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봄날 밤 소은암에서 노닐다(190420~21)

도솔산인 2019. 4. 21. 19:43

 

봄날 밤 소은암에서 노닐다(190420~21)

 

▣ 일   시 : 2019년 04월 20일(토)~21(일)

▣ 코   스 : 쌍계사-불출암터-내원수행처-소은암-고령암터-대은암터-청학봉(고령대)-불일암-불일폭포-백학봉(비로봉)-사관원(옥소암터)-도성암(영대암터)-금당

▣ 인   원 : 2명(김*채 연구사)

▣ 날   씨 : 맑음

 

 쌍계사 주차장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데 소방차가 출동하고, 이어서 119 구급차와 112 순찰차가 쌍계사로 올라가고 어수선하다. 하동 군청 김*채 연구사와 자월화상방광탑을 둘러보고 판독이 안되는 刻字를 확인하고 올라가니, 헉! 내원골 계곡을 건너는 지점에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고, 119 구급대원들이 소은암 아주머니를 모시고 내려오고 있다. 오늘 아침에 소은암으로 올라가시다가 미끄러져 허리를 다치셨다고 한다... 불출암터를 지나 계곡을 건너서 한 번 쉬고 내원수행처에 이르니 자봉스님께서 급히 내원 슈퍼에 다녀오시고 우리를 위해 두릅을 삶고 계셨다. 여유있게 점심을 먹고 올라가 활인령 모퉁이를 돌아가니 복사꽃과 배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다.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굳게 믿고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오신 소현거사 최병태 선생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하산을 하시고, 현재 소은산막은 2년 넘게 비어있다. '素隱山幕'은 '素現居士가 隱居하는 산막'이라는 의미'로 최선생님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小隱庵(소은암)과 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어느 봄날 밤에 소은암 꽃동산에서 등불을 켜고 노니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소은산막(소은암)

 

 

1. 대소은이암과 대한 선인들의 기록

가. 1699년 명안대사의 상불암기

지리산의 한 줄기가 남으로 우뚝 솟아 하늘에 가까이 간 것이 설봉(雪峰)이다. 이 봉우리의 서쪽에 옛 사람이 숨어 쉬던 터가 있는데, 그 이름을 잃어 버린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강희(康熙) 정축(丁丑 1697)년에 승단(僧團)에서 형 동생이 되는 호영(浩影)도인 해기(海機)와 사민(思敏)선사가 일찍이 청학동 대은암에서 함께 선업을 닦다가 문득 그 거처가 깊지 않은 것을 싫어해서 대매(大梅)가 집을 옮긴 일을 우러러 좇아 이곳으로 옮겨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한 해가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이곳이 불일암(佛日庵)의 위에 있기 때문에 상불(上佛)’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上佛庵記 智異之一支 南而斗之而近天者 卽雪峰 峰之西 有古人隱休之地而墟 失其名者 不知幾年也 康熙丁丑 浩影道人海機與思敏禪 爲法門昆仲 嘗居靑鶴洞大隱庵 同修白業 忽厭其居之不深 仰追大梅之移舍 乃轉入此 庇工幹事 不年成之 由其在佛日之上 以上佛扁焉

 

나. 1744년 황도익頭流山遊行錄

 청학봉을 넘어 대소(大小) 은이암(隱二庵)을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절벽을 경유하여 백 걸음에 아홉 번 꺾어드니 갈 수가 없었다.

 欲逾靑䳽峰. 大小隱二庵. 路由懸崖. 百步九折. 不可往也.

 

다. 1823김선신의 두류전지

소은암 지장암 쌍계사 북쪽에 있다. 고령암 소은암 위에 있다​.

 

2. 고령대와 고령암 대한 선인들의 기록

가. 1616년 <成汝信>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 10월 2일

잠시 후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부디 위험한 산봉우리에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난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 백 살도 안 되었거늘,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 하고,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미투리를 잡아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봉우리 꼭대기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나. 1736년 박태무의 '登香爐峯古靈臺'기행시

박태무의 본관은 태안(泰安) 호는 서계(西溪).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진주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60세(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수를 남겼는데, 성여신보다 120년 뒤 1736년 '향로봉 古靈臺(고령대)에 올라'라는 시를 남겼다.

 

登香爐峯古靈臺 - 朴泰茂(1677~1756)

 

萬壑香煙起 : 만 구렁에는 향그런 연하가 피어오르고

峯晴日照紅 : 맑게 갠 산봉우리 햇살에 붉게 물들었네

地勢千尋兀 : 땅의 지세는 천길 높이 우뚝한 곳이니

天容一望空 : 한 곳 허공만으로만 하늘이 보이는구나

脚下環蓬海 : 발밑에는 봉래산 운해가 둘러져 있고

頭邊接閬風 : 머리 위는 선계인 낭풍산에 닿았다네

喬期杳消息 : 신선 왕자교를 기대하나 소식 아득하여

怊悵倚枯松 : 울적한 마음에 마른 소나무에 기대어 섰네

 

* 香爐峯 : 불일암 앞의 동쪽 봉우리 이름.

