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불일협곡의 학연과 학담 이야기(170311~12)

도솔산인 2017. 3. 12. 22:29

 

 

불일협곡의 학연과 학담 이야기(170311~12)

 


 

▣ 일   시 : 2017년 03월 11일 ~ 12일

▣ 코   스 : 쌍계사 - 내원골 - 불일협곡 - 옥천대 - 학연비로봉(백학봉)불일폭포 - 학담 - 불일암 - 향로봉(청학봉)

             - 상불암址 - 향로봉능선 - 향로봉(청학봉) - 소은산막 - 쌍계사  

▣ 인   원 : 5명(미산선생님, 송연목님, 김자준님+1)

▣ 날   씨 : 맑음 영상 5도, 영상15도


 

1. 산행의 개요

 

<봄 산 어디엔들 향그런 풀 없으리오마는, 내가 이 곳에 머무르는 것은 다만, 천왕이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을까. 십리 은하수 같은 맑은 물 다 먹고도 남음이 있으리니..> 丁酉早春三月 덕산의 산천재를 원 없이 향유하며 남명매의 개화를 보고도 성에 차지를 않아 남명의 유두류록을 밤마다 뒤적거렸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 밤 세석의 청학연에서 <청학연>에 대한 생각과 의구심들을 다 떨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고, 이미 매화가지에 넘칠듯 봄기운이 흐르는 이맘때면 섬진강 푸른 강물에도 봄물이 오를 새라, 지리남부의 소식이 더러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경칩을 보내고 청학동을 찾아 고운과 남명의 자취도 더듬어보고, 학담과 학연과 쌍학(청학과 백학)의 날개 품에 안긴 佛日庵의 소식도 물을 겸 산행을 계획했다.

 

 

2. 潭과 淵이란?

 

潭水, 出武陵 鐔成玉山 東入鬱林 从水 覃聲 潭水는 江名이다. 무릉에서 흘러나와 요해처 옥산이 되고 동쪽으로 鬱林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의 뜻을 따르고 覃은 聲이다.<說文>, <廣雅>에 潭을 淵也로 訓한 것이 지금의 뜻이다. 물이 고인 깊은(覃) 연못이다. 潭은 깊은 못 深淵을 뜻한다. 楚人들은 名淵을 潭이라고 하였다.<集韻 覃韻>

淵 回水也. 从水. 象形. 左右岸也. 中象水皃. 淵或省水. 囦. 古文从囗从水 淵은 빙빙 도는 물이다. 물의 뜻을 쫓고 상형이다. 좌우는 언덕이고 가운데는 물의 모양이다. 淵은 혹 물을보면 설문 고문에서 囦(못연)이다. 淵의 둘레 모양(囗)과 물을 쫓았다. <廣雅 釋詁3>에 淵 深也(깊다)라고 하였다.

 

覃 : 깊을담, 고요할담, 자리잡을담, 안정할담

 

 

 

潭과 淵의 자원을 보면 潭은 깊은 연못 深淵을 뜻하고, 淵은 빙빙 도는 깊은 연못이라는 뜻이니 潭과 淵을 엄격하게 구분을 하기는 어려우나 고대에는 구분이 되었다가 후대에 와서 潭과 淵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인터넷에서 潭과 淵을 검색해보니[지.(池).소,(沼).담(潭).연(淵).호(湖)]潭은 淵也 深也 라고 하였으니 깊은 물 주로 계곡이 깊이 파여 맑은 물이 깊게 모인 곳에 "담" 이라는 이름이 많이 있다. 淵은 池也 深也 江中沙地(물속에 모래가 있는곳)라고 풀었는데 깊고 넓은 물을 말하는 것이다.[출처 : 다음 블로그 동방삭] 아무튼 남명의 유두류록에는 학담과 학연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앞으로 여러 차례 현장 답사를 통해 풀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3. 청학동과 청학연못에 대한 의문

 

내가 청학연못을 처음 찾은 2006년 6월 24일 블로그에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촛대봉 암릉구간을 넘어서면 세석 평전의 동부 촛대봉 아래 멧돼지가 일구어 놓은 넓은 개활지가 펼쳐진다. 희미하게 이어지는 능선길 가까이 시루봉이 보이고 촛대봉의 끝자락 어디엔가 청학못이 있을거라는 짐작이 든다.  촛대봉에서 내려서며 시루봉을 바라보고 2시 방향 중간 쯤 커다란 갈라진 바위 옆으로 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 바로 저 근처일 것이다.'라고 하고 능선을 내려서니 마침 갈림길에서 만나 청학연못의 초입을 확인한다. '여기에서 20분 걸릴 겁니다.' 능선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천왕 할매가 진법을 펼친듯 갈림길이 무수히 많다.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 5분도 되지 않아 바위 틈에서 세류가 흐르는 곳 옆에 기도터(박터)가 있고, 곧바로 '靑鶴淵' 이 나타났다.

