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지산유고의 연보와 행장에 나오는 柳道奭(류도석)

도솔산인 2018. 10. 27. 21:23

柳道奭(류도석) 1828~1908, 순조28~융희2

 

 

  ○ 高宗三十一年甲五先生四十二勢呂永勛來築室而居永勛有篤學之志如此時金健秀亦來課。○ 東學猖獗 : 化嶺與三山接境三山乃東徒窟穴也境內士大夫避難者多就謀於先生先生與共築於天卓山中以避之盧都士事敬洪進士龜疇鄭進士弘黙李進士建晩鄭永愚羅采正諸公皆與焉。○ 柳參奉萬植。(時慈仁柳公道奭。自鹿島解歸。故致書於其胤二江。以慰之。) 柳公以討東召募使陞叙而請先生議事不赴。(二江柳公。又以先生之子康夏。薦爲召募營書狀。先生命往辭之) ○ 錦川洞約成

 

  ○ [1894] 고종 31년 갑오, 선생 42, 봄에 여영훈이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영훈은 학문에 돈독한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때에 김건수 또한 와서 공부하였다. 동학이 창궐하였다. 화령과 삼산은 접경으로 삼산이 바로 동학도의 소굴이다. 경내 사대부들이 피난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생에게 나아가서 상의를 하니 선생이 함께 천탁산 속에 성을 쌓아서 피난하였다. 도사 노사경과 진사 홍구주, 진사 정홍묵, 진사 이건만, 정영우, 나채정 등 여러 공들이 모두 함께하였다. 참봉 유만식 공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때에 자인현감 류도석공이 녹도(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그러므로 그의 장남 이강에게 서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 柳道奭 公이 討東召募使로 승서(陞叙)하여 선생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강 유만식 공이 선생의 아들 강하를 소모영의 書狀官(종사관)가 되는 것을 천거하였으나 선생께서 가서 사양하게 하였다.) 錦川洞約을 지었다. [지산유고 연보]

 

  前慈仁相柳公道奭. 自鹿島放歸. 仍有朝家叙令爲討東召募使. 柳公請府君議事. 辭病不行. 未幾柳公辭遞. 又有傳旨. 以前承旨鄭宜默. 爲代之.

 

  전 자인(慈仁 : 현재 경산시 자인면)현감 류도석공이 鹿島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이로인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 토동소모사가 되었다. 유공이 부군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柳公이 (벼슬을)사직하고 물러나자. 또한 (왕이) 교지를 내려 전승지 정의묵으로 교체하였다. [지산유고 행장]   

 

* 鹿島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슴섬. * 慈仁 : 경상북도 경산지역의 옛 지명.

 

류후조(柳厚祚, 1799~1876)-류주목(柳疇睦, 1813~1872)-도석(柳道奭, 1828~1908)-류만식(柳萬植, 1860~1926)

 

☞ 柳道奭(류도석, 1828~1908) : 자는 太弼, 호는 海史. 수암 류진의 9대 종손이고, 낙파 류후조의 맏손자이며 계당 류주목의 맏아들이다. 1828(순조28)에 출생하였다. 蔭仕童蒙 敎官, 承政院 假注書를 거쳐 경상도 慈仁현감 겸 大丘鎭管兵馬節制都尉에 제수되어 선정을 하였으며 去思碑가 세워졌다. 자인현감으로 있었던 1881(고종18) 姑從丁建燮의 생일에 갔다가 李載先의 역모에 가담하였다 해서 14년 동안 전라도 녹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정건섭은 이재선 역모 사건의 가담한 주모자의 한 사람이었다. 이 사건 審理 과정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심리가 한창일 때 委官(재판관) 金炳國이 자주 뒤를 돌아보기에 같은 위관인 洪淳穆대감 왜 자꾸 뒤를 돌아보시오라고 물으니까

 

