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지산유고 창의일기와 연보에 나오는 黃岳寺(황악사)

도솔산인 2019. 9. 8. 10:38

지산유고 창의일기와 연보에 나오는 黃岳寺(황악사)


1896211일 김산(김천) 향교에서 거의한 김산의병은 김산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하고 군대의 진용을 갖추었으나, 217일 구성에서 관군과 접전하여 패퇴하고 흩어지게 된다. 지산 이기찬 선생은 김산의병 지도부(유도섭, 조동석, 허위 등)를 만나 다시 거의 하기로 약속을 하고, 227일 김천 黃岳寺(황악사) 종각에 모여 대회를 열고 재차 창의를 하는데, 그 내용이 지산유고 창의일기와 연보에 나와 있다. 이런 와중에도 의병진에 가담하여 運粮官(운량관)守門官(수문관)이라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 군자금을  빼돌려 사적으로 이익을 취하다가  들통이 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黃岳寺(황악사) 종각에서 대회를 열고 재 擧義(거의)를 한 날짜는 양력으로 1896년 4월 9일(음력 2월 27일)이다.

* 黃岳寺(황악사) : 김천 황악산 직지사를 가리킴.

    

현직지사 종각 황악루(펌)

 

지산유고 창의일기 

丙申年(1896년) 二月 二十五日。與同志行到板溪。遇姜兄林仲·李兄世叔。皆非草間求活之士也。半晌論心。叩鄭友武卿家。不謀同參者。四十餘人乘夜疾馳。至直指寺洞口。時宿務漫天日已數竿矣。

이월 이십오일 同志(동지)들과 함께 가서 板溪(판계)에 이르러 강형 姜兄(강형) 林中(임중)李兄(이형) 世叔(세숙)을 만났는데 다 民間(민간)에서 욕되게 삶을 구하는 선비들이 아니었다. 반나절 생각을 이야기하고 친구 정무경의 집을 두드렸으나 동참을 도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四十餘人이 밤을 틈타 빠르게 달려 直指寺(직지사) 洞口(동구)에 이르렀다. 때에 宿所(숙소)에서 하늘의 태양에 넘쳐흐를 정도의 여러 개의 장대를 마련하는데 힘썼다. 

·板溪:상주시 모동면 판계리草間:풀이 무성한 들판 사이. '민간'을 이르는 말草間求活:민간에서 삶을 구함. 눈앞의 안일만 탐내며 되는대로 살아감. ·半晌:잠깐, 반나절 ·天日:, 태양.


丙申年(1896) 二月 二十六日。黃岳寺呂永昭諸人。已宿招提而待 

이월 이십육일 黃岳寺(황악사)에 들어갔다. 呂永昭(여영소) , 여러 사람들이 이미 절에서 묵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 呂永昭 : 呂永祚.·招提:사방의 중들이 모여 사는 곳. . 寺院(사원). 伽藍(가람) 官府(관부)에서 賜額(사액)한 절


丙申年(1896) 二月二十七日開坐於鐘閣以梁濟安爲中軍趙東奭爲都摠姜懋馨爲贊劃許蔿爲參謀李時佐·呂永昭爲書記尹鴻采以先鋒兼組練將編伍儒兵三十餘 火砲兵五十餘運粮官朴鳳汝私囑守門官文在善以二百金納交於中營中營笞而却之其廉如此

 이월 이십칠일 黃岳寺(황악사) 鐘閣(종각)에 앉아 대회를 열고 梁濟安(양제안)中軍(중군)으로 삼고, 趙東奭(조동석)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贊劃(찬획)으로 삼고, 허위를 參謀(참모)로 삼고, 李時佐(이시좌) 呂永昭(여영소)書記(서기)로 삼고, 윤홍채를 先鋒(선봉)組練將(조련장)으로 삼아 隊伍(대오)儒兵(유병) 삼십여 명 火砲兵(화포병) 오십여 명으로 편성하였다. 運粮官(운량관) 朴鳳汝(박봉여)守門官(수문관) 文在善(문재선)에게 私的(사적)으로 부탁하여 二百金(이백금)中營(중영)에서 주고받으니, 中營(중영)에서 볼기를 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 청렴함을 이와 같이 하였다.

· 中軍:삼군의 중앙 대장군이 있는 곳. 장군의 명칭. · 都摠:군무를 총괄하던 최고 군직. · 贊劃:기획.



지산유고 연보 

二十七日壬辰大會于黃岳寺義士雲集衆望所推咸曰大將之任於先生不可乃三讓后登壇誓告于衆以趙東奭爲軍門都摠姜懋馨爲贊畫許蔿爲參謀將李時佐呂永昭爲書記梁濟安爲中軍尹鴻采爲先鋒草檄通于列邑士林及義陣

227일 임진, 黃岳寺(황악사)에서 크게 모여 의사들이 운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망을 받아 대장으로 추대하여 모두 선생에게 대장의 소임을 맡으십시오.’라고 하자, 불가하다고 3번 사양한 뒤에 단에 올라가 많은 사람에게 誓告하기를 趙東奭(조동석)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贊畫(찬획)으로 삼고, 許蔿(허위)參謀將(참모장)으로 삼고, 李時左 呂永昭(이시좌, 여영소)書記(서기)로 삼고, 梁濟安(양제안)中軍(중군)으로 삼고, 윤홍채를 선봉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격문과 통문을 작성하여 열읍(列邑)의 사림과 의진에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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