 

 인공으로 조성된 청학연못은 처음부터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슬랩 구간 아래에 만든 것은 연못으로 밀려드는 토사를 막기 위해서 인듯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좌우로 작은 계류가 흐르고 있다. 넓지도 작지도 않은 이 연못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이 척박한 세석의 고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 놓은 듯하다. 연못의 주인은 이미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호사가가 청학연못이라는 전설의 이름을 붙여 놓았으니 어찌하랴? [

청학연못을 찾아서(060624)]

 

그해 가을(061014-15) 한신지곡으로 올라와 제석단에서 가위눌리는 밤을 보내고 다시 찾은 청학연못에서 <지산>팀을 이끌고 온 <철화>님을 만났다. <지산>팀을 따라 세석산장 앞에 영신사지라는 곳을 갔는데 그것이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고, 유두류기행시를 읽고 지리동북부 점필재의 궤적을 좇아 산행을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점필재의 유두류기행시 영신암에 등장하는 靑鶴仙人의 열쇠를 풀기위해 及其也 '

점필재의 유두류기행시를 좇아서(120813~15)' 산행을 하였고, '지리 동북부 적조암에서 쌍계사까지(130517~19)'등 수차례 산행을 통해 쌍계사와 불일평전이 청학동이고 고운 최치원선생의 발자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종직의 영신암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靈神菴(영신암)-김종직

   

箭筈車箱散策回(전괄거상산책회) : 전괄과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가니,

老禪方丈石門開(노선방장석문개)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명조갱답홍진로)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수환산도고주래) : 모름지기 촌장을 불러서 술이나 받아오게.

靑鶴仙人何處棲(청학선인하처서) : 청학을 탄 신선은 어느 곳에서 사는고?

獨騎靑鶴恣東西(독가청헉자동서) : 홀로 청학을 타고 동서로 마음껏 다니겠지.

白雲滿洞松杉合(백운만동송삼합) : 흰구름 골에 가득하고 소나무 삼나무가 모여 있으니

多少遊人到自迷(다소유인도자미) : 약간의 유산객만 들어와도 저절로 길을 헤맨다네. 

千載一人韓錄事(천년일인한녹사) : 천 년의 세월 속에 일인자인 한녹사

丹崖碧嶺幾遨遊(단애벽령기오유) : 붉은 절벽 푸른 고개서 얼마나 노닐었던고

滿朝卿相甘奴虜(만조경상감노로) : 조정 가득한 경상들은 노예와 포로 됨을 감수하는데

妻子相携共白頭(처자상휴공백두) :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와 함께 백발이 되었다네.

雙溪寺裏憶孤雲(쌍계사리억고운) : 쌍계사 안의 고운을 생각하니

時事紛紛不可聞(시사분분불가문) : 어지러웠던 당시의 일을 들을() 수가 없구나.

東海歸來還浪跡(동해귀래환랑적) : 해동으로 돌아와 도리어 유랑했던 발자취는

秖緣野鶴在鷄群(지연야학재군계) : 다만 야학이 군계 속에 있었던 연유로다.

 

 

 

靑鶴仙人고운 최치원을 가리키는데 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고 청학동 세석설을 일축하고 있다. 청학선인과 청학 그리고 쌍계사의 연결 고리를 잇는 과정에서 2008년 12월에는 삼신봉에서 발목에 골절을 당해 헬기를 탔고, 그 후 4년 뒤 2013년 적조암 쌍계사 종주를 통해 막연히 청학연이 불일평전(청학동)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4. 한시로 찾아가는 청학동

 

점필재의 시 영신암에서 언급한 청학동은 세석이 아니라 쌍계사 일원 불일평전을 일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점필재가 직접 답사를 통해 언급한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시로 설명한 것이나 고운 최치원이 쌍계사에 머물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로부터 약 86년후 남명 조식은 청학동을 세 차례나 다녀간 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1558년)

 

 

靑鶴洞[청학동] - 曺植[조식]

 

 

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 은 홀로 구름을 뚫고 천상계로 돌아갔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 골짜기 온가득 구슬처럼 흘러 인간계로 흐르네

從知無累飜爲累[종지무루번위누] : 累가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됨을 알기에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 산하를 마음의 본바탕에 느끼고 보지 못했다 말하리라

 

靑鶴[청학] :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신선이 타고다님.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함.

