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화개동천의 불입문자 불일폭포(180324~25)

도솔산인 2018. 3. 26. 00:46


화개동천의 불입문자 불일폭포(180324~25)


▣ 일   시 : 2018년 03월 24일 ~ 25일

▣ 코   스 : 국사암 주차장-불일폭포(원점회귀)

▣ 인   원 : 8명(민대장님, 송연목님, 정혜종님, 조봉근님, 조만종님외 2인)

▣ 날   씨 : 포근함



불일협곡의 청학연과 소은암(170909~10)



 작년 3월초 불일폭포 일원을 답사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불일폭포 주변을 찾았다. 지난해 9월 <솔박사>님과의 답사에서 나는 학담과 학연에만 집착해 물만 보고 산을 보지 못하였다. <솔박사>님에게 '불일폭포가 마치 학의 형상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올려다보니 영락없는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이었다. 선인들의 어떤 유산기에도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청학의 발견을 축하라도 하듯 불일폭포는 영롱한 오색 무지개를 연출했고, 그후로 며칠간 가슴이 뛰는 것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청학동, 청학선인, 청학봉, 청학연, 학담, 학암, 백학봉, 환학대 등 학의 근원이 불일폭포였던 것이다. 선인들의 유산기를 백 번 읽고 불일폭포를 백 번 답사한들 무엇하랴. 불일폭포에서 청학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니 말이다.


 1558년 조선 중기 세 번이나 불일암답사한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은 불일폭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학연) 안에 신선의 무리와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그집에 몸을 웅크려 숨어서는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不知其中隱有仙儔巨靈. 長蛟短龜. 屈藏其宅. 萬古呵護. 而使人不得近也.]】  巨靈은 물의 신(河神 : 황하의 수신)으로 大華山과 首陽山을 큰 도끼로 찍어 두 산을 쪼개어 龍門을 열어 놓아 황하수를 흐르게 했다는 전설의 신인데, 남명 조식선생은 유두류록에서 황하의 수신 巨靈이 도끼로 쪼개어 비로봉(백학봉)과 향로봉(청학봉)으로 나누고, 불일폭포와 학담과 학연, 불일협곡을  만들었다고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李白(701~762)의 "西嶽雲臺歌送丹丘子(743)" 시에도 "황하의 수신 巨靈이 포효하며 두 산을 쪼개어 / 큰 물결 화살 같이 뿜어 東海로 쏘아 올리네。[巨靈咆哮擘兩山 /  洪波噴箭射東海] "라는 시구에 巨靈이 나오는데, 과연 남명의 설명대로 황하의 수신 거령(巨靈)이 도끼로 향로봉(청학봉)과 비로봉(백학봉)을 둘로 쪼개어 불일폭포의 물을 학담과 학연을 통해 불일협곡으로 흐르게 하였는지... 이번 산행에서 불일폭포 아래 학담에 직접 내려가 올려다 본 불일폭포는 거대한 돌 항아리 속으로 마치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 가히 장관이었다.


* 巨靈 : 하신(河神, 물의 신·황하의 신). 큰 도끼로 大華山과 首陽山을 찍어 龍門열어 놓아 황하수를 통하게 했다고 함.


 대신 남명의 청학에 대한 설명은 참으로 模糊(모호)하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솟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으로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절벽으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峯)으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東有崒嵂撑突. 略不相讓者曰香爐峯. 西有蒼崖削出. 壁立萬仞者曰毗盧峯. 靑鶴兩三. 棲其岩隙. 有時飛出盤回. 上天而下.]】라고 하였으니, 남명 선생이 청학을 직접 목격한 것인지 안내한 승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이후에 불일암을 다녀간 선인들의 유산기에도 청학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청학을 이미 사라졌다고 기록하였고 목격한 기록은 없다.


 하기야 청학은 도가에서 태평성대가 오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이니 남명(南冥)이 목격했을리가 만무하고 전설 속의 스토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운 최치원과 청학동을 이해하는데 불일폭포가 청학의 형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청학동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일폭포는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石門 아래 鶴潭과 鶴淵을 만들었고, 불일협곡 白鶴峰의 깎아지른 암벽은 거대한 비로나자불의 형국으로 학 머리 형상인 靑鶴峰은 毘盧峰을 향한 香爐인 셈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전설에 가까이 접근하여 그 근원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관심있는 사람들과 생각을 소통하고 사유하며, 경이로운 자연의 현상과 전설을 이치에 맞게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청학동이라는 이상향 이야기는 불일폭포(학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청학 스토리의 근원이며 엄연한 팩트이다.


1899년 하겸진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불일폭포에서 분명 학의 형상으로 보았다.【마침내 넝쿨을 잡고 벼랑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등과 배는 모두 긁히었다. 억지로 나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즉시 누워 편안히 쉬면서 그들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사면에는 모두 높고 커다란 바위가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찬바람이 뼈를 저미고 하얀 안개가 하늘로 퍼져 가는데 갑자기 한줄기 웅장한 물결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처음에는 100() 길이의 무지개 같더니만 중간에는 1만개 밝은 구슬로 나누어 흩어졌다. 다시 천 갈래로 번쩍이는 우레로 바뀌었으며 가장 아래는 은기둥이 물결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참으로 조물주가 재미있게 만들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니 얼굴빛이 변하였다. 단지 입을 쩍 벌리면서 기이하고 기묘하다고 감탄할 뿐이었다. 내가 시 한 수를 짓기를 '알알이 튀어 오르는 구슬 멀리서 셀 수 있고 훨훨 학이 날아 다니는듯한데 가까이 가니 학이 아니구나.' 】 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사실적인 묘사인가.


