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0년 박여랑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좇아서(171021~22)

도솔산인 2017. 10. 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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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박여랑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좇아서(171021~22)

 

 

일 시 : 2017년 10월 21일 ~ 22일[음력 9월 02일~03일]

코 스 : 백모당(백무동) - 우리동(하동바위&참샘) - 제석당 - 천왕당 - 증봉 - 소년대(하봉) - 행랑굴 - 상류암(미답) - 초령(새재) - 방곡상계(오봉리)

▣ 인 원 : 출발(3명 : 솔박사, 산수담), 박지합류(3명 : 熊乭居士, 하늘바위, 청학낭자), 만난사람(조자룡님, 산학동자)

날 씨 : 맑음

 

 

  1610년 감수재 박여량선생의 두류산 유람 일정

 

   • 9/2 : 함양 도천- 어은정- 목동 박춘수의 집(1)

   •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 탄감촌(휴천면 문정리) - 용유담 - 군자사(마천면 군자리)

   • 9/4 : 군자사 - 백모당 - 하동암(우리동) - 옛제석당터 - 제석당

   • 9/5 : 제석당 - 향적사(서천당) - 중봉(제석봉) - 천왕봉 - 천왕당

   • 9/6 : 천왕봉 - 甑峰 - 마암 - 소년대 - 행랑굴 -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 - 상류암

   • 9/7 : 상류암 - 초령[사립재] - 방곡촌(方谷村) - 신광선(愼光先)의 정자 - 최함씨의 계당

   • 9/8 : 최함씨의 계당 - 엄뢰대(嚴瀨臺) - 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 -뇌계(㵢溪) - [남계(灆溪)척서정(滌暑亭)] - 도천 감수재(感樹齋)

 

 

지금으로부터 407년 전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읽고 그길을 좇아서 산행을 하였다. 박여량 선생은 1610년 9월 2일 함양 도천을 출발하여 어은정에서  고대 정경운을 만나 목동(현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박춘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留하고, 다음날 용유담에서 지족당(知足堂) 박명부 등 일행(

박명부,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이윤적 노륜

)과 합류하여, 9월 3일 군자사에서 1박을 하며 기생을 불러 거나하게 전야제를 치른다. 그리고 9월 4일 아침 군자사를 출발하여 백모당을 거쳐 于里洞(하동바위 인근)을 지나 제석당에서 1박, 9월 5일 여유있게 천왕봉에 올라 일몰을 본 후 천왕당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출을 본다. 다음날인 9월 6일 천왕봉을 출발하여 소년대(하봉)를 지나 행랑굴에서 점심을 먹고 동부능선을 거쳐 진주독바위 부근으로 추정되는 상류암에서 또 1박을 한 후, 9월 7일 초령을 지나 방곡의 상계(현 오봉리)로 내려갔다.

 

그동안 부분 답사를 통해 두류산일록에 등장하는 지명과 위치는 대부분 확인했으나 유독 상류암만은 미확인이라, 이번 산행에서 전 구간 답사를 통해 상류암의 위치를 다시 가늠해 보고자 산행을 계획하였다. 지난 10월 5일 진주독바위 능선으로 내려갔으나 그 위치를 찾지 못하였고, 오늘 새벽 일찍 김자준씨가 홀로 독바위 능선으로 내려가 한 시간 가까이 둘러보았지만 헛수고만 하고 올라왔다. 진주 독바위에 다시 내려다보니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으나, 그 확인은 다음으로 미루고 사립재를 거쳐 방곡의 상계 오봉마을로 하산을 하였다. 일행 중 한 분은 집안 행사가 있어 전날 얼굴만 보고 새재마을로 내려갔고, 하봉헬기장 해유령 선암에서 우연히 <조자룡>님을 만나 옹암에서 泊을 함께한 후, <熊乭선생>과 두 분은 새봉에서 헤어져 새재마을로 내려갔다. 동부능선은 만산홍엽으로 가을의 정취가 가득했고, 공교롭게 이번 산행이 음력으로 감수재의 산행 시기와 일치하여 407년 전 과거로 돌아가 당시 지리동부의 가을 風致을 느낄 수 있었다. 기꺼이 오봉리에서 산죽을 헤치고 사립재로 올라와 하산과 차량 회수를 도와준 <김자준>님과, 함께하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제석당 터

 

 

제석당터 낙서

 

 

 

-사진- <솔박사>님

 

 

향적암과 서천당 터

 

 

석굴[통천문]을 지나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船巖

 

 

소년대(하봉)                                                          -사진- <조자룡>님

 






 

1610년 박여량은 행랑굴, 1871년 배찬은 마암산막, 1877년 허유는 개운암이라고 하였음.