 

 

 

靑鶴洞瀑布[청학동폭포] - 曺植[조식]

 

 

勅敵層崖當[칙적층애당] : 견고하게 맞선 층진 낭떨어지를 맞이하니

舂撞鬪未休[용당투미휴] : 쏟아져 부딪히며 싸우길 멈추지 않는구나

却嫌堯抵璧[각혐요저벽] : 도리어 요임금이 구슬 던져버린것을 싫어하니

茹吐不曾休[여토부증휴] : 마시고 토하기를 거듭하여 멈추지 못하네.

 

: 조서 칙, 견고함. : 원수 적, 맞서다. : 봄 춘, 움직일 준. : 칠 당, 부딪히다. : 막을 저, 던져버리다. : 먹을여, 마실려. 요 임금이 구슬을 버린 것 尺壁非寶[척벽비보]寸陰是競[촌음시경]이라. 한 자 되는 구슬이 귀하게 여길 보배가 아니라, 한 치의 짧은 촌음을 다투어 아껴야 한다. 요 임금의 치수사업을 곤과 그의 아들 우임금에게 맡긴 일화에서 인용함.

 

 

 

조선 중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읽고 선비들은 앞을 다투어 두류산 유람에 나서게 되는데 청학동을 다녀간 이들도 부지기수이며 유산기의 내용이 같기도 하고 혹 상이하기도 하지만 청학동의 팩트는 세석이 아니고 불일평전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니 그 기록을 '착오일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호사가들의 입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또한 그사람의 소양일 것이다.

 

 아무튼 지리산 유람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금강산과 묘향산 유람의 열풍으로 이어졌으니 우리 민족의 DNA에는 산과는 뗄래야 뗄수 없는 유전인자가 들어있어 우리 민족은 산의 민족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당시에는 사진기가 없으니 화공을 대동하고, MP3 대신 악공이나 기생을 대동하였고 지금은 탈착이 가능한 시그널을 부착하지만 석공까지 대동하여 바위 위에 이름은 물론 승유기를 남겼으니 눈이 맞은 남녀 커플이 시그널을 만들어 붙이고 다닌들 무에 대수고 허물이랴. 남명 선생 이후에 손곡 이달은 청학동 불일암을 다녀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명 선생이 다녀간 이후가 아닌가 짐작된다. 다음은 손곡 이달 선생의 청학동 관련 시이다.   

 

 

雙溪寺[쌍계사] 蓀谷 李達[손곡 이달]

 

 

洞裏雙溪寺[동리쌍계사] : 골짜기 가운데의 쌍계사

雙溪石門[쌍계대석문] : 두 개울이 과 마주하네.

山開赫居世[산개혁거세] : 산을 연 것은 혁거세이고

水接武陵源[수접무릉원] : 물은 무릉도원과 접하였네.

靑鶴巢猶古[청학소유고] : 청학의 둥지 오히려 예스럽고

丹砂井未渾[단사정미혼] : 붉은 모래 우물은 흐리지 않네.

孤雲碑尙在[고운비상재] : 고운의 비문이 아직도 남아있어

讀罷一銷魂[독파일소혼] : 읽기 마치니 잠시 혼이 사라지네.

 

 

孤雲[고운] : 崔致遠의 호, 쌍계사에 그가 지은 진감선사비문이 아직도 남아 있음.

 

蓀谷詩集卷之三[손곡시집권지3] 五言律[5언률]

 

 

佛日菴[불일암] 贈因雲釋[증인운석] 蓀谷 李達[손곡 이달] 

불일암 인운스님께 드리다.

 

 

逕通眞界[학경통진계] : 이 가는 길은 참 세계로 통하니

玄都訪紫壇[현도방자단] : 신선 사는 곳의 제단을 찾아서 왔네.

