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古靈臺

도솔산인 2017. 6. 21. 09:48

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古靈臺

 

지난 3월 불일협곡을 가기위해 독오당 <수야>님, <귀소본능>님의 산행기와  향로봉과 고령대, 비로봉에 관해서 <다우>님의 산행기 《향로봉과 비로봉 그리고 그 능선에 대한 고찰에 관하여》를 읽게 되었다. 향로봉과 비로봉은 대략 일치하지만 청학봉과 백학봉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상이한데, 특이한 발견은 향로봉을 <고령대>라고도 칭한다는 것이었다.   ()에는  본말(本)이 있고, 일(事)​​에는 처음과 끝(始終)이 있으니, 그 먼저와 나중을 알면 道에 가까울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听先後 則近道矣]”라는  대학의 한 구절처럼 선인들이 유산기에 남긴 지명에도 그 이치가 있지 않을까하여 본인의 능력도 헤아리지 못한 채 궁리속으로 빠져들었다.

 

먼저, <고령대>라는 지명은 1616년 성여신의 <성여신>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의 유산기와 1736년 박태무의 '登香爐峯古靈臺'기행시에서  언급이 되는데 향로봉을 <고령대>라 稱하고 있다.  고령대가 나오는 유산기의 일부와 기행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616년 <成汝信>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 10월 2일

 

피리 부는 두종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갔다.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비로봉(毘盧峰) 북쪽에 도착하였다. 학암(鶴巖)이 남쪽에 있고 잔도(棧道)가 그 동쪽에 가로놓여 있었다. 남여를 두고 걸어갔다. 이곳은 부사옹이 갑인년(1614) 가을 꿈속에 찾아왔던 곳이다. 꿈 이야기는 나의 서술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바위 허리로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벌려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1백 척(尺)이나 되는 낭떠러지 위에 있고, 동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실같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무를 부여잡고 곧장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석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몸이 날렵하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불일암(佛日庵)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만 방 안에 가득했다. 문매촌이 한 구절 읊기를 “학 떠난 소나무는 늙었고, 중 떠난 옛 절은 텅 비었네”라고 하여, 내가 “진인을 찾던 옛날 꿈속, 이 산중에 와 있었지”라고 읊어 두 구를 채웠다. 벽에 이 시를 써 붙였다.

잠시 후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부디 위험한 산봉우리에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난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 백 살도 안 되었거늘,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 하고,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미투리를 잡아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봉우리 꼭대기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승려 신섬이 대추와 후추를 넣고 달인 차 한 통을 가지고 먼저 봉우리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두어 사발씩 차를 따라주고, 바구니에 담은 홍시∙다래 등의 과일을 내어놓았다. 갈증이 저절로 해소되었다.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이 높았다. 모두 벌려 앉아 있다가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눕기도 하고, 늘어서 있다가 소나무 가지를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표연히 낭풍(閬風)에 올라 신선 세계에 가까이 온 듯하고, 공동(崆峒)에 올라 광성(廣成)을 방문한 듯하였다. 드디어 「선유사」한 장을 지었다.

 

 

* 낭풍전(閬風巓) :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 崑崙山 꼭대기에 있다고 함. 


* 공동산(崆峒山) : 공동산(崆峒山)은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북쪽에 위치해 있다. 최고봉은 해발 2123m이고 크고 작은 산봉이 수십 개이다. 산세가 준험하고 길이 험난한 것이 공동산의 일대 특징이다. 산 위에는 고건축이 8개, 9개궁, 12개의 사원, 42개의 사관(寺觀)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화민족의 시조인 헌원 황제가 특별히 이곳에 와 석실에 은거해 있는 선인 광성자에게 수양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공동산은 전국 도교의 발상지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도가 제일 명산”으로 불리고 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이듬해에 서북을 시찰할 때 이곳에 왔었다고 한다. 도교의 산 공동산은 도교, 유교, 불교 세 가지가 모여 함께 번영하는 종교의 요람으로 부상했다. 공동산은 또한 중국 5대 무술파의 하나인 공동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廣成子 ​광성자 :  고대의 선인(仙人)이었다. 공동산(하남서 임여현 서남쪽에 있는 산) 위의 석실(石室)속에서 살았다. 우리 나라 선가서(仙家書)나 중국 선가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광성자(廣成子)라는 선인이 있다, 광성자는 상고(上古)의 선인이다. 선가서 《청계집(靑鷄集)》은 선도의 시원이 광성자라고 밝혔다. 광성자가 언제 어디 사람이며 어떻게 선도를 닦아 선인이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황제(黃帝)가 청구(靑丘)땅에서 광성자로부터 선도법을 전수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황제는 비록 중국 역사에 등장하지만, 실은 우리겨레인 동이(東夷) 사람이라 한다.  광성자가 선도법을 전수받은 청구땅도 동이(東夷)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광성자 역시 동이 사람이었다고 여겨진다. [출처] 공동산《崆峒山》.