* 閬風山 :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

* 王子喬 : 周나라 靈王의 태자로 신선이 된 인물

 

다. 1823김선신의 두류전지

고령암 소은암 위에 있다​.(1632년 진양지에도 실려있을 것으로 본다)

 

라. 古靈庵址와 古靈臺

 

 

성여신의 유람록과 박태무의 기행시에 고령대(古靈臺)는 분명 향로봉(청학봉)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고령암(古靈庵)은 소은암 위'에 있고 '고령대(古靈臺)는 향로봉'으로 정리가 된다. 따라서 고령암지(古靈庵址)고령대(古靈臺)는 별개의 장소이다. 

 

 

3. 불일 옥소 영대 불출암으로 쌍계사 가는 길

 

가. 1618조위한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414,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구멍이 뚫리다)하였다. 오른쪽에 청학봉(靑鶴峯)을 마주하고 있는데 구름을 끼고서 푸른 절벽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到佛日. 則寺古無僧. 金碧散落. 虛龕寂歷. 窓壁玲瓏. 右對靑鶴峯. 上切雲天. 蒼壁削立.

 

<중략> 시 몇 편을 짓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 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입니다.”라고 한다. 옷을 벗어 놓고 피곤해 누워 시를 짓고 돌아와 가마 타고 곧장 내려가니 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백 걸음 가서 영대암(靈臺庵)에 닿았고 수백 걸음 더 가서 불출암(佛出庵)에 이르렀다. 이 두 암자는 모두 험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한 점 속세의 먼지가 없었으나 옥소암에 비한다면 풍격이 한참 못 미쳤다. 불출암(佛出庵)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사(雙溪寺)로 돌아와 묵었다.

 

賦詩數篇. 還向歸路. 而別尋一線鳥道. 穿蘿觸藤. 直下數里. 到玉簫庵. 庵在斷巘絶壁上. 鑿崖凌虛而架棟設檻. 縹渺浮空. 翬飛鳥翼. 有若畫圖之中. 殆非尋常僧房佛屋之比也. 僧云. 此庵. 乃潭陽士人李聖國者. 入此山修道二十年. 破產傾財. 作大施主. 構之云. 脫衣困臥. 賦詩而還. 乘輿直下. 如墮坑入井. 行數百步. 靈臺庵. 又行數百步. 佛出. 玆二庵俱在絶壑上. 無一點塵垢. 而比玉簫則風斯 下矣. 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

 

* 風斯在下 [풍사재하]새가 높이 날 때는 바람은 그 밑에 있다는 뜻으로, 높은 곳에 오름을 이르는 말[장자]

 

 

나. 1631 오숙(吳䎘)의 옥소암&불일암 기행시

 

 

玉簫庵 (옥소암) - 오숙 (吳䎘)

 

獨夜邀仙鶴 (독야요선학 ) : 홀로 있는 밤, 선학을 맞아

淸晨禮釋曇 (청신예석담 ) : 맑은 새벽, 부처님께 예배한다

乾坤一方問 (건곤일방문 ) : 천지 안의 어느 곳을 찾으니

今古此伽藍 (금고차가람 ) : 예나 지금이나 이 절간이로구나

雰氣生危檻 (분기생위함 ) : 안개 기운은 높은 난간에 피고

香煙擁小龕 (향연옹소감 ) : 향불 연기는 절 탑을 감싸는구나

從來貪佛日 (종래탐불일 ) : 종래에 불일암을 탐내었는데

更別玉簫庵 (갱별옥소암 ) : 다시 옥소암을 떠나야 하는구나

 

 

佛日(불일) - 오숙(吳䎘)

 

人世吾何事(인세오하사) : 나는 무슨 일로 인간 세상에서

名區得此山(명구득차산) : 산수가 이름난 이 산을 차지했나

佛日玉簫庵(불일옥소암) : 불일암옥소암

香爐靑鶴(향로청학간) : 향로봉와 청학봉 사이에 있구나

銀河垂絶壑(은하수절학) : 은하수는 깎아지른 구렁에 드리우고

琪樹繞空壇(기수요공단) : 옥 같은 나무는 빈 법당을 둘러있도다

且愛胡僧在(차애호승재) : 장차 參禪僧이 있음을 사랑하여

徐飛錫杖還(서비석장환) : 천천히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리라

 

출처 : 한시속으로 http://cafe.daum.net/heartwings

 

다. 1651오두인두류산기(頭流山記)

 

113,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 향로봉과 청학봉)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사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다시 청학봉을 넘어 봉우리 남쪽 기슭에 당도하니 두 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어떤 암자는 남아 있고, 어떤 암자는 허물어져 없다. 옥소·영대(玉簫靈臺)는 그 명칭이고, 성불심원(成佛深院)은 그 터전이다. 불일암에는 스님 한 분이, 옥소암에는 스님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곡기(穀氣)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부류의 스님이다. 아래로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도착하니, 수석(水石)이 더욱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짐을 갑절이나 깨달았다. 계곡 주위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시 한 수가 바위 사이에 있음을 보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由瀑流而爲鶴淵於兩峰之南. 此雙溪左流之源也. 還踰靑鶴峰. 至峰之南麓. 則數三小菴. 或存或廢. 玉簫靈臺. 其號也. 成佛深院. 其基也. 佛日則一僧棲焉. 玉簫則三僧處焉. 皆絶粒之流也. 下至靑鶴洞下流. 則水石轉奇. 倍覺神爽. 徘徊溪邊. 忽見一詩在巖間. 其詩曰.

