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를 찾아서II(180504~06)

도솔산인 2018. 5. 7. 17:09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上流庵址를 찾아서II(180504~06)

 

   : 20180504~ 06

   남사마을 - 산천재 덕천강 정자(泊) - 새재 독바위골 - 甕巖(진주독바위) - 영랑대(泊) 장터목 - 중산리

   : 4(미산님, 조박사님, 熊乭子)

   : 아침 최저 기온 10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접한 것은 오래 전이지만, 2015919일 조개골 상류에서 지산팀 슬기난님의 행랑굴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서 원문을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작은조개골의 행랑굴에 대한 의문을 나에게 던졌고, 나는 고전번역원에 들어가 원문을 다운받아서 20여일에 거쳐 촘촘히 읽어 내려갔다. 아마 이날이 치밭목에서 '지리산 산길따라' 정기산행일로, 이때에 중봉에서 도필락님을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이런 인연으로 산학동자님과 2015103112일로 방곡 공개바위에서 삼열암으로 올라와서 새봉으로부터 오봉리까지 감수재의 하산 길을 확인하였다.

상류암에 대한 답답한 마음에 수행자 淸風人에게 독바위 사진을 보내고 폐암자 터를 묻자, 淸風 先生曰 '독바위 동남쪽 300m~350m지점에 큰 바위 아래 숨은 기도처가 있다. 일반 사람들은 근접해도 발견하기 어렵다. 백두산의 기운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두류산(상봉)에서 뭉쳤다가 중봉 하봉 영랑대 동부능선으로 이어져 독바위에서 소멸하는 곳이라, 이 자리에서 수행을 해도 득도하기 어려운 자리다. 두 개의 폐암자 터가 있다.' 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였고 상류암에 대한 궁금증만 날로 증폭되어 갔다.  

 

지난해 점필재길을 2회 완답한 후, 모든 관심이 상류암으로 쏠리게 된다. 작년 923일 영랑대에서 시간차로 비켜간 마등자님의 부음 소식(104)을 듣고 105일 전차군단 마등자님의 시그널을 회수하고 연거푸 4(1004~05, 1021~ 22, 1029, 1202~03)에 거쳐 甕巖(진주독바위)을 찾았다. 박여량은 161096일 두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으로 내려와 1박을 하였고, 유몽인은 161143일 두류암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석문을 지나 옹암을 향했기 때문이다. 일련의 답사 과정에서 두류암의 위치(지산대 아래)를 추정할 수 있었고, 石門에 대한 의혹은  이재구 선생이 말끔히 풀어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의 말에 휘둘리어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수준이다. 서툴지만 극진한 예로 대했는데, 口無完人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을 보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난해 1219일 대둔산 석천암에서 심야에 6m정도나 되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절벽 아래로 잡아당겼고, 기어서 겨우 올라왔으나 재차 다시 추락하여 다음날 새벽이 되어 119헬기로 충남대학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다. 1, 2번 요추 압박골절 진단을 받고 40여 일간 입원을 하였고, 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였다天山스님이 병문안을 오셔서 '석천암에 15년 있었는데, 이런 살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 죽은 줄 알았다. 이것은 術士의 장난이다.'라고 하면서 사람에게 살수를 쓰면 그 능력은 일시에 소멸되니, 사람에게는 절대 쓰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모든 것이 멈추어진 병상에서 인고의 시간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모든 번뇌와 분노를 잠재웠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은 干支에서 하루 차이가 있다. 이것은 엄연한 감수재의 오류다. 그리고 국역본의 오류는 없다. 한 가지 是年是月是日로 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같은 해 같은 달 그믐'으로 읽었고, 田分에서 은 박여량 선생이 '동방이라는 의미'(淮南子)로 쓴 것 같다. '함양과 산음의 두 갈래 길이 동쪽으로 나누어지는 곳이다.'라고 보았다. 추가로 너럭바위를 로 수정해 보았다.

 

☞ 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암자 서쪽에는 ()가 있는데(), () 위에는 檜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다.

 

 

만세력바로가기http://afnmp3.homeip.net/~kohyc/calendar/index.cgi

 

허리를 다쳐 몸을 추스르기가 불편하지만, 지난 325일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과 불일폭포 일원을 답사하였다. 나는 불일폭포가 학의 형상으로 청학동 이야기의 근원이라는 설명을 하였고, 완폭대에서 불일폭포로 내려가는 옛길을 내려가 보았다, 그런 인연으로 불일암과 관련된 유산기 30편 정도를 발췌하여 보내주었고, 유산기를 완독한 조○○씨가 다음날 㹳巖(오암:원숭이바위) 洪淵(홍연)李彦憬(이언경)의 각자를 사진으로 보내왔고, 이어서 417일에는 완폭대(翫瀑䑓) 각자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나는 428일 화개동천을 찾아 의신암터와 세이암, 그리고 삼신동 각자를 둘러보고, 29㹳巖(오암:원숭이바위)완폭대(翫瀑䑓) 각자를 직접 확인하였다. 조선생에게 유산기를 읽은 뒤, 쌍계사에서 불일암까지 모든 바위들을 손으로 만져보며 각자를 찾았다는 후일담을 듣고, 余曰 '평소 쓰레기만 줍다가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완폭대라는 보물을 주웠구려.'라고 을 하였다. 내가 완폭대 사진을 이재구 선생에게 보냈고, 이선생은 이심전심 내 의도대로 51일 완폭대를 확인하신 후, 완폭대 각자를 풀어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다.

