를 화랑도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그 흔적이 지금 영랑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번에 동행한 완폭대 조봉근 씨는 그동안 완폭대와 은정대 마애 성명 석각 외에도 다수 석각을 발견한 촉(觸)이 남다른 역사문화 조사단 선수이다. 구롱 길에서 여덟 모롱이에 거대한 석문이 있는데, 양쪽 바위의 상단이 서로 맞닿아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선두에서 산영 曺박사님과 완폭대 조봉근 씨의 '대박! 대박! 대박!' 하는 환호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한다. 서둘러 가보니 커다란 석문 상단에 예사 글씨가 아닌 듯, 필획이 반듯하고 옹골찬 '방장문(方丈門)' 석각이 있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그로 하여금 이끼를 벗겨내게 하여 바위 전면(腹)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여기에서 '題名'은 용례상 일반적으로 명승지에 동행한 사람의 성명을 새긴다는 의미이다. 처음에 김종직 선생이 방장문(方丈門)이라고 명명하고 그 이름을 유호인에게 새기게 했다는 의미는 아닌지 상상해 보았으나, 강정화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점필재 선생이 애매한 문구를 남겼을리 만무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 '題名'은 일반적으로 명승지에 동행한 사람의 성명을 새긴다는 의미로 쓰인다. '題名'에서 名을 유람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방장문(方丈門)으로 볼 수 없다. 名을 방장문(方丈門)이라고 지칭하였다면, 앞서 그에 대한 설명이 있거나, '각방장문삼자(刻方丈門三字)'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금강산 등 여러 유람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쓰기이다. 방장문(方丈門)은 후세인(後世人)의 각자로 추정된다. (강정화 교수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아홉 모롱이 길의 사거리 집터까지 돌아보고 청이당으로 회귀(回歸)하였다. 마암의 유래는 화랑 영랑이 말을 타고 올라와 말을 매어두던 곳으로, 쉽게 풀이하면 주차장이고 마구간이다. 1610년 박여량이 이곳을 행랑굴이라고 한 것은 마암의 유래가 아닌 오버행 바위의 형태에 대한 설명이다. 오늘은 행랑굴이 아닌 마암에서 물을 취수하여 영랑대로 향했다. 하봉 동릉 초입 무덤을 지나는데 석양의 빛이 수상하다. 앞에서 소혼이 여러 번 불러 잰걸음으로 올라가니, 진달래가 석양빛을 받아 붉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가야의 정복자 영랑이 되어 보무당당(步武堂堂)하게 영랑대에 오르니, 개선장군(凱旋將軍)을 환영이라도 하듯 진달래와 석양빛이 휘황찬란(輝煌燦爛)하다. 언젠가는 나도 이곳에 오를 힘이 없는 날이 오겠지만, 영랑대로(永郞大路)와 점필재(佔畢齋) 길을 좇아 영랑대에 오르는 것은, 오직 심신이 강건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청운(靑雲) 조용헌(趙龍憲) 선생의 말씀대로 매주 지리에 들어 침석수천(枕石漱泉)하는 나는 일엄(一广)보다 나은 상팔자가 아닌가. 끝.

 

☞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두류산록에 나오는 石門 : blog.daum.net/lyg4533/16488305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 서쪽에 있는 대
상류암 터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 서쪽에 있는 대
방장문(方丈門)
方丈門 石刻

1.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아홉 모롱이 길에 있는 석각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희귀한 이체자이다. 서예대자전에서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행서와 서자불명(書者不明)의 예서에 보인다. 방장문(方丈門) 필획의 주인과 석각의 연대는 미상이지만 양명학이 조선에 들어온 이후에 양명학을 신봉하는 사람의 필획이 아닐까.

 

2. 方丈의 어휘에 대한 유래

 

1)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지리산에 대한 설명

"杜甫詩所謂方丈三韓外註及《通鑑輯覽》云: "方丈在帶方郡之南。是也。(두보의 시에서 말한 '방장산은 삼한 외지에 있다'라는 구절과 《통감집람》의 '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2)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國。方丈卽智異山瀛洲卽漢挐山蓬萊卽金剛山也。"(두보의 시에 있는 '방장은 삼한의 외지에 있다'는 구절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나라(조선)에 있다.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한라산, 봉래산은 금강산이다.'라고 한다.)"

 

[출처] [관광자원해설] 국립공원 정리

 

 

1610년 박여량 행랑굴, 1871년 배찬 마암, 1877년 허유 개운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