 

 


허유의 일행인 하용제 개운암 묵서의 흔적[1877년 허유의 <두류록>과 박치복의 <남유기행>에 근거]
 청이당터 석축 흔적 



독바위의 석양

 



 

 

 



 

독바위 주변의 산죽 밭에 사방으로 이어진 뚜렷한 길은 천길 낭떨어지로 이어져있다. 이 길이 빨치산들이 만든 흔적인지? 아니면 독바위 주변 암자에서 기거하던 수행자들이 걷던 명상과 사색의 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봉(上)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와(流) 지리산에서 가장 거대한 암괴가 솟아난 이곳 바위 아래로 내려가 그 규모를 살펴보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가 있다.

 

 

 

 

 

새봉

 

 

 

 

 

이곳은 새봉에서 사립재로 내려가는 새봉의 바위群에 위치한 길목으로 石門을 형성하고 있다. 1611년 유몽인 선생은 두류암에서 두 수의 시를 남겼는데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두류암에서 중  慧日에게 주고 修禪師에게도 보이다) 詩에 마지막 絶 1, 2句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明朝我向石門去 :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石門으로 떠나고 

師在頭流雲水間 : 선사는 두류산으로 雲水行脚 나서겠지

 

이 시구에서 石門은 과연 아디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우당 유몽인 선생은 두류암에서 石門을 지나 옹암(진주독바위)으로 갔다면 이곳이 바로 그 석문은 아닐까. 여기에서 두류암의 위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두류암의 위치에 대해서도 유몽인의 '頭流菴' 五律詩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니 유산기와 기행시를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다. [4/4 : 두류암→석문→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1박)]

 

 

 

 

 

 

 

 

 

 

 

 

1800년대 후반 산청군 생초면 고읍리(현상촌리) 거주하였던 錦溪 배찬(裵瓚, 1825~1898)1871년 9월 5일 박여량 선생이 하산한 길을 거슬러 천왕봉으로 올라갔다. 배찬의 [유두류록]에는 五峯村(오봉리), 扉峴(사립재), 艾峴(쑥밭재), 天女堂(청이당), 馬巖 山幕(현 마암), 中峰 山幕(중봉샘), 細磧平田(세석평전) 등의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는데, 현재의 지명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 배 찬(裵瓚)(1825~1898)

순조 을유(1825) 210일생. 1898년 졸 조선 후기 유학자교육자. 자는 禹瑞, 호는 錦溪, 본관은 盆城(김해) 향리에 錦溪齋를 지어 후학을 양성함. 본관은 분성(盆城)이고, 고읍리[古邑里 산청군 생초면 고읍리(현 상촌리)]에서 태어났다. 1870(고종 7) 봄 읍재(邑宰) 이만시(李晩蓍)가 학당(學堂)을 세우고 그를 교장(校長)으로 삼았는데, 매일 강회(講會)를 열어 유풍(儒風)을 흥기시켰다. 1874(고종 11)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1(一等) 2위로 합격하였다. 말년에 금계전사(錦溪田舍)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고 금계집(錦溪集)은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치량(閔致亮)의 발문과 하재구(河在九)의 발문이 붙어 있다. 금계집가운데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적정론(糴政論)」‧「군정론(軍政論)등은 국가 경영에 대한 견해를 논한 작품들이며, 부록(附錄)에는 그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 정보시스템]

 

 

* 참고자료 :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읽고

http://www.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11&wr_id=96211&sca=&sfl=wr_name%2C1&stx=%EB%8F%84%EC%86%94%EC%82%B0%EC%9D%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