  “洛東柳閤(류후조낙동대신 또는 낙동류합이라 부른다.)이 뒤에 와 계시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이 의아해 할 때 다음 죄인이 들어오는데 바로 류후조의 손자인 류도석이 아닌가. 두 사람은 류후조가 낙향할 때 후일 내 자손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잘 부탁한다.”는 당부 말이 떠올라 삼족을 멸한다는 살얼음판에서 그를 구하여 녹도로 귀양을 보내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때 大漢門 앞에 席槀待罪하던 그의 장남 柳萬植은 귀양길에 나선 아버지의 가마를 따라 남대문을 나서니 昇天하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한다. 그 뒤 사면되어 1901(광무5) 74세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1908(융희 2) 우천에서 향년 81세로 생을 마쳤다. 류도석은 내려오는 가문의 법도를 지키고 倡儀斥邪를 사림에게 고취하니 그 가문에 그 賢孫이라. 칭송하였다. 슬하에 35녀를 두었으며 묘는 상주 , 숙부인 驪江李氏 묘는 문경 幽谷, 숙부인 南平文씨 묘는 괴산 靑川에 있다가 상주 화산 夫君 부군 묘 가까이로 옮겼다. [출처 : 다음 카페 愚川世家]

 

류후조(柳厚祚, 1799~ 1876) :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류성룡의 8대손으로 류심춘의 아들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자는 재가(載可), 호는 매산(梅山낙파(洛坡영매(嶺梅),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선 중기 중흥의 명재상으로 일컫어지는 서애 류성룡의 8대손이자 수암 류진의 7대손이며 류심춘의 아들이다. 경상북도 상주 중동면 우천리 출신이다. 그의 7대조인 수암 류진이 고향 안동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대대로 거주하였다.

 

철종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대도호부사로 관직에 진출,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고종 때 이조참판이 되고 사헌부대사헌, 공조판서로 승진, 제조를 겸하고 홍문관제학, 18661월에 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동년 3, 진하 사은 겸 주청사(進賀謝恩兼奏請使)로 서당보, 홍순학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1월에는 당백전 주조에 찬성하였고 이듬해 1월에 열린 차대(次對)에서 조선 고종 임금에게 절검(節儉) 두 글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라고 주청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아들 류주목에게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고종 4년인 18675,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후에 판중추부사로 전임하였으며, 1872년에 치사한 후에 봉조하가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유주목(柳疇睦, 1813~1872) : 상주 출신.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숙빈(叔斌), 호는 계당(溪堂). 유성룡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유후조(柳厚祚)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부사 이재연(李載延)의 딸이다. 1516세 무렵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달했으며, 특히 역사 부분에 재능을 보였다. 이에 할아버지 유심춘(柳尋春)이 순수 학문을 지향할 것을 경계하자 이때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1834(순조 34) 유심춘이 사망하자 정이(程頤)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경재잠(警齋箴)의 후잠(後箴)을 지어 학문과 행실의 지표로 삼았다.

 

1835년에는 과거응시를 위해 상경했다가 남한산성·삼전도·갑곶진을 탐방하고는 분격한 심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1842(헌종 8)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과장(科場)의 부정을 목격하고는 상주 시리(柴里)에 계당(溪堂)을 건립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판사 정윤우(鄭允愚)의 요청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적이 물러나 곧바로 의진을 파하였다. 이듬 해인 1867년에는 동몽교관, 1868년에는 장악원주부·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68년에는 계정(溪亭)에 선비들을 모아 소학백록동규(白鹿洞規)를 강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해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유주목은 성리학·예학·역사학·보학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전례유집(全禮類輯)은 사례(四禮오례(五禮사상례(士相禮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다.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성리학에 대한 선유들의 견해를 취합하여 편찬한 것이다. 조야약전(朝野約全)은 당쟁에 대한 글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해동보(海東譜)는 씨족의 계보를 밝힌 40책 분량의 역작이다. 문집으로는 계당집(溪堂集)이 있다.

