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지산유고 1896년 6월 尙州獄(상주옥)

도솔산인 2019. 9. 7. 12:22


지산유고 1896년 6월 尙州獄(상주옥)


1896년 3월 말 김산 의병장 이기찬 선생은 의병을 이끌고 황간 영동 보은을 거쳐 문경 대정(大井)으로 이동하여 함창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반대를 하자, 선생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라고 하고, 4월 3일 대장직을 진사 조동석에게 전임하고 금천으로 돌아왔다. 그 해 6월 지산 이기찬 선생의 장자 이강하 선생이 상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은 내용과 진사 조동석 선생의 부자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한 기록이 지산연보에 나와있다. 



▶지산유고 창의일기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八日


 二十八日。移陣于聞慶大井。去倭站才五十里。招諭諸將曰。吾輩用兵出於不已。而志在撥反。撥反不得。則非徒無益。此去彼站不遠。諸軍其從我進取乎。皆曰。彼强我弱。鋒不可當。俄而濃雲密布。雨下如注。非進趨之時也。


 삼월 이십팔일 陣(진)을 聞慶(문경) 大井(대정)으로 옮겼다. 倭(왜)의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겨우 五十里(오십리)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효유하기를 '우리들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로 돌리는데 있었다.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으로 돌릴 수 없으면, 다만 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과 저들(倭軍)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제군들은 나를 좇아 나아가 왜적들을 취하겠는가?'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퍼지고 비가 억수같이 내려 군사가 前進(전진)할 때가 아니었다.


* 대정(大井) :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종곡3. 한우물이라고도 함. ‘큰 샘이 있어 한우리혹은 대정(大井)이라 불렸다고 함.


○ 丙申年(1896년) 四月 初三日
 初三日午刻。聯投三單于本陣。則士卒有呼泣者。軍官有等訴者。豈可以呼訴爲哉。傳任于趙進士東奭。退宿于大院庵。時有康模·康羲二侄來侍。


 사월 초사흘 오시 연이어 세 개의 單子(단자)를 本陣(본진)에 보냈니 사졸 중에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우는 사람이 있었으며, 군관 중에 같이 호소하는 자가 있었다. 어찌 호소하여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 大將職(대장직)을 進士(진사) 趙東奭(조동석)에게 傳任(전임)하고 물러나 大院庵(대원암)에서 묵었다. 때에 康模(당질) 康羲(강희) 두 조카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


* 趙東奭(1845~1896) 본관은 풍양(豐壤) 자(字)는 국필(國弼) 호(號)는 국은(菊隱), 구은(九雲)이며 이명(異名)은 동호(東鎬) 경북 상주(尙州) 출신 의병장 18962월 이기찬(李起燦허위(許蔿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경북 김산(金山)에서 거의하여 군문도총(軍門都摠)을 맡아 경북 ·김천(金泉금릉(金陵) 황간(黃澗) 영동(永洞) 보은(報恩) 상주(尙州) 등지에서 활동을 함. 4월 3일 이기찬 의병장의 후임으로 대장직을 맡아 활동을 계속하다가 그해 6월 상주 감영에 피체되어 순국함(1896.6.17).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지산유고 연보(상주옥)


▶지산유고 연보


○ 병신년(1896년) 6월


○六月。長子康夏逮繫尙州獄。時參領李謙濟具極刑以鞠之。供曰。臣爲君死。子爲父死。實所甘心也。未聞以子證父拘之而自免也。且令監獨非世祿之臣乎。自我國母見弑。環東土臣民。孰不欲食 其肉寢其皮也。爲士而應衆所推罪乎。爲臣而敵王所愾逆乎。受密詔而討賊馬。雖敗而伸義。構讒言而收斬岳。何罪於爲將。李又問。稱以義兵討財民間。非强盜而何。供曰。不須借吾唇舌。査問處距。此皆不遠也。那時軍餉自有出者。本州鄭宜默趙南奭黃澗李容直諸公。皆出義願助也。供訖嚴枷下獄。將不日正刑。時趙公父子被逮。罵賊不屈而死云。方大張搜詗而實如所供。自花山府有關文來照參領所曰。尙州義將李某。其出也有據。其止也有辭。如所否者。我自當之云。時觀察使李公南珪。深知先生。而身擔其事。自爲文以保之。事遂寢。若於其時。小有疑迹。難保矣。



