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를 찾아서I(180413~15)
▣ 일 시 : 2018년 04월 13일 ~ 15일
▣ 코 스 : 남사마을 - 산천재 - 미산재(宿) - 산천재 - 새재 - 독바위양지 - 甕巖(진주독바위) - 독바위골 - 새재 - 경남도립미술관
▣ 인 원 : 5명(미산선생님, 一丁 閔선생님, 송연목씨, 김자준씨), 15일 조중제님
▣ 날 씨 : 아침 최저 기온 -2도
지난해 10월 두 차례에 거쳐 1박 2일로 감수재길을 답사하였으나, 끝내 상류암지를 찾지 못하고 한 해를 넘겼다. 상류암지 확인은 지리동부의 유산기에서 마지막 남은 과제이다. 지리동부에서 지장암지와 두류암터, 미타봉과 향로봉, 청이당터와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 행랑굴과 개운암, 영랑재와 소년대, 말바우산막터와 마암 등을 확인하였다. 선인들의 유산기를 통해 옛 지명을 복원함에 있어 고증되지 않은 지명을 지도에 표기하면, 영신사지와 청학연못, 두류암처럼 그것을 바로잡는데 수십 년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관련자료
1,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가. 9/6일(정미) 양력 1610년 10월 22일(金) [두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까지]
간지의 오류<丁未日이 아니고 戊申日임>
[원문] 至頭流上流兩庵之路。頭流昔余所遊息。而上流則未也。余請諸君強取上流之路。上流乃妙雲所新創。而於上峯路未出者也。僅尋樹陰下一條潦路。或由岡脊。或臨壑谷。魚貫而下。至一懸崖。上無所攀。下可數丈。諸君與從僧皆蟻附而下。余則不得着足。周章之際。遠聞伐木聲。盖巖僧已慮其如此。設機械而令我下來也。旣至菴一行俱困。
[국역]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숲 속에 난 한 갈래 도랑길을 겨우 찾아 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도 하면서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한 줄로 내려갔다.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잡을 만한 것이 없었고, 아래로는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따라온 승려들 모두 개미 떼처럼 절벽에 붙어 내려갔는데, 나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산을 잘 타는 승려들이 내가 못 내려오리라 짐작하고 기구를 설치하여 나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
원문]寺僧進茶果。皆山味也。食罷妙雲請曰少西有庵稍精灑。且種菊盈庭。黃白多開。可往宿焉。余與德顒,汝昇,惠甫。耐困而起。秉火而行。諸君皆從之。庵與菊果如雲所言。以○火來照而觀之。旣又取一二莖揷甁而置之床。花影婆娑焉。諸君辭去上流。余四人遂就寢。
[국역]이 암자의 승려가 차와 과일을 내왔는데, 모두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묘운이 청하기를 “이곳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한 암자가 있는데, 제법 정결하며 뜰에 가득 국화를 심어 노란색, 흰색 국화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덕옹∙박여승∙혜보와 함께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횃불을 들고 그 암자로 갔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왔다. 가보니 묘운이 말한 대로 암자는 정결하고 국화는 만발해 있었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가며 꽃을 구경하였다. 그런 뒤에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었더니 꽃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상류암으로 간 뒤 나와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나. 9/7일(무신) 양력 1610년 10월 23일 (土) [상류암에서 초령까지] 간지의 오류<戊申日이 아니고 己酉日임>
[원문] 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還至菴。請惠甫書名于北壁。盖八員矣。汝昇取僧○家一書而觀之。有三必死之說。竹有實必死也。螺有孕必死也。人有疾必死也云。雲與其弟訥惠稍解文字。又能誦佛書。爲諸斯文最。但盡賣其家傳田宅。又兄弟爲僧。以絶其姓而莫之恤。可謂惑之甚者也。
[국역] 맑음. 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암자 서쪽에는 臺(대)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臺(대) 가(上)에는(수정)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혜보에게 청해 이 암자의 벽에 이름을 썼는데 모두 8명이었다. 박여승은 불가의 책 한 권을 보고 있었다. 그 책에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이 있었는데,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묘운과 아우 눌혜는 문자를 제법 알고 불서도 잘 외웠다. 그들은 유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었는데, 전해 받은 농토와 집을 모두 팔고서 승려가 되어 성씨를 버리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으니 매우 미혹된 자들이라고 하겠다.