 

* 成汝信[1546(명종 1)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609(광해군 1) 64세로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호를 부사야로(浮査野老)’라 하였고 저서로는 부사집(浮査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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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협곡과 소은산막 가는 길(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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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고령대를 찾아서(170617~18)

 

 

2. 박태무의 '登香爐峯古靈臺'기행시

 

박태무의 본관은 태안(泰安) 호는 서계(西溪).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진주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60(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를 남겼는데, 성여신보다 120년 뒤 1736년 향로봉 古靈臺(고령대)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登香爐峯古靈臺 - 朴泰茂(1677~1756)


萬壑香煙起 : 만 구렁에는 향그런 연하가 피어오르고

峯晴日照紅 : 맑게 갠 산봉우리 햇살에 붉게 물들었네

地勢千尋兀 : 땅의 지세는 천길 높이 우뚝한 곳이니

天容一望空 : 한 곳 허공만으로만 하늘이 보이는구나

脚下環蓬海 : 발밑에는 봉래산 운해가 둘러져 있고

頭邊接閬風 : 머리 위는 선계인 낭풍산에 닿았다네

喬期杳消息 : 신선 왕자교를 기대하나 소식 아득하여

怊悵倚枯松 : 울적한 마음에 마른 소나무에 기대어 섰네


香爐峯 : 불일암 앞의 동쪽 봉우리 이름. 閬風山 :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 王子喬 : 周나라 靈王의 태자로 신선이 된 인물


 

 3.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古靈臺


두 기록에서 <고령대>를 접한 후,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남명선생의 유산기에 나오는 巨靈과 古靈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의 오류에 빠졌는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거령과 고령은 관계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고령(古靈)은 중국 복건성 민후현에 있는 산이 아닐까 추정을 해 보는데 아래의 기록이 그 근거이다.


   : 산 이름. 중국 福建省 閩侯縣의 瓜山 서쪽에 있다. 일명 大帽山 또는席帽山이라고도 함. 푸젠성() 푸저우시(, 복주시) 민허우현(, 민후현) 난퉁진(, 남통진)에 있는 국가급풍경명승구(5차, 2004)로 고애비폭경구(), 황관기봉경구(), 신종심원경구()의 3개 경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50.5㎢이다.<중략>전 지역에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암석, 절벽, 계곡, 동굴, 바위 등 산수가 서로 어우러져 있으며 서계폭포(西), 오룡희주(), 다마오산(, 대모산), 문필봉(), 보탑봉(), 삼선동() 등의 명소 100여 개소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바충시 풍경명승구 [十八重溪风景名胜区]


古靈은 대모산(大帽山)으로  그 안에 삼선동()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남명의 유산기에 학연의 벽면에 삼선동()이라는 각자가 있다고 하였고, 성여신의 [두류산선유일기]에도 삼선동()이라는 각자를 언급하고 있다.

 

고령(대모산) 삼선동()과 불일암 아래 학연 벽면의 삼선동() 각자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인 것일까. 옛 선인들은 중국 복건성 인후현의 대모산에 있는 삼선동()을 불일협곡의 학연에 견주어 삼선동()이라는 각자를 새겼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같은 연유로 학연을 삼선동()이라 하고 향로봉(청학봉)을 고령대 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 고령대>라는 기록은  이 후의 유산기들에는 등장하지를 않고,  남명의 제자였던 성여신과 12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박태무의 기행시에만 한정되게 나오는 걸로 미루어볼 때,  인조반정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남명의 제자들이 많아 기록이 단절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참고로 성여신의 [방장산선유일기]는 인조반정(1623년) 이전의 기록이다. 아무튼, 삼선동()과 고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 정점에 남명의 유산기가 있다.