 

[의문I]

☞ 성불심원(成佛深院) : 최석기 교수님의 지리산 유람록에는 성불암과 심원암으로 국역함. 그동안 '참선승이 수도하는 깊은 산중의 도량(선원)'으로 이해했는데...참고로 유람록에서 성불암, 심원암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함.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청학봉) 앞 길을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 靑鶴峯 : 여기에서 청학봉은 비로봉 즉 백학봉이다. 유람록에 동 향로봉, 서 비로봉은 일치하나, 당시 선인들의 유람록에는 비로봉을 청학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동 청학봉 서 백학봉의 東-靑 西-白의 개념은 1724년 명암 정식의 두류록에 처음 나타난다.

 

이 시는 계부(季父 : 吳翮오핵)께서 직접 쓴 詩이다. 그리고 우선(羽仙:오숙)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호이다. 선인(先人: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숭정(崇禎) 신미(辛未, 1631)에 남쪽에 관찰사로 계시면서 이곳에 유람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숙부도 또한 병술년(丙戌, 1646)에 장원 급제하여 두루 구경을 다니러 왔다가 떠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난 내용이 그런 것이다.(지리99 이재구 선생 국역)

此乃季父手寫詩. 而羽仙卽先人號也. 先人曾在崇禎辛未. 按節于南. 嘗遊于此. 而季父又於丙戌. 以新恩狀元郞. 歷觀而去. 故其見於詩者. 如此.

 

[의문II]

☞ 오핵의 장원암 시 : 1646년 오핵이 바위에 손으로 쓴시를 5년 뒤인 1651년 오두인이 확인했다는 내용이 믿기지 않는다. 먹으로 썼다는데 지워지지 않았을까...  

 

吳䎘[오숙 : 1592(선조 25)~1634(인조 1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오수억(吳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 아버지는 전부(典簿) 오사겸(吳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 승문원권지정자, 에조좌랑, 순검사종사관, 헌납, 동부승지, 경상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등을 역임함.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남.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4권이 있음.

 

吳翮(오핵 : 16151653)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인 오숙(吳䎘)을 따라 공부하였고, 장유(張維)의 문하에 들어갔다. 열아홉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1646(인조 2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병조좌랑·정언(正言)을 병조좌랑, 사서(司書), 기사관(記事官), 지평(持平)를 역임함. 저서로는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만세감(萬世鑑)4·백천당유고등이 있음.

 

라. 1655김지백유두류산기

108, 다음날 비를 만나 그대로 머물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견여(肩輿)를 타고 출발하였다.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불일암(佛日庵)에 거의 다 도착하니,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린 듯 가운데가 찢어져 있고, 건너지른 나무架木가 사다리가 되어, 겨우 인적이 통할 만하였다. 아래로는 깊이가 만여 길이나 될 듯한데,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발만 믿고 걸으니, 혼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붙잡고 올라 불일암에 이르니, 암자 밖에 작은 석대(石臺)가 있는데, 완폭대(翫瀑臺)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신(天紳)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 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날리는 물방울이 찬 기운을 만들어 내고 그늘진 골짜기가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켜 몹시 추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산 막걸리를 두어 잔 데워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청학봉(靑鶴峯)에서 지팡이 잡고 쉬면서 학 둥지를 엿보고, 내려와 옥소암(玉簫菴)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翌日. 遇雨仍畱. 遂待晴. 肩輿而作. 或乘或步. 幾至佛日庵. 石崖呀然中裂. 架木為棧. 纔通人跡. 其下深可萬餘丈. 側身信足. 魂悸髮竪. 乃躋攀到菴菴. 外有小石臺. 所號翫瀑者. 望見天紳數百丈. 掛流香爐之側. 勢若虹起電掣. 直與廬山慱淵上下. 往日龍湫之所賞者. 亦風斯下矣. 飛淙釀寒. 陰谷動爽. 凛乎不可乆畱. 遂煖進山醪數杯. 仍復路憇杖靑鶴峯. 窺鶴巢而下. 題名玉簫菴. 復還䨇溪宿.

 

[의문III]위 유람록에 나오는 청학봉은 지금의 비로봉, 즉 백학봉을 가리킴. 비로봉을 백학봉이라고 한 것은 1724년 명암(明庵) 정식(鄭栻, 1683~1746])의 두류록에 처음 등장함.

 

김지백(金之白) [1623~1670]1648(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명리를 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인물로, 사부일기류인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佛로 보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佛出庵 터로 추정

 

 

 

내원수행처

 

 

 

고령암터

 

 

 

 

 

 

대은암터 석축

 

부안임씨 후손들

 

향로봉(청학봉/고령대)

 

불일암

 

 

사관원(옥소암터로 추정)

 

도성암(영대암터로 추정)

 

金堂(옛옥천사)

 

玉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