蒼巖懸瀑瀉[창암현폭사] : 푸른 바위엔 폭포가 매달려 쏟아지고

碧殿午鍾殘[벽전오종잔] : 푸른빛 사찰엔 낮 종소리 남아있네.

洞秘三珠樹[동비삼주수] : 골짜기에는 삼주수가 숨겨져 있고

囊留九轉丹[낭류구전단] : 주머니 속에는 구전한 단약이 있네.

如聞芝蓋過[여문지개과] : 이슬 받는 잔 넘치는 소리 들리면

空外玉簫寒[공외옥소한] : 하늘 밖의 옥 퉁소소리 쓸쓸하리라.

 

 

眞界[진계] : 진리가 실현되는 참 세계. 玄道[현도] : 신선이 산다는 곳, 심오한 나라. 紫壇[자단] : 道敎[도교]祭壇[제단]. 三珠樹[삼주수] : 전설 속의 진귀한 나무로 厭火[염화] 북쪽, 赤水[적수] 가에 자라는데 그 나무가 잣나무와 같고 잎은 모두 진주가 된다고 한다. 山海經[산해경] 海外南經[해외남경] 九轉丹[구전단] : 아홉 번 제련한 丹藥[단약], 이를 복용하면 3일 만에 신선이 된다고 한다. 抱朴子[포박자] 金丹[금단] 芝蓋[지개] : 버섯 모양의 日傘[일산]이라는 뜻으로, 태액지의 金莖[금경 : 銅柱(동주)인데, 漢武帝(한무제)20()의 동주를 세우고 그 위에다 이슬 받는 仙人掌(선인장)을 받들어 玉屑[옥설)을 이슬에 타서 마시며 神仙(신선)을 구하였다]을 받는 말.

 

蓀谷詩集卷之三[손곡시집권지3] 五言律[5언률]

蓀谷李達[손곡이달1539년(중종34)~1612년(광해군4)]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동 관련 한시 4수는 블친 宋錫周선생님이 국역하신 내용을 인용함. 출처 : 다음 블로그 돌지둥[宋錫周선생님]

 

 

 

 

5. 불일협곡의 학담과 학연을 찾아서

 

 

남명 조식선생의 남명집에서 유두류록을 읽은 후 불일협곡 산행기를 검색해 보았다. 조선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는 <독오당>팀에서도 다녀갔고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의 산행기가 참고가 되었다. 그리고 대전에 계시는 <백두대간늑대>님께 불일협곡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사전에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순수 산행 목적이 아닌 산행은 처음일뿐더러 산행 우선의 원칙을 나 스스로 깨기도 처음이고, 사전에 이런 예습을 한 사례가 전혀 없었으니 경로를 많이 이탈한 한 셈이다. 아무튼 불일협곡과 옥천대, 학연과 학담, 불일암과 불일폭포, 백학봉과 청학봉을 돌아보는 것이고 하산길에 소은암도 잠시 들를 예정이다.

 



남명 조식 <유두류록(遊頭流錄)>의 鶴淵과 鶴潭


가정(嘉靖) 무오년(1558) 6월(?)19일 남명집(p362~p366)<중략>十步一休. 十步九顧. 始到所謂佛日菴者. 乃是靑鶴洞也.  岩巒若懸空. 而下不可俯視.  東有崒嵂撑突. 略不相讓者曰香爐峯. 西有蒼崖削出. 壁立萬仞者曰毗盧峯. 靑鶴兩三. 棲其岩隙. 有時飛出盤回. 上天而下.
 


<중략>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로 이곳이 청학동이다. 바위로 된 묏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것과 같아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서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량을 깎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하였다.

 
下有鶴淵. 黝暗無底. 左右上下.絶壁環匝. 層層又層. 倏回倏合. 翳薈蒙欝. 魚鳥亦不得往來. 不啻弱水千里也. 風雷交闘. 地闔天開. 不晝不夜. 便不分水石. 不知其中隱有仙儔巨靈. 長蛟短龜. 屈藏其宅. 萬古呵護. 而使人不得近也. 或有好事者. 斷木爲橋. 僅入初面. 刮摸苔石. 則有三仙洞三字. 亦不知何年代也.
 