한가지 더 三仙洞의 三仙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니, 중국 삼국시대 吳나라 왕 孫權의 할아버지 孫鍾(손종)이  동쪽 瓜山에서 三仙을 만나 오이(瓜)를 주었는데, 三仙이 孫鍾에게 오이(瓜)를 얻어먹고 명단에 묏자리를 잡아주어 후에 손자 孫權이 오나라의 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이를 얻어먹은 산이 瓜山이 되었고, '古靈(大帽算)은 그 瓜山의 서쪽에 있다.'고한다. 三仙에 대한 기록은 白居易의 시에서도 보이는데  당나라 때 張氏, 李氏, 杜氏 성을 가진 翰林學士를 이르는 말이다. 唐나라 때 白居易의 詩에 <初到江州寄翰林張李杜三學士詩 처음 강주에 도착하여 한림 장, 이, 도씨 삼학사에게 주는 시>[早攀霄漢上天衢 / 晚落風波委世途 / 雨露施恩無厚薄 / 蓬蒿隨分有榮枯 / 傷禽側翅驚弓箭 / 老婦低顏事舅姑 / 碧落三仙曾識面 / 年深記得姓名無] 尾聯에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은 일찍이 얼굴을 아는데 / 해가 너무 오래되어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네,"라는 구절에 三仙이 나오는데 古靈三仙과 무관하지 않다.



初到江州寄翰林張李杜三學士

[처음 강주에 이르러 張, 李, 杜 한림 삼학사에게 부치는 시] 


                                             白居易


早攀霄漢上天衢  일찍이 창천을 더위잡고 하늘 끝까지 올랐는데

晩落風波委世途  만년에 풍파에 휩쓸려 세상 험한 길에 막혀구려

雨露施恩無厚薄  임금님이 베푸신 은혜는 후함과 박함이 없으나

蓬蒿隨分有榮枯  궁벽한 산골사람은 분수를 따라도 성쇠가 있다네

傷禽側翅驚弓箭  상처 입은 새는 弓矢에 놀라서 날개를 움추리고

老婦低顔事舅姑  늙은 아내는 머리를 숙여 시부모님을 섬기는구나

碧落三仙曾識面  하늘에서 내려온 三仙은 일찍이 면식이 있지만

年深記得姓名無  해가 너무 오래되어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네 


隨分 : 분수를 따르다. 당연히 그러함. 물론. 蓬蒿 : 궁벽한 두멧사람
 


이상으로, 白居易(772~846)의 시와 찾아본 자료들로 미루어볼 때, 불일협곡 삼선동()의 각자는 당나라에서 유학(868~886. 17년)을 하면서 문명을 떨치고 돌아온 고운 최치원(857~미상 908년이후 행적이 없음) 선생과 밀접한 관계(고운이 이미 낙천의 시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함)가 있고, 고운의 발자취인 옥천대와 청학동, 청학봉과 청학, 학연과 학담, 삼선동()고령대(古靈臺)까지 공통의 키워드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남명의 유산기에 등장하는 거령(巨靈)은 중국 황화의 수신으로써 화산을 도끼로 찍어 태화산과 수양산을 만들고, 용문을 만든 신이라 알려져 있는데, 남명은 불일폭포의 절경을 세 번이나 다녀갔가면서 느낀 바를  "황하의 수신 거령이 큰 도끼로 학봉을 찍어 백학봉과 청학봉으로 갈라 불일 폭포와 학담, 학연, 불일협곡을 만들었다."라고 해석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지난 3월부터 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를 좇아 세 차례 산행을 하면서, 불일평전이 儒··仙이 三敎가 다투지 않고 공존하는 이상향의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산행을 떠나기 전에 선인들의 유산기를 읽어보고 그 길을 쫒아 산길을 걷고, 다녀온 후에는 그 흔적의 퍼즐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가며  다시 시간 여행 속으로 떠나보는 것은 내 산행의 또다른 큰 즐거움이다. 접한 책과 자료가 태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고령대(古靈臺)삼선동()>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논한다. 차후에 다시 보충되는 자료와 정리가 되는 내용들은 지속적으로 추가하고 수정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