 

각설하고 나는 상류암에 대하여 눈에 불을 켜고 찾지는 않았지만, 산행의 버킷리스트에서 항상 존재했기에, 독바위를 주시하는 과정에 마등자님이 청이당능선에서 독바위를 담은 사진이 상류암에 다가서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그와 함께 독바위능선에서 상류암을 찾기로 약속하였지만, 그는 고인이 되어서도 그 약속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는 시그널 부착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붉은 전차군단의 시그널이 늘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아무튼 413일 남사마을에서 이호신 화백을 만나 점심을 먹고, 선비기념관에 들렀다가 사천 완사의 미산재에서 1숙을 하고 덕산에서 일행들을 만났는데, 그날은 마침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종일 70mm 내린다고 한다.

 

414일 아침 장대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臭田 선생과 우리는 독바위양지 계곡으로 들어섰다. 지리산길지도에는 마을 터로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분명히 마을 터는 아니다. 길이 끊어질듯 이어지다가 너덜지대를 지나고숯가마 터와 산막 터를 지나면 새봉과 독바위 사이 안부가 나온다. 臭田 선생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점필재가 독바위를 우회한 곳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후에야 깨달았다. 박지에서 산죽은 송곳이 되어 젤트 바닥과 매트리스를 뚫고 엉덩이와 등을 찔러왔다. 그리고 핸드폰이 여러 번 충전을 해도 금방 방전되는 이상한 경험도 하였다. 새벽에 부산에서 하동 옥종 출신 셰프 조중제 선생이 직접 초밥을 공수하여 산중진미의 진수를 선보였다.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를 찾아서I(180414~15)

 

아침에 독바위골에서 臭田 선생께서 진주암에 대한 말씀을 자꾸 하였지만, 나는 오로지 상류암에 대한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했다. 계곡이 완만해지고 왼쪽 능선 안부에 이르러 배낭을 내려놓시더니,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라고 하셨다. 한 눈에 봐도 암자터라는 것이 역력했다집채만 한 바위 아래에는 샘이 솟아나오고, 거대한 바위 슬랩과 바위군 아래 숨겨진 암자 터의 앞과 뒤편의 석축과 담장의 흔적,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쪼개진 맷돌이 상류암 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개골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나무사이로 써리봉이 조망되었다암자 뒤로 슬랩 위 조망바위에 올라서면 써리봉 중봉 영랑대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조망된다. 조개골로 내려오는 길은 묘운눌혜, 혜보가 출입했던 길인 것이다. 이후 51일 도필락님과 熊乭子가 이곳을 2차 답사한 후에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길이 약 70cm정도 되는 약간 휜 쇠몽둥이가 법당에 범종을 거는 종 틀의 鐵椎(쇠몽둥이)라고 추정하였고, 상류암 암자 터라는 확증의 유물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鐵椎(쇠몽둥이)는 몰매를 맞고 캠샤프트로 밝혀짐.

 

 

산천재

 

 

 

 

 

 

 

 

나는 3차 답사를 하기위해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을 다시 읽었고, 熊乭子에게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산천재에 둘러 내일 올라갈 상봉과 중봉을 바라보고, 덕천강변 정자에서 덕천강의 세찬 물소리를 들었다. 가로등이 밝은 것을 제외하면 달빛이 젤트 안으로 들어오고, 최근에 洑를 막아 덕천강의 물소리가 잔잔하고 꽤나 운치가 있었다. 부사 성여신 등이 1622(광해군 14)~32(인조 10)에 편찬한 경상도 진주 읍지 진양지 산천조(山川條)에는천왐봉의 물은 법계사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을 거쳐 사제봉 아래 이르러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 또한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고 한다.하고 했다.

