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불일폭포 완폭대 각자와 옥소암, 영대암, 불출암(180428~29)

도솔산인 2018. 4. 29. 23:28

불일폭포 완폭대 각자와 옥소암, 영대암, 불출암(180428~29)



▣ 일   시 : 2018년 04월 28일 ~ 29일

▣ 코   스 : 삼신동 - 세이암 - 의신사지 - 하동분소 생태공원 - 쌍계사 - 㹳巖(오암) - 완폭대 - 불일암 - 비로봉 - 시관원(옥소암 추정) - 도성암(영대암 추정) - 불출암 - 쌍계사

▣ 인   원 : 3명(송연목씨, 조선생)

▣ 날   씨 : 맑음



 불일폭포의 완폭대 각자와 성불심원 옥소암, 영대암을 확인하기 위해 화개동천에 들었다. 의신 마을 조선생의 안내를 받아 의신암터와 세이암, 삼선동 각자를 둘러보고, 화개장터에 나가 머위를 사다가(노점상 할머니에게 얻음) 저녁을 먹고, 국립공원 하동분소 자연생태공원에서 야영을 하였다. 3월 25일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과 불일폭포를 답사한 후, 조선생은 내가 보내 준 불일암 관련 30편 가까운 선인들의 유산기를 모두 읽고, 남명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㹳巖(오암:원숭이바위)洪淵(홍연)과 李彦憬(이언경) 刻字를 찾았다, 이어서 지난 4월 15일에는 옛 선인들의 유산기에 열네 번이나 등장하는 瀑䑓 刻字를 기록상 1807년 이후 211년만에 발견하였다. 이번 산행에서 수술로 몸이 불편하신데도 함께 玩瀑䑓 刻字를 확인하고, 성불심원의 옛터인 옥소암과 영대암터까지 살펴보고, 불출암에서 내원 계곡을 따라 내려와 배낭을 내려놓고 나는 吳翮(오핵)의 장원암 시를 읊었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의 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여기에서 청학봉은 비로봉(백학봉)을 가리킴.






화개동천 지리은자의 智隱堂


三神洞 刻字


洗耳嵒(세이암)



回瀾石(회란석) : 물결이 휘감아 도는 바위


명암 정식 : 1743년(계해년, 영조 19) 426일 세이암을 유람함.


濯纓臺(탁영대)


1489년 濯纓(탁영) <金馹孫>선생의 [두류산기행록]에는 洗耳嵒과 濯纓臺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4월 25일 영신사를 출발해서 덕평봉에서 내려와 의신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신흥사에 이르러 '절 앞에 맑은 못과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저녁 내내 놀 만하였다.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서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빼어나 유람 온 사람이 돌아가기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라고만 기록하였지 洗耳嵒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어떤 유산기에도 濯纓臺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막연하게 김일손선생의 호가 濯纓이라 하여 濯纓이 쓴 글씨라고 추측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전국의 명산대천에 濯纓臺가 수없이 많은데, 김일손 선생의 글씨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한말에 새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閔致完(1838~1910)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현(君賢). 호는 지강(芝岡). 의금부도사, 의영봉사를 역임함.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지강정사(芝岡精舍)를 지어놓고 34인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은거생활을 함. * 許元拭 : 조선말기의 문신 사간원 찰방. * 허식(許湜) : 미상.




세이암 각자 전시장


全崔興天命(?) : 해괴망칙한 자의 짓이다.


의신사지 ○海堂 부도탑





비로봉


慈月和尙放光塔


佛(?)


敭海東故眞監禪師碑(敭은 揚의 古字이고 唐의 이체자)



沃泉


喚鶴臺


(?)圭


㹳巖(오암 : 원숭이바위)


㹳巖의 刻字 :  乙卯(1555년 명종10년)秋 洪淵, 李彦憬



(탁본:180417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



間有一巨石. 刻有李彦憬. 洪淵字. 㹳岩亦有刻柿隱兄弟字 : 사이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언경’, ‘홍연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㹳巖에 또한 시은형제(柿隱兄弟)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1558<조식>선생의 유두류록]  * 洪淵(생몰년 미상)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원(德源).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 李彦憬(이언경) : 조선 명종 때의 문신. * 㹳 : 원숭이오. 시은형제(柿隱兄弟)각자는 풍화되어 보이지 않았음.






