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골 장원암(狀元巖)
아래로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도착하니 수석(水石)이 더욱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짐을 갑절이나 깨달았다. 계곡 주위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시 한 수가 바위 사이]에 있음을 보았다.
청학봉 앞 길 / 靑鶴峯前路
맑은 못에는 파란 삼나무가 어른거리네 / 澄潭影翠杉
우선(羽仙)이 경치 좋은 곳을 찾은 곳이라고 / 羽仙探勝處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 仍號狀元巖
이 시는 계부(季父 : 오핵)께서 직접 쓰신 시이다. 그리고 우선(羽仙 : 오숙)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호이다. 선인(先人 : 돌아가신 아버지인 오숙)께서 숭정(崇禎) 신미(辛未, 1631)에 남쪽에 관찰사로 계시면서 이곳에 유람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숙부도 또한 병술년(丙戌, 1646)에 장원급제하여 두루 구경을 다니러 왔다가 떠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난 내용이 그런 것이다.
* 오두인 吳斗寅, (1624년∼1689년)의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증조부는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이고,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오사겸(士謙)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성길(李成吉)의 딸이다. 며느리는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다.[1] 1649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工曹判書), 한성 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오핵 [吳翮], (1615~1653) : 본관 해주(海州). 자 일소(逸少). 호 백천당(百千堂). 장유(張維)의 문인. 19세에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1646년(인조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다.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에 사서(司書)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653년(효종 4)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요절했다. 학문이 깊고 역사에 밝았다. 저서에 《만세감(萬世鑑)》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 《백천당유고(百千堂遺稿)》 등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핵 (두산백과)
* 오숙 [吳䎘], [1592(선조 25)-1634(인조12년)] 조선의 문신.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본관은 해주(海州). 전적(典籍) 사겸(士謙)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되어 명나라에 보내는 진주문(陳奏文)을 초안, 그 문장이 뛰어나 이튿날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승진하고 그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유희분(柳希奮) 문하(門下)의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인조 반정(仁祖反正ㆍ1623) 후 앞서 광해군 때 유희분ㆍ박승종(朴承宗) 등에게 아부하였다는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ㆍ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扈從), 그 공으로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 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승지(承旨)를 거쳐 1633년(인조 11)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가도(椵島)의 분쟁을 수습, 백성들을 안무(按撫)했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接伴使)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송도(松都)에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숙 [吳䎘] (인명사전, 2002.1. 0. 민중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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