(불일암)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한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초목이 무성하니 우거져 다보록하니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약수보다도 더 아득해 보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아우성치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의 무리와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그집에 몸을 웅크려 숨어서는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겨우 [학연(鶴淵)]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愚翁與舍弟及元生諸子. 緣木而下. 徘徊俯瞰而上. 年少傑脚者. 皆登香爐峯. 還聚佛日方丈. 喫水飯. 出坐寺門外松樹下. 亂酌無筭. 幷奏歌吹. 雷皷萬面. 響裂岩巒. 東面瀑下. 飛出百仞. 注爲鶴潭. 顧謂愚翁曰. 如水臨萬仞之壑. 要下卽下. 更無疑顧之在前. 此其是也. 翁曰. 諾. 神氣颯爽. 不可久留.
 


이우옹이 내 동생 과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서성이며 굽어보고 올라왔다. 나이가 젊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모두 향로봉까지 올라갔다.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동쪽에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내려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이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이나 가파른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니,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일세”라고 하였더니, 이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내원계곡을 건너서 불일협곡 초입 무명폭포를 우회하는 좁은 테라스 길은 밧줄이 매어있고 바위에 홀드와 나무가 있어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불일협곡이 시작된다, 죄로는 백학봉과 우로는 청학봉 사이 침식으로 형성된 짧지만 거칠고 아기자기한 실폭포와 작은 소와 담이 있어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협곡이다. 위험한 구간은 두 군데정도인데 밧줄이 있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

 

옥천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폭포와 소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남명의 기록에 나오는 학연이고 바로 위가 불일폭포이다. 여기에서 계곡으로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고 청학봉으로 오르는 희미한 흔적이 있으나 좌측 백학봉으로 가기위해 백학봉 안부로 올라가는데 낙석의 위험이 있어 안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불일암을 다녀갔으나 백학봉은 미답이라 배낭을 내려놓고 백학봉을 향했다. 백학봉비로봉인데 불일협곡 서쪽에 위치해서 백학봉이라고 하였고, 향로봉은 동쪽에 있어 청학봉이라고 하였다. 최순실로 유명해진 五方의 色(*), 西, , , 黃色이라 청학봉백학봉이라고 이름한 연유이다.       

 

(*)五方色 : 오행설은 목, , , , 수 등 5요소의 변화로 만물의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다. 동방은 태양이 솟는 곳으로 나무가 많아 푸르기 때문에 청색을 의미하고 봄을 의미하며 양기가 강하다. 서방은 쇠가 많다고 백색으로 표현하였고, 가을을 의미하며 음기가 강하다. 출처 [Daum백과사전]

 

* 지명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7. 독오당 엉겅퀴님이 옛 산행기에서 정리한 청학봉과 백학봉의 위치]를 올립니다. 제 의견은 소수의견입니다. 참조하세요.

 

 

백학봉에서 청학불일암을 바라보니 남명의 유두류록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다. 다음 목적지는 불일폭포다. 불일폭포는 햇빛에 반사되어 상단의 물방울이 오색 영롱한 빛을 발하고 폭포 중간에 무지개가 피어나 폰에 담았으나 선명하게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쉽다. 불일폭포 아래로 내려가 학담을 확인하고 불일암에서 청학봉백학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학봉에 올라 불일암을 바라보니 백길의 절벽 위에 암자가 매달린 듯, 남명선생의 기록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으니 온몸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남명의 유두류록과 남명과 손곡의 산시를 읽고 목적한 바를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불일계곡을 따라 올라가 중불 마을을 지나 상불암址에 영랑재를 세우는데 석양으로 해가 넘어가더라. 어둠이 내린 뒤 상불재 쪽에서 커다란 보름달이 떠오르고 산행의 목적을 다 이루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일행들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蟾津江I

 

 

蟾津江II

 

 

 

 

 

 

 

 

진감선사비문

 

 

 

 

 

 

 

 

 

무명폭과 沼

 

 

 

 

 

 

 

 

 

 

 

 

 

 

 

 

 

 

 

 

 

 

 

 

 

 

 

 

 

 

 

 

 

 

 

 

 

 

 

 

옥천대

 

 

옥천대(*)

 

(*)옥천대(玉泉臺) :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이 깊은 불일협곡으로 들어가 천연 암굴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한 끝에 신선이 되어 영생의 천수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바로 최치원이 공부했다는 천연 암굴이다. [출처] 불일협곡 명당 옥천대(玉泉臺)|작성자 최화수

 

 

옥천대 아래 沼 玉泉(?)

