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이의국(李義國)

도솔산인 2019. 8. 11. 09:25

♣ 이의국(李義國), 1867 ~ 1935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치인(致仁), 호는 이운(二雲)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後谷里) 출신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부원군(府院君) 이광정(李光庭)12세손이다. 1888(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1890(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삭주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919년과 1926년에는 국장(國葬)에 참여하여 마지막 신절(臣節)을 다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백의(白衣)하여 국운을 한탄하였다. 또한 육영에 뜻을 두어 학교를 신축하고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를 설립하여 신구학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며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썼다. 묘소는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있는 8대조 연릉군(延陵君) 선영(先塋) 아래에 있다.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

용흥초등학교로 변경되었으나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어 폐교된 학교이다. 용흥초등학교는 대전군 북면 미호리 구리고개와 문의면 후곡리, 삼정리의 경계 사이에 있었던 학교이다. 원래는 1900년대 초반에 용흥강습소에서 시작되었다. 후곡리는 대대로 연안이씨 집안이 세거하였던 향촌(鄕村)으로서  인구 조사시에 15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후곡리는 연안이씨 중 태자첨사공파  해고 이광정의 후손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동네이다. 그 중 이광정의 후손중 이의국(李義國)이란 사람이 문과 급제 후에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고, 후에 일제시대에 비분강개 하여 관직을 던저 버리고 낙향(落鄕) 왔다고 한다. 이때에 시골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용흥강습소를 설치 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용흥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후에 이 용흥초등학교는 대청댐의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었다. 이 후곡리라는 곳은 석오 이동녕의 조부가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이의국이라는 사람은 삼정동의 연산현감이었던 강침의  묘표를 글로 썼다후곡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긴 것은 조선시대 16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곳에 정착한 사람 중에 이성징. 연안인 이성징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호가 후곡이다. 그래서 후곡리라는 마을이 생겨난 것이다. 후곡리는 연안인이 세거한 이후로 일대의 자연마을 지명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처음엔 박씨가 살았다 하여 박달봉이라고 부르던 봉 이름이 이달봉으로 변하였으며, 연안인중에 초시에 합격한 진사가 살았다 하여 진사골이라고도 불리었다. 1600년대에 이 곳에 정착한 연안인은 속설에 의하면 이모작을 준비하는 시험으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생각하였다가. 조선에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일어난 전쟁은 조.청전쟁이다. 원래 고향은 태자첨사공파가 파주에 묘역이 있는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파주 지역에서 정착 한듯 싶다. 이성징이란 사람은 대동기문에서 전하기를 할아비 급제자라는 말이 있다. 과거 급제를 치르기전에 손자뻘 되는 사람이 나이 묵어 웬 급제냐고 농을 던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