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 천왕봉&영랑재I(151231~160102)

도솔산인 2016. 1. 2. 23:51

 

지리동부 천왕봉&영랑재I(151231~160102)

 

 

▣ 일   시 : 2015년 12월 31일 ~ 2016년 1월 2일

▣ 코   스 : 새재 - 영랑대 - 중봉 - 천왕봉 - 중봉 - 써리봉 - 새재

▣ 날   씨 : 최저 온도 영하 5도(맑음) 셋째날 영하 2도

▣ 인   원 : 4명(미산선생님, 진정화님, 송연목님) 1일 합류(이장님 부부)

 

 

♣ 1일차(151231)

 

이상 기온으로 겨울비가 이어지더니 계절의 질서가 무너지는 매화소식 들리고

남쪽 지방 진달래와 개나리는 물론 과수나무에도 꽃이 피는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해도 넘기지 않았는데 한겨울에 꽃이 핀들 참 봄이런가?

 

각설하고 서울에서 오는 정화씨를 원지에서 픽업하기 위해 덕유산을 지나는데 온산이 새하얗다.

세모를 지리의 하얀 설산에서 보내겠다는 기대감은 육십령 터널을 빠져나가면서 일순간 무너졌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을 조금 열자 온기가 차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덕유산 휴게소

 

 

산천재

 

 

 

 

 

봄 같은 겨울 날 덕산장에서 <미산>선생님을 모시고 새재로 올라가는데

먼저 도착한 송연목씨에게 '유평을 지나니 빙판길이라 올라가기 어렵다.'는 전화가 왔다.

조개골산장의 트럭이 눈길에서 미끄러져 사고가 났고 택시도 도로 옆에 쳐 박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평에 주차를 하고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 햇볕에 녹아서 새재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 목적지까지 못가면 중도에서 유숙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조개골 다리를 건너자 마자 산 같은 배낭을 메고 가는 密村 노상규씨를 만났다.

密村은 사람들이 '빡빡' 또는 '밀양 촌놈'이라고 불러서 내가 특별히 지어준 상규씨의 別號다.

'오랜만일세.' '그대는 密村이 아닌가?' 추석 때 만났던 밀촌을 추월해서 살짝 눈이 덮인 산길을 나아갔다.

무제치기의 문을 열고 내밀한 속을 엿보니 얼음이 얼어붙었고 비둘기봉은 한쪽 왼가슴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3시가 다 되어 출발...

하봉헬기장에 오르니 을미년 마지막 해는 아직 남아 있었고 상고대 또한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었다.

<미산>선생님은 한걸음에 하봉으로, 나는 영랑대 조망 바위에서 석양을 담았는데 폰 사진이니 오죽하랴.

다만 85년도부터 약 4년간 치밭목 산장에 있었던 <송연목>씨와 1년 전 산행 약속을 지켰고,

함께 송년 일몰과 신년 일출을 보았고 그가 영랑대에서 처음 泊을 한다니 위안을 삼을뿐이다.   

                                  

 

 

 

 

 

 

 

 

 

 

 

 

 

 

 

 

 

 

 

 

 

 

 

 

 

 

 

 

 

을미년은 이렇게 저물었고 살아온 지난날을 회고하니 참 내 멋대로 살았더라.

한 가지 기특한 것은 부모님 덕분에 정규교육을 받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한 여자와 30년을, 한 직업에 30년을, 지리산을 30년 넘게 다녔고, 3남매를 두었으니

아주 잘못 산 인생은 아닌 것 같았다.

 

늦은 밤 영랑대 위에 올라가 핸드폰을 켜니 집사람에게 갓독이 왔다.                                  

집사람은 어머님과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속초로 여행을 갔는데 식사를 하는 사진이 들어왔다.

누님이 양양에 있는 비취호텔 오너인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고마움으로 해변가 방 두 칸을 내주셨다.

                                   

세상 사람들이여! '형제간에 우애 없는 오륜을 모르는 놈과 벗삼지 말라.'

 

누님이 내게 승용차를 사준다는고 했는데 일언지하 거절하였으니 오장육부가 우애를 지키는 것이다.

아무리 형제지간이지만 수고의 댓가를 받기위해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아닐터

더욱 칭찬 받을 일도 간섭 받을 일도 아니고 종가집 장손으로 오로지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누님들과 우리 가족이 해외여행을 갔지만 난 홀로 지리와 설악에 들었다.

명문 대전여고 출신으로 학창시절부터 근동에 이름 난 수재였고,

아버지는 딸이라고 학비를 주지 않아 서울에서 주경야독으로 대학에 다녔다.

지금은 자수성가하여 수백명의 일자리를 만든 CEO로 성공했다.

                                   

 

 

 

 

 

 

지금부터 120년 전 을미년과 병신년은 우리 청흥문중의 특별한 해였다.

다음은 2002년 내가 拙譯한 止山遺稿 卷三 병신년(1897년) 창의 일기 첫부분이다.

 

 

止山遺稿 卷三(日記 丙申二月 仗義時 建陽 二年)

 

邦運不幸 奸臣弄權 賣國通商 開門納賊 島夷侵犯 不止一再 而至於乙未八月二十日之變 而極矣 害我國母 勒削我君父 是可忍也 孰不可認也 謂天孔昭弘集允中之輩 次第授首 謂天難諶永孝吉濬之徒 猶尙假息也 春秋有復戕之義 何代無勤王之師 所以八關擧義十室有忠 湖嶺列鎭擧 皆樹風而鄙微如某者 徒費添室之憂矣

 

國運(국운)이 불행하게도 奸臣(간신)이 권세를 제 마음대로 휘둘러 나라를 팔아 통상을 하고,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여 섬 오랑캐(일본)가 침범하기를 한 두 번에 그치지 아니하더니 乙未(을미:1895)년 팔월 이십일의 변(명성황후 弑害)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도다.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임금)의 머리를 억지로 깎았으니 이것이 참을 수 있는 일인가? 누구든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폐하께서 '金弘集(김홍집)魚允中(어윤중)무리를 매우 밝다'라고 생각하시고 차례로 품계의 앞자리 除授(제수)하였고, 폐하께서 '朴永孝유길준의 무리를 믿기 어렵다' 생각하시고 오히려 잠시 쉬게 하였다. 春秋(춘추)復讐之義[복수지의(원수를 갚는 의리)]라는 말이 있는데 어느 대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군사가 없겠는가? 여덟 역참에서 의병을 일으킨 까닭은 열 집마다 충신이 있고 영호남의 列鎭(열진)에서 일어나 다 風敎(풍교)를 세워서 식견이 좁은 나 같은 사람이 헛되이(다만) 가족에게 근심을 더할 뿐이다.[지산유고 권3 창의일기에서]

 

明成王后(명성왕후18511895):高宗皇帝(고종황제)의 비. 을미사변으로 45세의 나이로 일본 浪人(낭인)들에게 시해됨.

 

어머니께 '어디를 다녀오셨냐?'고 여쭈니 '서울에 다녀왔다.' '동해를 보셨느냐?'고 하니 '바다를 봤다.'고 하시더라. 120년 전 선대의 丙申년 창의가 1942년 우리 가문에 시집온 어머니에게도 미쳤으니 해방 전 우리 가족은 유민이 되어 함경남도 고원군 개마고원에서 일제의 핍박을 피해 토굴을 파고 칡을 캐서 칡 수제비로 3년 겨울을 연명했다고 한다. 칡이 웰빙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는 요즈음 오히려 초근목피가 장수의 비결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은 예측할 수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