 

 

 

 

 겹용소는 안소와 바깥소가 있다.

 

 

비로봉(백학봉)에서 바라 본 불일폭포

 

 

비로봉(백학봉) 정상

 

 

비로봉(백학봉)에서 바라본 불일암

 

 

비로봉(백학봉)에서 바라본 향로봉(청학봉)

 

 

불일폭포

 

 

鶴潭(?)

 

 

 

 

무지개가 피어오른 불일폭포

 

 

불일암

 

 

불일암에서 바라본 비로봉(백학봉)

 

 

불일암에서 바라본 향로봉(청학봉)

 

 

향로봉(청학봉)에서 바라본 불일암

 

 

향로봉(청학봉)에서 바라본 불일암

 

 

상불암터

 

 

돌확

 

 

 

 

 

 

 

 

 

 

 

 

 

 

 

 

혜일봉(890.8봉)

 

 

 

 

 

 

 

 

불일암 아래에 학연이 있다.

 

 

<다시 읽어보는 학연>

 

(불일암)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한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초목이 무성하니 우거져 다보록하니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약수보다도 더 아득해 보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아우성치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의 무리와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그집에 몸을 웅크려 숨어서는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겨우 [학연(鶴淵)]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활인령

 

 

 

 

소은암

 

 

 

 

내원능선

 

 

소은암 노부부

 

 

 

 

내원수행처

 

 

          

 

 

 

雙磎石門


 

6. 산행을 마무리하며

 

불일협곡은 짧지만 아주 강렬한 코스다. 청학동과 불일평전, 옥천대 학연과 학담, 청학봉과 백학봉, 불일폭포와 불일암, 쌍계사와 석문, 청학선사 최치원과 청학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지리남부의 요해처이다. 그리고 덤으로 주인 없는 소은암에 들러 내리쬐는 따듯한 봄볕 아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내려서는 길에 사진으로만 뵈었던 소은암의 노부부를 만났다.

 

노자가 말하기를 '아는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나 또한 감수재의 말대로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어찌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第依世俗所傳而觀之可也。 何必生異議乎。] 언젠가 대둔산 石泉庵 주지 天山스님이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지 원효대사의 '化諍論 皆是皆非'를 이야기하더라. '모든 것이 다 옳고 모든 것이 다 그르더라도 입을 열면 어긋난다.'는 뜻이다.[皆是皆非 開口則錯]  끝.

 

7. 독오당 이재구 선생이 옛 산행기에서 정리한 청학봉과 백학봉의 위치 

이름 년도 기록 비고
1 김일손 1489 동서쪽에 향로봉이 좌우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2 조 식 1558 - 향로봉 , - 비로봉
3 유몽인 1611 - 향로봉 , - 혜일봉 , - 청학봉
4 성여신 1616 문맥상 동 - 향로봉 , - 청학봉
5 조위한 1618 - 향로봉 , - 청학봉
6 양경우 1618 - 향로봉 , - 청학봉
7 허 목 1640 - 향로봉 , 서남쪽 - 청학봉
8 오두인 1651 - 향로봉 , - 청학봉
9 김지백 1655 - 향로봉 , - 청학봉
10 송광연 1680 청학봉 , 향로봉 , 연일봉 , 세 봉우리가 세 방면에 대치함.
11 정시한 1700년경 - 향로봉 , - 청학봉
12 김창흡 1708 - 향로봉 , - 청학봉
13 신명구 1720 - 향로봉 , - 비로봉
14 정식 1724 - 향로봉 , - 비로봉 ,혹은 백학봉 , 청학봉
15 김도수 1727 - 향로봉
16 황도익 1744 - 청학봉 , - 백학봉
17 이주대 1748 - 향로봉 , - 비로봉
18 석응윤 1800년경 - 청학봉 , - 백학봉, 곧 조식선생이 말한 향로봉, 비로봉
19 남주헌 1807 - 향로봉
20 하익범 1807 - 향로봉 ,청학봉 서 - 비로봉 ,백학봉
21 유문룡 1808 - 청학봉 우 - 백학봉
22 정석구 1810 문맥상 동-청학봉 서 - 백학봉
23 성해응 1810 - 향로봉 , - 삼석봉 ,- 청학봉
24 김성렬 1884 - 백학봉 , - 청학봉
25 하겸진 1899 - 향로봉 , - 비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