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고령암지와 고령대를 찾아서(190301~02)

도솔산인 2019. 3. 2. 19:38


고령암지와 고령대를 찾아서(190301~02)



▣ 일   시 : 2019년 03월 01일~02일

▣ 코   스 : 하동문화예술회관-쌍계사-내원수행처-소은산막-고령암터-향로봉(고령대)-불일폭포-비로봉(백학봉)-사관원(옥소암)-도성암(영대암)-불출암-쌍계사

▣ 인   원 : 조박사님, 송연목님

▣ 날   씨 : 맑음 영하0도



 玄石 이호신 화백님께 '하동의 향기' 전시회 도록을 인편으로 받고 고민하던 차에 송연목님의 산행 계획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화백님과는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 화첩복원 산행을 함께한 특별한 인연이 河東을 향했다. 하동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둘러보고, 김선신의 두류전지(전병철역 p173)에 '고령암:소은암 위에 있다.'라는 단서 하나를 가지고 암자터를 찾아 나셨다.


 내원골도 완연한 봄이다. 자봉 스님께 고로쇠 물을 5리터쯤 얻어 마시고, 소은 산막으로 올라가 막영 준비를 하면서 산막 앞에 청죽을 베어 시야가 트이게 정리를 한 후, 고령암터를 찾기 위해 소은암 뒤 탱자나무 옆으로 오른다. 곧바로 반석과 너덜지대가 나오고 두릅나무가 사열하듯 서있다. 앞을 보니 계곡은 더덜지대고 오른쪽으로 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길의 흔적을 따라 오르다가 실계곡을 건너면 다시 너덜지대가 잠시 나오고 조금 오르면 암자터 석축이 보인다. 석축 위에 대략 폭 7m 길이 15m의 터가 나타난다. 와편도 있고 오른쪽 계곡에는 샘터의 흔적이 확연하다. 소은암에서 불과 100m 정도의 거리이다. 고령암터 확인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나는 이곳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나오는 고령암터로 추정한다.


 다음날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불일암에서 옥소암, 옥소암에서 영대암, 영대암에서 불출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려셨다. 비로봉(백학봉)에서 내려오다가 옥소암과 영대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쌍계사에서 산죽을 베고 잡목을 제거하여 시야가 훤하다. 이 길에서 영대암 직전에 사관원(옥소암)으로 직접 가는 샛길도 확인했다.(산죽을 베어 놓았음) 조박사님만 사관원(옥소암)에 다녀오시고 불출암터를 지나 쌍계사로 내려왔다.









김선신의 두류전지(173쪽)




내원수행처




고령암터 가는 길



고령암터 추정 석축


고령암터 추정



와편


고령암 샘터


너덜이 끝나는 지점에 절터가 있음




향로봉/청학봉(고령대)






백학봉(비로봉)


영대암


○○암터(?)



불출암터



# 古靈庵과 古靈臺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1. 고령암(古靈庵)


고령암 소은암 위에 있다​.(진양지와 두류전지)



2. 고령대(古靈臺)

가. 1616년 <成汝信>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 10월 2일


바위 허리로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벌려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1백 척(尺)이나 되는 낭떠러지 위에 있고, 동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실같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무를 부여잡고 곧장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석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몸이 날렵하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불일암(佛日庵)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만 방 안에 가득했다. 문매촌이 한 구절 읊기를 “학 떠난 소나무는 늙었고, 중 떠난 옛 절은 텅 비었네”라고 하여, 내가 “진인을 찾던 옛날 꿈속, 이 산중에 와 있었지”라고 읊어 두 구를 채웠다. 벽에 이 시를 써 붙였다.


잠시 후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부디 위험한 산봉우리에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난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 백 살도 안 되었거늘,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 하고,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미투리를 잡아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봉우리 꼭대기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나. 1736년 박태무의 '登香爐峯古靈臺'기행시


박태무의 본관은 태안(泰安) 호는 서계(西溪).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진주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60세(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수를 남겼는데, 성여신보다 120년 뒤 1736년 '향로봉 古靈臺(고령대)에 올라'라는 시를 남겼다.


登香爐峯古靈臺 - 朴泰茂(1677~1756)


萬壑香煙起 : 만 구렁에는 향그런 연하가 피어오르고

峯晴日照紅 : 맑게 갠 산봉우리 햇살에 붉게 물들었네

地勢千尋兀 : 땅의 지세는 천길 높이 우뚝한 곳이니

天容一望空 : 한 곳 허공만으로만 하늘이 보이는구나

脚下環蓬海 : 발밑에는 봉래산 운해가 둘러져 있고

頭邊接閬風 : 머리 위는 선계인 낭풍산에 닿았다네

喬期杳消息 : 신선 왕자교를 기대하나 소식 아득하여

怊悵倚枯松 : 울적한 마음에 마른 소나무에 기대어 섰네

* 香爐峯 : 불일암 앞의 동쪽 봉우리 이름.

* 閬風山 :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

* 王子喬 : 周나라 靈王의 태자로 신선이 된 인물


3. 古靈庵址와 古靈臺


중국 삼국시대 吳나라 왕 孫權의 할아버지 孫鍾(손종)이 고령산(高靈山) 동쪽 瓜山에서 三仙을 만나 오(瓜)이를 주었는데, 三仙이 孫鍾에게 오이(瓜)를 얻어먹고 명당에 묏자리를 잡아주어 후에 손자 孫權이 오나라의 王이 되었다고 헌다. 오이를 얻어먹은 산이 瓜山이 되었고, '古靈山(일명 大帽山)은 瓜山의 서쪽에 있으며, 古靈山삼선동(三仙洞)이 있다.'라고 하니, 성여신의 고령대(古靈臺)삼선동(三仙洞) 각자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성여신의 유람록과 박태무의 기행시에 고령대(古靈臺)는 분명 향로봉(청학봉)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급한 결론이지만 '고령암(古靈庵)은 소은암 위'에 있고 '고령대(古靈臺)는 향로봉'으로 정리가 된다. 따라서 고령암지(古靈庵址)고령대(古靈臺)는 별개의 장소이다.



* 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古靈臺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