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지산유고에 나오는 천운정과 이병선 이길령 父子

도솔산인 2019. 8. 10. 14:02

지산유고에 나오는 천운정과 이병선 이길령 父子


  지산 연보와 행장에 나오는 雨生 李炳善(1856~1932)은 식산 이만부의 6대손이고, 正弼 李吉寧(1876~1903)은 7대손이다. 지산선생은 1889년 義興(군위군 우보면 나호동)에서 속리산 자락 천탁산 아래 금천(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으로 이사를 한 후, 스스로 錦樵散人이라고 일컫고 은거를 한다. 이 때가 선생의 나이 38세로 선산, 강좌(낙동?), 충북 문의 등에서 제자들이 들어오는데, 선산 산동의 錦坡申公, 江左(낙동?)에서 芝栖金公의 아들, 상주 외답에서 식산 이만부의 7대손 이길령, 그외에 여영훈, 김건수, 라용희, 이성식, 충북 문의에서 이해구, 이의립이다. 李吉寧(1876~1903)의 父 李炳善(1856~1932)과의 관계를 행장에서 '상주의 외곽 북쪽에 李炳善이 있었는데 호는 雨生(字舜華?)이다. 부군께서 平生知己를 허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二江 萬植(1860~1926), 香叔 鄭蘭時(1850~1910)와 절친(切交)이라는 기록이 보인다.(행장 : 二江萬植鄭公蘭時皆切交也) 止山遺稿二 書에 이 세 분에게 보낸 簡札이 여러 편 있다.



1. 지산 행장


己丑冬除朞服. 絜家移寓尙州西錦川.(泰奉公嘗曰 吾家本宗室懿親. 南落遐土甘作渡淮之枳. 汝等其念之. 府君思以今不必更入畿甸. 遂遯俗離山中. 自號錦樵散人)

      

기축년(1889, 37) 겨울 1년 복을 벗고 가족들을 데리고 상주 화서 금천으로 移寓하였다.(태봉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왕족의 의친이다. 남쪽으로 한양과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낙향하여 달갑게 회수를 건넌 탱자가 되었다. 너희들은 그것을 기억해야한다.’라고 하셨다. 부군께서는 지금 반드시 다시 畿甸(京畿)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속리산 속에 은둔하고 자호를 금초산인(錦樵散人) 이라고 하였다)

 

遐土 :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甘作 : 아무 불만 없이 어떤 일을 달갑게 받아서 하는 일. 渡淮之枳

 

尙之郭北. 李公炳善號雨生. 府君許以平生知己. 至是頻數從遊. 殆無虛歲. 柳二江萬植, 鄭公蘭時皆切交也. 是時遠近士林多歸. 錦坡申公. 自山東移住. 芝栖金公. 自江左送子. 李吉寧 呂永勛 金健秀 羅容熙等. 皆以此時登門也.

 

상주의 외곽 북쪽에 李炳善이 있었는데 호는 우생이다. 부군께서 平生知己를 허락하여 여기에 이르러 자주 從遊(*)하며 殆無虛歲 : 거의 빠진 해가 없었다. 이강 유만식(1860~1926)공과 정공 난시(1850~1910)와 다 절친한 사귐이었다. 이때에 원근의 선비(士林)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錦坡 申公은 구미(선산) 산동에서 이주하였고, 芝栖(?) 金公江左에서 아들을 보냈고, 이길령 여영훈 김건수 라용희 들이 다 이때 문하에 들어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2. 지산연보

 

高宗二十八年辛卯先生三十九歲雨生李公炳善來會。○ 謹次息山李先生天雲亭板上韻。○ 夏文義李海九李義立來學

[1891] 고종 28년 신묘, 선생 39, 우생 이병선 공이 찾아와서 만나다. 息山 이만부선생의 천운정 판상에 차운하다. 여름에 문의 이해구와 이의립이 來學하다,

 

천운정사  

천운정사는 상주시 외답동에 자리한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현종5)~1732(영조8)]의 정자이다. 중부내륙고속국도 상주 IC를 빠져 나와서 시내 쪽으로 약 200미터 가다가 좌회전하여 마을 안으로 올라가면 식산이 나오는데 천운정사는 그 식산 아래에 있다. 식산 이만부는 1697년에 서울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천운정을 짓고는 독서와 교육, 선비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정사의 원래 이름은 천운당으로 1700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천운당보다는 천운정으로 널리 알려졌다. 1846년과 1892년에 중수하였고, 18935월에는 천운당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사림에서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高宗三十年癸巳先生四十一歲李吉寧書問。○ 余樂堂重修記成。○ 李性稙羅容凞來學

 

[1893] 고종 30년 계사, 선생 41, 이길령 書問에 답하였다. 木川 西里 여락당 중수기를 지었다. 이성직 라용희 들이 와서 배웠다.

 

李吉寧(1876~1903) : 본관 연안 부 李炳善(1856~1932) 號 正弼 지산 선생의 문인 식산 이만부선생의 7대손(이길령 선생 증손 문경거주 이용덕 010-2879-4102)

  

李萬敷 1664(현종 5)~1732(영조 8)

조선 중기~후기에 활동한 실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조부는 이조판서 이관징(李觀徵)이고, 부친은 학문과 서예로 이름난 예조참판 이옥(李沃)이다. 모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이름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이만부는 19세에 의성김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 되던 1690년에 사별하였고, 이듬해 유성룡의 증손녀를 재배(再配)로 맞았다. 이처럼 친가 · 외가 · 처가가 모두 당세의 명문가였으며, 학문은 가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7 · 8세부터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67815세 되던 해에 부친 이옥이 송시열과 예론으로 갈등을 빚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이를 통해 험악한 벼슬길과 당쟁의 참혹상을 목도하고 벼슬보다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25세에 부친께 과거를 포기하겠다는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았다. 말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 빙고 별제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사양하였다.

 

이만부는 박학 위주의 실학적 학문을 하였다. 이익(李瀷)의 형인 이잠(李潛) · 이서(李漵) 등과 더불어 학문과 문학을 토론하였는데, 이잠이나 이서는 늘 동생 이익의 앞날을 이만부에게 부탁하곤 하였다. 이만부는 그보다 17세 연하인 이익을 대유(大儒)로 인정하고 격려하였으며, 후에 이익은 이만부의 행장을 쓰기도 하였다.

 

이만부는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현일(李玄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29세에는 실학자이자 당파를 초월해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정시한(丁時翰)을 원주(原州)로 찾아가 시무(時務)와 산수관을 논하기도 하는 등 그를 선생으로 모시며 존경하였다. 34세 때인 1697년에 경상북도 상주로 내려갔다. 170037세에 친구 제자들의 도움으로 노곡(魯谷)에 천운당(天雲堂)을 비롯한 거처를 마련하고 이를 '식산정사(息山精舍)'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이곳에서 170845세에 도학(道學)의 맥이 동국(東國), 즉 조선에 있다는 자부심을 피력한 도동편(道東編)을 저술하였으며, 47세에 이르러는 자신이 이룩한 학문의 정수를 모은 지서(志書)15권을 저술하였다. 60세 이후에는 금강산 · 덕유산 · 속리산 등 여러 명산을 유람하였는데, 67세인 1730년에는 여행에서 본 곳곳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지행록(地行錄)을 저술하였으며, 역통(易統), 역대상편람(易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綱目)등 몇몇 저서를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만부 [李萬敷]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