 그동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국립공원의 환경과 생태복원 사업을 햐면서 규제와 단속이라는 몸살을 앓으면서도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 앞으로는 한발 더 나아가 학술조사 차원에서 지리의 인문과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공단 직원 분들이 휴일도 반납하고 불철주야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금년 하동군에서 청학동 복원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일협곡의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구름 다리를 놓아 관광의 명소를 만든다는 놀라 달아날[狘(헐)] 뉴스가 보도 되었다는 이야기며, 현재 마족대처럼 지명에 대한 오류의 문제와 앞으로 난개발로 야기되는 재앙을 함께 염려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말씀대로 함께하신 분들과 청학의 형상을 보았으니, 시공을 초월하여 물도 보고 산도 보고 사람도 보고 세상도 보고 또한 청학도 본 것이 아닌가(看水看山看人看世又看靑䳽)  끝.




* 마족대의 지명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1. 1697년 이명배의 남정록 : 냉연정(冷然亭)

한 승려()가 길을 가리키며 환학대(喚鶴臺)로 이끌었다. 대는 봉우리의 한가운데 꼭대기에 있었는데 곧 仙人이 학을 불렀던 곳이다. 대 아래에는 정자가 있는데 환학이라 이름하였다. 산행이 너무 힘들어 난간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들었고 이어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 학이 뚜루루 하고 길게 울며 날아와 이 대 위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고 머뭇머뭇 하다가 힘차게 몸을 뻗고는 하여 나도 표연히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하였다. 스님(頭陀)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사이에 반드시 청학동이 있을텐데 스님은 거기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가? 나를 위해 가리켜 주시게나.”라고 하였다. 스님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여기서 청학동까지는 아주 멀지는 않지만 선연(仙緣)이 있은 연후에야 볼 수 있으니 어찌 쉽게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이 俗客을 기롱하는 것이 매우 가소롭구나. 이어 냉연정(冷然亭)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2. 1744 황박의 두류일록(頭流日錄) : 냉연대(冷然臺)

96경진일. 일찍 일어나 두루 구경하였다. 절집은 크고 아름다웠으며 불상은 크고 높았다. 팔영루(八詠樓)와 청학루(靑鶴樓)를 지나 법당으로 갔다. 앞뜰 가운데에 큰 석비 하나가 있었는데 최고운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직접 글을 짓고 썼다. 또 향로전(香爐殿)의 벽장에 고운의 영정이 있었다. 종을 보았는데 위에는 판자로 덮여 있었다. 열다섯 구역 중, 위에는 불일암이 있고 중간에는 국사암이 있으며 또 환학대(喚鶴臺)냉연대(冷然臺)가 있고 대 위에는 용마(龍馬)의 발자국이 있다.[이재구선생 국역]


3. 1744년 <黃道翼>의 頭流山遊行錄 : 냉연대(冷然臺), 마적암(馬跡巖)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이 조금 안 된다. 마침내 대에 올라 이리저리 거닐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대나무 숲의 가운데로부터 큰 소리로 학을 부르니 승려가 희롱하여 대답하기를, “두 마리의 학이 오늘 하늘에 조회하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알지 못하겠구나. 어떤 사람이 학을 불러 유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여 대의 이름을 실제로 느끼게 하는가? 또한 기이한 일이다. 5리를 가니 냉연대(冷然臺)가 나온다. 마적암(馬跡巖)이라고 부른다. 바위 위에는 용마(龍馬)(*)의 자취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선이 말을 타던 곳이라고 하니 매우 허황되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4. 1883년 <전기주>의 유쌍계칠불암기 : 마족대(馬足臺)

다시 불일폭포를 묻자, 늙은 승려가 한 가닥의 희미한 길을 가리켰다. 옷자락을 끼워 넣고 지팡이를 힘차게 움직이며 나무를 더위잡고 올라갔다. 고개 하나를 넘어 길가로 가니, 큰 바위가 솟아 있었는데, 앞면에 환학대(喚鶴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또한 고운의 필적인데, 사람들에 의해 새로이 훼손되어져 묵적이 오히려 모호했다. 2-3 담지(擔地)를 올라가니, 마족대(馬足臺)가 있었다. 옛날 고운이 여기에서 말을 달렸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고 올라 절정에 이르렀는데, 10리를 걸은 만큼의 다리 힘을 소비했다.


* 용마(龍馬, dragon horse)

BC 2200년 전의 요순(堯舜)시절, 대홍수가 발생하여 섭정을 하고 있던 순()은 우()에게 치수를 명한다. 우왕이 낙양의 남쪽 황하 지류인 낙수(落水)에서 치수 공사를 하던 중 강 복판에서 큰 거북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거북의 등에 신비한 무늬가 그려져 있어 궁리 끝에 무늬의 점을 세어 기호로 나타낸 것이 낙서(落書)이고, 하도(河圖)는 황하에서 용마(dragon horse)의 발자국에 찍힌 그림(혹은 용마가 몰고 온 두루마리에 적힌 그림이라고도 함)에서 유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