[원문] 至上流喫朝飯。從僧慮我困不能步。具藍輿二。一則爲汝昇也。或乘或步。至一處休焉。見林密蔓附樹上。垂實頗盛。行中有僧一童一。能緣木如猿猱狀。應搖而落者。得霜方甜。人皆屬厭而罷。踰草嶺。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田(田→由)分也。
[국역] 상류암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피곤하여 잘 걷지 못할까 염려해서 따라온 승려들이 남여(藍輿) 두 대를 구해놓았는데, 하나는 박여승을 위한 것이었다. 남여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쉬었다. 울창한 숲에 넝쿨이 기어오르고 나무 위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일행 중 한 승려와 종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탔다. 그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어 떨어뜨린 열매는 서리를 맞아 매우 달았다. 모두들 실컷 먹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새봉)이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2, 【진양지(晉陽誌)】와 【산청군지(山淸郡誌)】
가. 【진양지(晉陽誌)】 불우조(佛宇條)
『상류암지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在獐項洞上, 亂後重建)』라고 하였다.
나. 【진양지(晉陽誌)】 산천조(山川條)의 덕산동(德山洞) 지명
『천왐봉의 물은 법계사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을 거쳐 사제봉 아래 이르러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 또한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고 한다.』고 했다,
[원문] 成汝信 撰, 【晉陽誌】 권1, 山川. “天王峯水 自法界寺 東流 由薩川村 達社祭峯下 東北流 爲薩川 又自鉏屹山 東流 由上流菴 達獐項洞 南流 爲三壯川 與薩川 合于兩堂村前 是謂德川
☞ 서흘산(鉏屹山)은 鉏耒峰(서뢰봉) 즉 써레봉을 가리킴. 김학수의 유산기(1937년)에 耟峯 이라고 함. * 成汝信(1546∼1632), 박여량1554∼1611)
다. 【산청군지(山淸郡誌)】내 고장 전통(傳統)편 寺址 목록
『上流庵址는 삼장면 油坪里에 있다』고 하였다.
☞【晉州通志】卷之一 [志] 山川條의 鉏屹山에 대하여
九曲山은 天王峯에서 中峯 中峯에서 鉏屹山, 鉏屹山에서 九曲山이니 山이 九曲의 層段으로 포개저서 마치 屛風을 둘러놓은 것 같다 德川書院의 主峯이다.
철모삼거리 산죽길 직전 우측 석축을 넘어 능선 키 큰 산죽 길을 지나 약 350m 정도 오르면 바위군 아래 상류암터
나는 폐사지에 대한 식견도 없거니와 본래 관심 밖의 일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암자터는 피해갈 수가 없어, 지리동북부 三涅庵(선열암, 고열암, 신열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영신사지에 대해 점필재의 유듀류기행시 '영신암'의 詩句 인 '전괄과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가니 방장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箭筈車箱散策回/老禪方丈石門開).'라는 예를 들어 다른 의견을 말한 일이 있을 정도다. 폐암자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학자들의 영역으로 우리 일반 등산객들은 '여기에 이런 터가 있더라.'라는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지난해 가을 마등자님이 청이당 능선에서 옹암을 찍은 사진을 보고 '서흘봉(써리봉)과 조개골이 보이는 독바위능선에 상류암지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독바위능선으로 하산한 일이 있다. 그날따라 운무가 자욱하여 독바위능선 상단에 돌로 쌓은 좌선대(?)를 보았고, 짐승 길을 따라 조개골로 하산을 하였다. 당시 마등자님과는 지리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블로그에서 댓글을 주고받았다. 마등자님은 "9월 24일 영랑대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나무에 붙여 놓은 전차군단 시그널을 보았느냐?"라는 질문하였고, 나는 엉겁결에 "보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드님에게 부음 소식을 들었으니,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고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10월 4일 치밭목에서 1박을 하고 영랑대에서 마등자님의 시그널을 회수했고, 상류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독바위능선으로 내려와 부산으로 달려가 문상을 하였다.
