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청학연못 혹한속으로(170121~22)

도솔산인 2017. 1. 22. 18:59

 

청학연못 혹한속으로(170121~22)

 

 

▣ 일   시 : 2017년 01월 21일 ~ 22일

▣ 코   스 : 거림 - 도장골 - 시루봉 - 청학연못 - 거림 

▣ 인   원 : 3명(임향기님, 양영모님)

▣ 날   씨 : 맑음 새벽 눈 영하 12도

 

 

# 1. 폭설과 혹한이 온다는 소식에

 

오후 지리로 출발하며 미산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덕산에서 1박을 하고 영랑대로 간다.'는 말씀을 드리자 

'일로 온나.' 한 마디에 사천 곤명 미산재로 방향을 틀었다. 

 

저녁에 <공교수>님이 밀치회를 떠가지고 오시고

그동안의 산행 사진들을 화면에 띄워놓고 감회에 젖었다.

<공교수>님은 젤트를 최초로 설계 제작해서 실용화시키신 분이다.

 

새벽 덕산에서 택시 기사님에게 전화를 드리니

새재까지 운행이 불가능하고 유평까지만 갈 수 있다고 한다.

코스 변경이 불가피하여 세석으로 가기로 하였다.

 

 

 미산재

 

 

 

 

 

110101~03(중봉&영랑대)

 

 

지리 주능선 3박4일의 여정(120101~120104)

 

 

# 2. 세석으로 가는 길

 

세석으로 가는 길 또한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장골 초입부터 와룡폭포까지 신설을 밟으며 걸었다.

 

<미산>선생님은 와룡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가시고

거림 출발부터 앞서거니 뒷서니니 했던

거제 <옥국장>팀에게 선두를 내주고 뒤를 따르기로 했다.

시루봉에서 숨을 돌리고 인사도 나누지 못한채 목적지로 향했다.

 

 

 

 

 

 

 

 

 

 

 

# 3. 청학연못에 대한 의문

 

나는 오래전부터 청학연못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세석 평전의 모퉁이에 인공으로 조성된 조그만 연못이

지리를 탐구하는 분들에 의해 '청학연못'이라고 이름지어졌고

이제는 그 인근에 있는 굴까지 청학굴로 부르고 있다.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기위해 만든 산속의 커다란 둠벙을

전설의 청학과 연결지은 이들의 생각이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

 

슬랩 위에 쓰여있는 鶴洞壬의 흐릿한 각자가

靑鶴洞이 임좌에 있다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름 없이 외면을 받았다가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나 또한 1년에 한 두 번 쯤은 들르거나 머물고 간다.

 

특히 연못 바로 옆에는 사계절 얼지 않는 澗水가 흐르고 

수맥이 흐르지 않아 얼음 위에서의 잠자리 또한 편안하다.

 

연못 한 가운데에는 靑鶴仙人의 후예가 만든 눈사람이 있었고

엄동설한에도 사람의 발자국이 있으니 '청학연못'이 분명하다.

 

 

 

 

 

 

바람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밤에도

젤트는 무사했고 눈이 내리는 아침을 맞았다.

아침 영하 12도(온도계 고장?)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눈이 내려서 차를 끌고 갈 걱정을 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 4. 덕산 산천재

 

산천재에서 남명매를 보고 '웅이네곶감'집을 들렀는데

사장님이 청학연못 얼음 위에서 잔 것을 알고 계셨다.

 

어젯밤 산친과 통화를 했는데 세상에 비밀은 없더라.

영랑대 산행계획은 무산되었고 일기예보도 어긋났다.

 

 

 

# 5. 남명 조식 <유두류록(遊頭流錄)>의 鶴淵과 鶴潭

 



학담(鶴潭) 


불일암 아래 향로봉과 비로봉 협곡 아래 학연(鶴淵)

 


 

가정(嘉靖) 무오년(1558) 6월(?)19일 남명집(p362~p366)


<중략>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곧 청학동이다. 이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떠받치듯 솟아 조금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량을 깎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불일암과 향로봉과 비로봉)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까마득하여 밑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에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문득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내리다가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리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약수도 이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서로 싸우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놓아서, 겨우 그[학연(鶴淵)]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서성이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젊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모두 향로봉까지 올라갔다.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동쪽에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내려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이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이나 가파른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니,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일세”라고 하였더니, 이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 6. 점필재 유두류 기행시 靈神菴에 등장하는 靑鶴仙人

 

 

箭筈車箱散策回(전괄거상산책회) : 전괄(창불대)와 거상(대성골)을 산책하고 돌아가니,

老禪方丈石門開(노선방장석문개)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명조갱답홍진로)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수환산도고주래) : 모름지기 촌장(은둔선비)을 불러 술이나 받아오게.

 

靑鶴仙人何處棲(청학선인하처서) : 청학 탄 신선은 어느 곳에서 사는고?

獨騎靑鶴恣東西(독가청헉자동서) : 홀로 청학을 타고 마음껏 동서로 다니겠지.

白雲滿洞松杉合(백운만동송삼합) : 흰구름 골에 가득하고 소나무 삼나무가 모여 있으니

多少遊人到自迷(다소유인도자미) : 약간(어느정도)의 유산객만 들어와도 저절로 길을 헤맨다네.

 

靑鶴仙人 : 고운 최치원

 

千載一人韓錄事(천년일인한녹사) : 천 년의 세월 속에 일인자인 한녹사는

丹崖碧嶺幾遨遊(단애벽령기오유) : 붉은 절벽 푸른 고개서 얼마나 노닐었던고

滿朝卿相甘奴虜(만조경상감노로) : 조정 가득한 경상(정승판서)들은 노예와 포로 됨을 감수하는데

妻子相携共白頭(처자상휴공백두) :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와 함께 백발이 되었네.

 

韓錄事 : 고려 때의 명사(名士) 한유한(韓惟漢)을 말함.

 

雙溪寺裏憶孤雲(쌍계사리억고운) : 쌍계사 안에 고운을 생각하니

時事紛紛不可聞(시사분분불가문) : 어지러웠던 당시의 일을 들을 수가 없구나.

東海歸來還浪跡(동해귀래환랑적) : 해동으로 돌아와 도리어 유랑했던 발자취는

秖緣野鶴在鷄群(지연야학재군계) : 다만 야학이 군계 속에 있었던 연유로다.

                                                             (고운이 여럿 가운데 홀로 특출난 까닭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