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山 선생의 제자 二雲 李義國 先生 詩文
이의국(李義國, 1867~1935) 본관은 延安 호는 二雲 고종(高宗) 27년(1890) 경인(庚寅)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정3품에서 종6품 벼슬)을 역임함. 二雲 이의국(李義國)은 1890년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승정원 주서, 비서원 비서랑직을 10년간 봉직하다, 규장각 직각에 오른 인물이다. 1897년 스승인 김산 의병장 지산 이기찬 선생의 가족(17명)을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 향려(鄕廬)에 받아들였다. 증조부 諱 康卨(1874~1912)公은 二雲 令監의 제자이다. 二雲 令監이 관직을 그만둔 것은 한일합방 시점으로 보고 있다. 1908년 지산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유택을 제공하고 100일 장례를 치른 기록이 지산유고에 있다. 1979년 대청댐 수몰 당시 무덤을 파묘했를 때 유골은 없었고, 그릇 몇 점과 총이 나왔는데 청원군청에 신고하여 공무원이 가지고 갔다고 한다.[주민들 증언] 1992년경 내가 답사했을 당시 두께 60cm, 폭 100cm, 길이 240cm나 되는 석회 반석이 드러나 있었다. 위치는 수몰 이후 새로 지은 延安 이씨 사당의 위쪽에 있다. 1912년 止山 선생의 長子 靑松 이강하 선생이 참봉공을 산소를 군위군 우보면 나호동으로 다시 이장하고, 止山 선생의 遺骸를 楚江(금강)에서 화장하여 금강에 뿌리고[청송선생의 청흥종계안 기록], 우리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유민이 되었다. 1912년은 청흥문중이 맞은 환란의 한 해였다.[증조부(諱 康卨 1월23일 38세 卒), 증종조모(星山呂氏 1월26일 31세 卒) 康殷(止山 二子 7월24일 29세 卒) 증종조부 諱 康連 절름발이(불구자)가 됨. 효령대군 정효공파 세보]
다음 스캔 자료는 증조고의 유고에 남아있는 二雲令監의 시문이다. 二雲 선생은 관직에 있으면서 스승인 의병장 지산 선생의 가족을 구했고, 선생을 향려로 모시고 온 후,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광거정을 지어 강학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기록이 지산유고에 남아있다. 지산 선생의 사후 선생의 유택과 종토를 마련해 주었으며,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우리 가족은 유민이 되어 함경남도 고원군 인흥면 둔전에 들어가 7년간 칡을 캐어먹으며 연명하다가, 해방이 된 이후에 1946년 함경도에서 월남하여 몸 불여 살 곳이 없자, 후곡(충북 청원 문의 후곡)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운 영감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이운의 후손들은 우리집을 보살폈다고 한다.
♣ 이의국(李義國), 1867 ~ 1935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치인(致仁), 호는 이운(二雲)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後谷里) 출신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부원군(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12세손이다. 1888년(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1890년(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삭주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919년과 1926년에는 국장(國葬)에 참여하여 마지막 신절(臣節)을 다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백의(白衣)하여 국운을 한탄하였다. 또한 육영에 뜻을 두어 학교를 신축하고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를 설립하여 신구학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며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썼다. 묘소는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있는 8대조 연릉군(延陵君) 선영(先塋) 아래에 있다.
[止山遺稿 年譜]
○ 高宗二十年癸未。先生三十一歲。春哭楠西先生加麻。○ 以先生遺命。纂乙卯疏廳同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