공병으로 지은 봉명산방 별채의 흔적


1974년~1977년 이곳에 살았던 서재덕씨가 만들어 놓은 구유


趙明師 : 조선 후기의 문신. 승정원 일기 등에 이름이 보임.


1807년 4월 4일(여정 3일째) <하익범>과 불일암을 찾은 趙明師에 대한 기록이다. 바위 한 쪽에 조명사(趙明師, 조복(趙濮))가 이름을 새겼다.(石面有趙明師題名)'<하익범>의 [遊頭流錄]  * 儀 : 조선 시대, 통례원 속한 종구품 인의 벼슬. 察訪(찰방) :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의 외직 문관 벼슬.




金侃[1653(효종 4)~1735(영조 1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1693(숙종 19) 사마시에 합격. 171058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들어감. 저서로는 죽봉문집(竹峯文集)2책이 있음. [출처 Daum백과]

: 미상

金兌一[1637(인조 15)~1702(숙종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추백(秋伯), 호는 노주(蘆洲). 1660(현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장령(掌令헌납(獻納문학·보덕(輔德)을 차례로 역임함. 저서로는 노주집(蘆洲集)이 있음. [출처 Daum백과]


1748년 이주대는 유두류산록에서 완폭대에  학사(學士) 김태일(金兌一)이 새겨져. 學士는 홍문관의 벼슬 이름이며, 그는 예천 사람으로 1685년 진주목사를 지냈다. 그의 형 김웅만(金雄萬)의 이름도 나란히 있다. 출처 : 지리99 완폭대(翫瀑臺)를 찾아서 글쓴이 : 엉겅퀴


玩瀑䑓


내가 본 유산기 자료에는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처음 보이고,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를 끝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는 어느 유산기에도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玩瀑䑓(완폭대)는 완전히 사라졌다가 211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아래 표참조)





翫瀑䑓(탁본:180501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





佛日庵 一龍스님



비로봉



사관원 마당은 축대를 쌓아 넓혔다고 함.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直下數里. 玉簫庵. 庵在斷巘絶壁上. 鑿崖凌虛而架棟設檻. 縹渺浮空. 翬飛鳥翼. 有若畫圖之中. 殆非尋常僧房佛屋之比也.) [1618<조위한>遊頭流山錄]


* 巘 : 낭떨어지헌 가파를헌



사관원(옛옥소암 추정)



백운산


1651년 옥소암(玉簫庵)을 다녀간 오두인(寅, 1624~1689)의 父 오숙(吳䎘, 1592∼1634)은 1631년  이곳을 다녀가면서 옥소암시 외에도 佛日, 雙磎, 石門 등의 기행시를 남겼다. 오숙(吳䎘)의 오율시를 보면 옥소암에서 유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와 계부 그리고 오두인이 다녀간 옥소암은 오숙의 가문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 1631년(인조 9) 오숙(吳䎘)의 기행시



玉簫庵 (옥소암 ) - 오숙(吳䎘)

 

獨夜邀仙鶴 (독야요선학 ) : 홀로 있는 밤, 선학을 맞아

淸晨禮釋曇 (청신예석담 ) : 맑은 새벽, 부처님께 예배한다

乾坤一方問 (건곤일방문 ) : 천지 안의 어느 곳을 찾으니

今古此伽藍 (금고차가람 ) : 예나 지금이나 이 절간이로구나

雰氣生危檻 (분기생위함 ) : 안개 기운은 높은 난간에 피고

香煙擁小龕 (향연옹소감 ) : 향불 연기는 절 탑을 감싸는구나

從來貪佛日 (종래탐불일 ) : 종래에 불일암을 탐내었는데

更別玉簫庵 (갱별옥소암 ) : 다시 옥소암을 떠나야 하는구나


출처 : 한시속으로 http://cafe.daum.net/heartwings






도성암(영대암?)



불출암터


불출암터 추정 석축




오두인(吳斗寅)季父 오핵(吳翮, 16151653)1646년 옥소암을 다녀간 후, 청학동(내원골) 계곡 하류의 바위에 장원암(狀元巖) 를 남겼는데, 조카인 오두인(吳斗寅)<두류산기>에 전한다, 청학봉(비로봉) 능선 길에서 옥소암으로 직접 내려가는 길이 있고, 옥소암에서 몇 백보 가면 영대암, 영대암에서 몇 백보 가면 불출암으로 이어지더라. 바위는 썩지 않으니, 吳翮(오핵)의 장원암시는 불출암에서 쌍계사 사이에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