 

[원문] 成汝信  , 晉陽誌 1, 山川. “天王峯水 自法界寺 東流 由薩川村 達社祭峯下 東北流 爲薩川 又自鉏屹山 東流 由上流菴 達獐項洞 南流 爲三壯川 與薩川 合于兩堂村前 是謂德川

 

나는 상류암을 가기위해 진양지를 읽고 삼장천과 살천이 양당촌 앞에서 합류하는 덕천강 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나는 진양지에 나오는 위 내용을 보고 '서흘산조개골이 보이는 곳에 상류암 터가 있다.' 는 추정을 하였고, 진양지(晉陽誌)불우조(佛宇條)상류암지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在獐項洞上, 亂後重建산청군지(山淸郡誌)내 고장 전통(傳統)寺址 목록 上流庵址는 삼장면 油坪里에 있다라는 내용에서 독바위 주변 또한 유평리라고 이해하였다.

 

 

상류암 터 뒤 조망바위

 

 

비들기봉과 서흘산, 중봉과 하봉, 영랑대

 

산행 첫날은 날씨가 맑지만 다음날은 종일 반갑지 않은 비소식이다. 23일 우중산행의 출발 중량은 조박사 18.2kg, 熊乭子 18kg, 미산 선생님 15.25kg, 나는 16.2kg 남짓하니, 남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 히는 2박 3일의 중량이다. 철모삼거리에서 청이당으로 올라가다가 우측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상류암까지는 약 400m 지난 번 하산한 길은 초입이 키 큰 산죽길이라 계곡을 택했다. 다시 찾은 상류암 터 샘물은 여전히 넘쳐흘렀고 엄청난 바위群은 말없이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 박여량 선생의 일행이 저녁과 아침 식사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사체의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재계의 샛별 하림그룹 전무이사 조 박사님이 타주시는 차를 마신 후, 암자터 뒤 전망대에 올라 남으로는 중봉과 써리봉(서흘봉) 비둘기봉을, 동으로 웅석봉과 달뜨기능선을 조망하고, 2차 도필락 답사팀이 발견한 쇠막대를 확인한 후, 도로 제자리에 묻어 놓았다. 상류암 숯가마 터 앞에 홀로 피어난 백작약 한 송이를 보고... '당시 상류암 뜰에도 백작약이 피었을까?'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박여량은 9월이니 어림 턱도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백작약

 

 

 

 

맷돌

 

 

주춧돌 or 탑(?)

 

 

 

 

묘운과 눌혜의 요사체에서 서쪽 암자로 가는 길

 

이어서 묘운과 눌혜의 거처였던 상류암 요사체에서 저녁을 먹은 후 박여량 일행이 횃불을 들고 잠을 자기위해 서쪽 암자로 이동한 길을 추정해보았다. 다음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서술된 내용이다.

 

. 9/6(정미) 양력 16101022() 간지의 오류<丁未日이 아니고 戊申日>  

[원문] 食罷妙雲請曰少西有庵稍精灑且種菊盈庭黃白多開可往宿焉余與德顒汝昇惠甫耐困而起秉火而行諸君皆從之庵與菊果如雲所言火來照而觀之旣又取一二莖揷甁而置之床花影婆娑焉諸君辭去上流余四人遂就寢

  

[국역]저녁을 먹은 뒤 묘운이 청하기를 이곳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한 암자가 있는데, 제법 정결하며 뜰에 가득 국화를 심어 노란색, 흰색 국화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덕옹박여승혜보와 함께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횃불을 들고 그 암자로 갔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왔다. 가보니 묘운이 말한 대로 암자는 정결하고 국화는 만발해 있었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가며 꽃을 구경하였다. 그런 뒤에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었더니 꽃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상류암으로 간 뒤 나와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암자 서쪽 檜(노송)나무 군락(독바위에서)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덕옹), 지족당 박명부(여승) 그리고 암자의 승려 혜보가 상류암의 서쪽 암자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암자 서쪽에는 ()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위에는(수정)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라는 내용을  토대로 암자 서쪽에 있는 대를 추정해 보았다. 나뭇가지에 가려 사진에 담기는 어려우나, 그 자리에는 아직도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여기에서 나무는 노송나무를 가리킨다.

 

. 9/7(무신) 양력 16101023() [상류암에서 초령까지] 간지의 오류<戊申日이 아니고 己酉日>

 

[원문] 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

 

[국역] 맑음. 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암자 서쪽에는 ()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위에는(수정)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괴목

 

 

 상류암 수행자 기도터 추정
암자 터 뒤 암괴

상류암 수행자 기도터

 

인공 석축흔적

 

 

암자 앞 숯가마 터

 

 

기도터에서 상류암지 가는 길의 흔적(100여미터)

 

 

점심을 먹은 반석

 

 

독바위 가는 길

 

 

 

 

