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의 망해정

도솔산인 2017. 12. 1. 18:43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의 망해정

 

 

진주 사람 강위수가 지었다는 망해정에 대한 기록은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와 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1937-05-18)에 등장한다.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었는데 수십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진주사람 강위수가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에 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皆中峯)

 

2. 1937년 5월18일<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진주(晉州)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운 것.

 

3.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1 김경렬 선생 著(p34~p37)

 

[신과 만난 인간들이 쉬어간 만년 역사의 주거지 천왕봉 토굴]

1957년 봄부터 천왕봉 산장의 문을 열었다.(진주사람 김순용씨) <중략> 내가 이 산장에 몇 시간 머문 것은 1961년 7월 30일이었다. <중략> 천왕봉의 지하산장은 엎드려 들어가서 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해도 온돌식이었고 가운데 칸을 질러 두개의 방을 만들었는데 한쪽은 30명, 한쪽은 20명쯤 수용이 가능 해 보였다. 그리고 지붕은 흙으로 다지고 돌과 풀을 심어 위장을 또한 비가 새지 않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중략> 이 지하 산장은 누가 축조했을까. 이 산장을 왜 만들었을까. 어쨌든 청왕봉의 지하 산장은 궁지에 몰린 빨치산들이 그들의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랬던 것을 김순용씨가 처음 발견하고 상혼을 발휘한 것이었다. 성모사당은 지하식 산장의 위쪽 20m쯤의 평지에 있었다. 둘레에는 한길이 넘는 돌담을 앞만 틔우고 쌓아올려 두 칸을 만들고 너와지붕으로 덮었으나 6.25때에 지붕이 없어졌다.

 

김경렬선생의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1 김경렬 선생 (p34~p37)'를 보면 망해당의 규모와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에 나오는 망해당을 1937년 김학수는 '바위 사이에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다.'라고 기록했고, 1961730일 이곳을 찾은 김경렬 선생은 '5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토굴'로 기록하고 있다. 성모사당의 위치는 '지하식 산장의 위쪽 20m쯤의 평지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중봉의 마암당과 더불어 망해정은 참고할만한 새로운 사실이다. 5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천왕봉의 산장이 1923년 '망해정'일 것이라는 유추하여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