[1896] 6월 장자 강하(康夏)가 체포되어 상주 옥에 수감되었다. 때에 참령(參領) 이겸제(李謙濟)가 극형의 형구를 갖추고 국문(鞠問)하였다. 공초(供招)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죽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은 진실로 제가 원하는 마음[甘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 대해 증언하여 붙잡히게 하고 자신의 죄는 면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영감께서는 특히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가 아닙니까? 우리 국모께서 시해를 당했을 때부터 우리나라 전체의 신민 중에 누구나 왜놈들의 고기를 씹어 먹고 왜놈들의 가죽을 깔고 자고 싶지 않겠습니까?. 선비가 되어 대중이 推罪하는 바에 호응할 것이며, 신하가 되어 임금께서 분개하시는 역적에 대적할 것입니다.(선비가 되어 대중(여론)이 추죄하는 것에 호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신하가 되어 왕께서 반역에 분개하신 것에 대적하려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임금의 밀조를 받고 적마를 토벌한 것은 비록 패했지만 의리를 펼쳤습니다. 간신들이 참소하는 말을 지어내어 충신 악비(岳飛)를 참수하라는 건의를 받아들이니, 장수가 된 것이 무슨 죄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이겸제가 또 묻기를, “의병이라 사칭하고 민간에서 재물을 토색하였으니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자 공초하기를, “반드시 저의 진술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사하고 물어볼 곳은 모두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당시 군량을 스스로 낸 이들은 우리 주[尙州]정의묵(鄭宜默)조남석(趙南奭)과 황간(黃澗)이용직(李容直) 등 여러 공들이 의리를 내세워 돕길 원한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초가 끝나고 엄하게 가쇄를 채워 하옥하고 장차 머지않아 사형을 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조공(趙東奭) 부자도 피체되었는데, 역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수색과 염탐을 크게 하였지만 사실이 공초한 내용과 같았다. 안동부[花山府]로부터 참령의 관부[參領所]로 보내온 관문(關文)이 있는데 그 내용에, “상주 의병장 이 아무개[李起璨]는 그가 나선 것에도 근거가 있고 그가 멈춘 것도 내세우는 말이 있다. 만약 사실과 어긋난 일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감당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관찰사 이남규(李南珪) 공은 선생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자였는데, 이 일을 몸소 맡아 글을 지어 보호해주니 이 사건은 결국 종결되었다. 만일 그때 혐의쩍은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경상대 최석기 교수님 교열)


逮繫 : 붙잡아서 옥에 가둠. 唇舌 :말. 언사. 입술 혀. 참령(參領) : 갑오개혁 때 개편된 군제에 따라 신설된 무관직.12계급 중 제6위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상위직인 부령(副領)과 하위직인 정위(正尉)의 중간에 위치하며 품계는 3품으로 소령에 해당됨. 讒言 : 거짓으로 꾸며서 다른 사람 헐뜯어 일러바치는 말. 岳飛 : 중국 남송(南宋)의 무장(1103~1141). 자는 붕거(鵬擧). 금나라에 대하여 주전론(主戰論)를 펴다 재상 진회(秦檜)의 참소로 옥사함. 搜詗 : 수색하고 염탐하다. 疑迹 : 의심스러운 흔적. 花山府 : 안동. 闕文 : 조선 시대에, 동등한 관부 상호 간 또는 상급 관부에서 하급 관부로 보내던 공문서. 來照 : (송부되어 ) 조회문().辭 : 왕명을 이르는 말. 所否者 : 도리에 어긋난 짓.  



▶지산유고 행장


釋兵後上京陳踈。且還書戒。不肖曰。方今義賊無分。忠逆相倒。汝其愼處也。居月餘不肖果逮繫尙州獄。觀察使李公南珪移文于參領李謙濟曰。尙州義兵將李某。其出也有據。其止也有辭。以此獄遂解。盖李公平日深知府君。故自爲文以保之也。


의병을 해산한 후에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고 또한 돌아와 불초()에게 를 써서 이르기를 바야흐로 이제 의병과 도적이 구분이 없어 충성과 역적이 서로 뒤바뀌니 너는 신중히 처신해야 한다.’ 라고 하셨는데, 한 달 남짓 지난 뒤에 불초가 과연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구금되었다. 당시 안동 관찰사 이남규공이 참령 이겸제에게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상주 의병장 李某(이기찬)는 그가 나온 것고 근거가 있고 그가 멈춘 것도 내세우는 말이 있다.' 라고 하여, 이 때문에 감옥에서 드디어 풀려났다. 대개 이공은 평소에 부군을 깊이 아는 사이로 몸소 글을 지어 보호해준 것이다.



* 李兼濟(1867~1947) 구한말 무관. 개화파의 일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냄. 일본식 이름 후쿠다 겐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명 명단에 포함됨.

* 鄭宜默(1847~1906) 본관은 진주(晉州) 우복 정경세의 봉사손(奉祀孫) 문과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와 경연참찬관을 지냄 1894년 상주 소모사로 동학군을 토벌함.

* 趙南奭 :

* 李容直(1824~1909) 본관은 전주 고종의 인척 경상도관찰사 파직 후 죄인의 몸으로 김천 부항면 홍심동에 은거함. 김산 의병에게 200금과 正租(벼) 80석을 내놓음.  

* 李南珪(1855~1907) 본관은 한산. 자는 원팔, 호는 산좌·수당. 허전(許傳)의 문인. 1875년 사마시에 합격. 승문원권지부정자·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함.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일본군에게 압송당하던 중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충구와 함께 피살됨.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