상류암터를 나와 계곡으로 오르다가 물이 끝나는 지점(막탕)에서 점심 식사 장소를 찾다가 눈에 들어온 평탄한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동쪽으로 능선 안부가 가까이 있고, 산죽 밭 위로 길의 흔적을 보여서 熊乭子와 올라가보니, 숯 가마터가 있었고 바로 위 암벽 아래 수행처 자그만 산막 터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산죽 밭으로 상류암 터로 이어지는 희미한 길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머물던 승려가 숯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했는지, 폐사 이후 숯 굽는 사람들의 흔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수행자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었고, 이곳에서도 서흘산이 올려다 보였다. 臭田 선생이 내게 말한 암자터의 실체가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眞珠菴은 불교에서 寶珠를 의미하는데, 독바위의 형상이 寶珠 眞珠로 이해가 되고, 독바위 위의 태양 문양 또한 보주가 발하는 광명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개골의 이름 또한 불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진주독바위는 지명의 晋州가 아니고 불가에서의 眞珠(寶珠)이며, 옹암은 儒子들이 독(항아리)의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佛家의 眞珠와 儒家의 甕巖이 결합하여 眞珠독바위(甕巖)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을 好詐家들이 산청독바위라고 창지개명하였으니, 지리산 黑豚이 웃을만한 일이 아닌가. 

 

 

眞珠는 佛家, 甕巖(독바위)은 유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진주독바위인 것이다.

 

 

 

 

by조자룡님

 

 

 

 

 

독바위로 올라가는데 머리를 빡빡 깎은 청년이 내게 인사를 했다. 어름터 독가에 사는 박준현 군이다. 朴君에게 어름터에서 독바위 石門으로 올라오는 최단 코스를 물으니, '올라와보지 않았지만 한 번 길을 찾아보겠다.'라는 답을 하였다. 감수재와 점필재는 독바위를 우회하였지만, 이재구선생이 추정한 1611년 유몽인의 석문과 1922년 권도용의 금강문, 1924년 강계형의 석문&통천문은 이명동칭으로 판단된다. 박준현군과 石門을 다녀오는 사이 일행들은 먼저 출발했고, 일행들은 두류암 갈림길에서 멈추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여량 선생 일행이 이곳에서 길 없는 길로 상류암으로 내려갔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두류암 갈림 길

 

 

청이당 계석에 쉬면서 박준현군에게 등산화를 갖다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행랑굴로 향했다. 행랑이라는 어휘를 이해하지 못했다가 장대비가 내리는 어느 날 불현듯 이곳을 찾았고, 바위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서야 행랑굴을 이해했으니 이 세상에 대가가 없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산행기로 인해 非可當資들에게 내침을 당하고 댓글부대에게 비난을 받았으나, 이 일로 나는 쓸모없는 것을 잃었고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170703)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48 

 

 

 

행랑굴, 개운암, 마암산막터

 

 

鄕里의 유생인 生員 배찬(1871년)과 進士 강계형(1924년)의 유산기에서 마암이라고 했지만, 어찌 사림의 종장인 점필재 김종직(1272년) 선생이나 감수재 박여량(1610년) 선생에 비하랴.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종이 있다.'하였거늘, 시대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고  先과 後가 있으니, 사물의 이름 또한 이치가 있고 연유가 있는 것이다. 지리의 新작명가들이 붕당을 만들어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여기에서 馬巖은 말봉을 가리키며 '산봉우리암'이다. 그래서 말봉인데 말봉이라는 지명도 슬그머니 지도에서 사라졌다.

 

 

 

by조자룡님

 

 

 

 

 

 

 

광란의 영랑대

 

 

 

 

 

 

 

 

 

 

 

 

 

 

 

 

 

 

 

 

 

행랑굴을 나와 1618봉 안부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지더니 모처럼 찾은 영랑대의 밤은 광란의 돌풍이 몰아쳤다.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젤트와 타프가 펄럭였지만, 그럭저럭 버텨준 영랑재군과 타프양의 거친 몸부림과 숨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조 박사님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실망이 크겠지만나 또한 이런 광풍의 밤은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다. 밤 사이 태극을 하는 사람들이 몇 차례 지나갔고, 아침까지도 비바람과 돌풍이 그치지 않았다. 해유령의 선암 부처바위에 술을 한 잔 붓고, 중봉과 상봉을 쏜살같이 통과하여, 장터목 취사장에서 점심을 먹고 대피소 2호실(등산객들에게 개방함)에 들어가 옷을 말리는데, 고맙고 친절하게도 공단직원 이○○씨가 커피를 내오더라. 이곳에서 두 시간 넘게 휴식을 취한 후, 향적암 초입을 놓쳐 1박을 포기하고 중산리로 내려왔다. 조 박사님과는 작년 독바위에 이어 두 번째 박산행이다. 미산 선생님은 조박사님을 신미산클럽 회원으로 환영하셨고, 지난 해 5월 점필재길 마지막 날 세석에서 만난 인연인데, 10월 감수재길을 하다가 하봉헬기장에서 다시 만났다. 지리에서 만난 인연으로 조 박사님은 산행의 버킷리스트 하나인 영랑대 박 산행을 실행에 옮겼다. 계포일락 우천불문 산행을 함께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