 

☞ 류만식(柳萬植, 1860~1926)수암 류진의 10대 종손이요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장손이며 아버지는 海史 류도석(柳道奭, 1828-1908)이다자는 建一이고 호는 二江이다. 우천 수암종택에는 <二江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二江>은 洛坡 柳厚祚의 曾孫인 柳萬植公의 號이다. 柳二江은 우천 수암 종가의 宗孫이기도 하다.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일정 때인 1926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道士林의 천거로 齊陵참봉으로 임명되었다. 박식과 담론으로 大家의 풍도가 있었다.

 

 매천야록 李載先의 옥사

신사년(1881) 겨울, 李載先獄事事件이 있었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자이다. 그는 갑자년(1864) 이후 별군직으로 있었으나 본성이 용열하여 숙맥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고, 다만 흥선대원군의 庶子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실세한 지 오래되어 그와 친한 문객 중 저명한 사람들은 벼슬길이 막혀 仕籍에서 제거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모두 울분에 쌓여, 前承旨安驥泳, 權鼎鎬 등이 유생 任哲鎬, 丁健燮 등과 함께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들은 9일 등산을 핑계로 이재선의 친구 蔡東述을 남한산성으로 납치하여 그 비밀을 털어놓았으나, 채동술은 위기를 느껴 승낙은 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였다. 그리고 전 현감(前縣監) 류도석(柳道錫)은 옛 정승 류후조(柳厚祚)의 손자로, 그는 음모에 참여하는 조건을 내세워 10년 동안 경상감사(慶尙監司)를 맡기로 약속받았다. 이 맹약에 동참한 사람들은 남인과 북인이었으며, 노론으로 참여한 사람은 북촌의 서얼 수명뿐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된 기일에 광주(廣州)의 토교(土校, 지방 소속의 장교) 이풍래(李豊來), 그 음모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자진 출두하여 그 사실을 고변함으로써 안기영, 권정호, 임철호, 정건섭 이하 諸賊들이 주살되고, 그들의 가족은 법의 처벌을 받아 노비로 충당됨은 물론 그들의 가산도 모두 적몰되었다.

 

그리고 채동술은 知情不告罪로 처형되고, 유도석은 그의 조부가 고종의 등극을 도운 공로가 있었으므로 사형을 감면하여 도서로 유배하였으며, 이재선은 서문 밖 민가에서 賜死되었다. 이재선은 사사될 때도 자신이 무슨 죄로 죽는지 몰랐다. 이때 어떤 사람은 이 옥사가 왕후의 지시였다고 하였으며, 中外에서는 대원군이 주동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으나 대원군은 노려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임오군란 때 그 화가 왕후에게 미치자 사람들은 더욱 대원군이 교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출처 : 국역 梅泉野錄1(1894년 이전) 18. 李載先의 옥사]

 

 

 

 

 

 

柳萬植(1860~1926) : 수암 류진의 10대 종손이요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장손이며 아버지는 海史 류도석(柳道奭, 1828-1908)이다. 자는 建一이고 호는 二江이다. 우천 수암종택에는 <二江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二江>洛坡 柳厚祚曾孫柳萬植公이다. 柳二江은 우천 수암 종가의 宗孫이기도 하다. 1860(철종 11)에 태어나 일정 때인 1926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道士林의 천거로 齊陵참봉으로 임명되었다. 박식과 담론으로 大家의 풍도가 있었다.

 

http://blog.daum.net/lyg4533/16488048

 

此間有子房 願諸君往見之 乃投書于柳兄建一 全付士卒 則建一以其從祖梁山丈 仗義一門 兩擧有所如何云 固不可强 [지산유고 창의일기.1896.03.28]

 

이 사이에 子房(자방?)이 있어 諸君(제군)들이 가서 만나기를 희망하여 이에 柳兄(유형)建一(건일)에게 글을 보내 '사졸들을 전부 부탁한다. 곧 건일은 그 從祖(종조 : 할아버지의 형제)梁山(양산) 어른으로 義兵(의병)을 일으킨 一門(일문)이다.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림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진실로(굳이) 억지로 권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