♣오리무중 동부능선&상류암址(171004~05) : http://blog.daum.net/lyg4533/16487841
나는 유산기에 나오는 지명을 찾을 때 대부분 어느 정도 결론을 가지고 현장에 접근한다. 상류암의 위치에 대한 추정은 이미 지난 2015년 '<상류암지>에 대해서'라는 글에서 論한 바가 있고, 지난 가을에는 독바위에 泊地를 구축하고 지리동부에서 마지막 숙제인 상류암지에 새롭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성여신(成汝信)이 撰한 진양지(晉陽誌) 卷一 山川條에『또한 (물이)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又自鉏屹山 東流 由上流菴 達獐項洞 南流 爲三壯川 與薩川 合于兩堂村前 是謂德川)』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상류암지는 암자에서 서흘산(써리봉)이 보이고 조개골이 보이는 곳'이라고 추정을 하였고, 드디어 이번 산행에서 그 실체를 확인을 하게 되었다.
금요일 학생회 간부수련회 격려를 핑계삼아 덕산(선비문화원)을 향했다. 남사마을에 들러 玄石<이호신> 화백님과 점심을 먹고 남사오매 한국화를 감상하였는데, 금년에 매화를 보지 못한 나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이다. 지리산에 들어 남사마을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의 지리산에 대한 열정은 예술로 승화되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년 2월 27일 남사에서 처음 뵙자마자 점필재의 길을 화폭에 담을 것을 제안했고, 선생님께서는 계포일락 승락을 하셨으니,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신 듯하다. 나는 산행을 마치고 창원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지리산생활산수전시회를 관람하였다.
폐암자터의 답사에 산행기가 무에 필요하랴. 百聞이 不如一見이어늘... 감수재 <박여량>선생의 말씀대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또한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2006년 10월 15일 세석인공연못[磧石洞小池(적성동소지)]에서 지리산산길따라 <철화>님을 만나 영신암지 안내를 받은 후부터 청학연못과 영신암지에 대한 의문이 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고....지난 2015년 9월 19일 조개골 상류에서 지산 <슬기난>님이 던진 行廊窟(행랑굴)의 화두에 감수재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촘촘히 읽게 되었다. 시간이 걸렸으나 청학연못과 영신암, 행랑굴과 上流頭流兩庵(상류암과 두류암)에 대한 의문 부호를 비로소 내렸으니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는 듯하다. 玄石선생님의 남사오매와 산청삼매를 接하니, 문득 수우당 최영경 선생의 '매화는 도리행화와 봄을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떠오르더라. 끝.
지금은 꽃자리
玄石 <이호신> 화백님의 남사매
回廊
박여량의 행랑굴(行廊窟)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면우 곽종석의 시에서 궁륭(穹窿)이 행랑굴(行廊窟)의 이해를 도왔다. 선비기념관에서 회랑을 보니 행랑굴(行廊窟)이 떠올랐다. 궁륭(穹窿)은 홍예(虹霓)로 인해 천장 또는 지붕이 활처럼 둥글게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이다.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를 의미한다. 이것을 일반 백성의 집에서는 행랑(行廊)이라고 한다.
독바위양지 산막터
지리동부 문바위
甕巖(옹암)
숯가마터
石築
숯가마터
샘터
상류암터
玄石 <이호신>화백님의 정당매
玄石 <이호신>화백님의 정당매
玄石 <이호신>화백님의 원정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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