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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347] 서북인(西北人) 차별 관행

도솔산인 2014. 11. 3. 12:51

[고전산문 347] 서북인(西北人) 차별 관행

 

[번역문]

나라에서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가 들어간 해를 식년(式年)으로 삼아 3년마다 시(詩)와 부(賦), 삼경(三經)의 뜻, 사서(四書)의 의문(疑問)으로 선비 200명을 뽑는데 이를 진사라고 한다. 이조에서는 그들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관직에 임용한다.

매번 진사시가 끝나면 대궐에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200명의 합격자가 모두 뜰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절하고 교지를 받아서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난다. 이때는 기러기 행렬처럼 나아가고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물러나가 서로 간에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대궐 문을 나간 뒤에는 처지가 현격히 달라진다. 서울이나 경기 지방에 사는 자들은 대부분 차례대로 관직에 임용되고, 벼슬이 현령이나 목사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싼 옷에 좋은 말을 타고 평생 영예와 부를 누린다. 반면 먼 지방에 사는 자들은 곧바로 서둘러서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난삼(襴衫)* 한 벌에 연건(軟巾)** 하나를 쓴 채로 돌아와 부모님을 뵙고 조상의 묘소에 성묘한 다음 친지들을 두루 찾아뵙는다. 그러면 온 집안이 기뻐 웃고 온 마을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고 구경하지만, 합격의 기쁨과 영광은 열흘이면 끝난다. 그러고 나면 아무리 출중한 재능이 있는 자라도 모두 포의(布衣)로 지내다가 산골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슬픈 일이다.

 

성상께서 즉위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 내가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부임하였다. 고을에 진사시 합격자 명단이 있어서 살펴보았더니, 1450년부터 지금(1786)까지 나온 합격자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중 관직에 제수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아! 하늘이 그들의 벼슬살이에 제한을 두고자 한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하러 재능을 부여하여 이름을 얻게 했겠는가. 국가가 그들의 임용을 막고자 한 것인가? 그런데 법령을 살펴보아도 명시된 조항이 없다. 게다가 성상께서는 인사가 있을 때마다 서북 지역 사람들을 거두어 쓰라고 거듭거듭 간곡하게 당부하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를 드러내어 하늘은 사사로움이 없고 국가도 사사로움이 없으니 인사를 담당하는 자들은 의당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다. 또 정주의 진사가 관직에 임용된 몇몇 사례는 모두 100년쯤 전에 있었고, 지금은 그마저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내가 또 이를 드러내어 세속의 습속이 갈수록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과거 유생, 진사, 생원 등이 입었던 옷.

**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이 합격 증서를 받을 때 쓰던 건(巾).

 

[원문]

 

國家以子午卯酉爲式年, 其年以詩賦三經義四書疑問, 取士凡二百人, 謂之進士. 吏曹拔其尤以注官. 每進士試訖, 上臨殿放榜. 二百人者悉入庭中, 抑首聽臚唱, 拜受敎旨, 懷而趨出, 蓋鴈行而進, 魚貫而退, 無以異也. 及出殿門, 在京若近京者, 大率次第注官, 仕至令長或牧伯, 鮮衣怒馬, 享榮利, 終其身. 在遐遠者, 卽促裝還鄕, 不過衣襴衫一領、戴軟巾一頂, 拜家慶, 省墳墓, 遍謁所親知. 家衆懽笑, 巷陌聳觀, 旬日而止. 雖有茂才異等, 皆以布衣伏死於巖穴, 悲夫! 上之十年, 余來守定州. 州有進士題名案, 取而考之, 自景泰庚午迄于今, 著名凡若干人, 注官者廑若干人. 噫! 天欲限之耶? 何爲賦其才, 使得成名? 國家欲錮之耶? 考絜令無之. 且上每當政注, 以收用西北人, 申戒至懇惻. 吾故表而出之, 以見天之無私, 國家亦無私, 而爲銓官者, 宜知所畏. 州之注官者若干人, 皆在百年上下, 今則絶無. 故吾又表而出之, 以見俗習之流失, 愈往而愈甚云.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定州進士題名案序(定州進士題名案序)」,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늘어나고 있다. 요즘 같은 때에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큰 장점 때문이겠지만,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학연(學緣) ․ 지연(地緣) ․ 혈연(血緣)과 상관없고, 화려한 ‘스펙’을 갖지 않아도 실력만 갖추면 되는, 비교적 공정한 리그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조선 시대 진사시는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의 하위직 공무원 선발고사와 같은 성격을 가졌던 듯하다.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시험이기도 했지만, 합격하면 하급 관료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유생이라면 누구나 진사시를 치르려 했을 터인데, 3년에 200명밖에 뽑지 않았으니 그 경쟁률이 어떠했을지, 합격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뒤였다. 똑같이 시험을 쳐서 힘들게 합격해도 정작 임용에서는 출신 지역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하였다. 명문대가와 고위 관료들이 많은 서울과 경기 지역 출신들은 합격 후 곧바로 임용되어 지방 수령까지 될 수 있었던 반면, 시골 출신들은 대다수가 진사시에 합격했다는 영광으로 만족하고 평민과 다름없이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인용된 이가환의 글에 보이는 정주(定州)는 함경도와 함께 ‘서북(西北)’으로 지칭되던 평안도 고을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서북 지역 사람들의 기질이 사나워 반역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이들을 중앙 및 중요 관직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니 ‘서북인(西北人)’으로 불리는 정주 지역에 진사시 합격자가 많지도 않고, 설사 합격했더라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정에서는 서북인에 대한 인사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잘못된 관례를 시정하라는 왕명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별반 효과가 없었다.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발생한 홍경래 난의 원인 중 하나로 이 지역에 대한 차별을 드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결국, 서북 지역민에 대한 심한 차별이 농민항쟁까지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는 이러한 관행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일까? 문제를 인식하고 시정하려 했음에도 실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을 통해 이익을 얻거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은 아닐까? 힘 있는 중앙 관료와 문벌 세력이 서북 지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조장하거나 부당한 차별을 방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과거 서북인에게 가해졌던 형태의 지역 차별은 이제 많이 사라졌지만, 그 잔재는 아직도 사회 곳곳에, 우리들 의식 속에 남아 있다. 개각이 발표되면 발탁된 인물들의 출신 지역을 분석하는 기사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선거 방송의 현황판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지역의 색깔이 드러난다. 평소 습관처럼 출신 지역을 물어보는 우리들이다. 사람과 지역을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게 될 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조순희 글쓴이 :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역서
    - 『홍재전서』, 『국조보감』,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국역 기언 5』,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명재유고12』,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허백당집3ㆍ4』, 한국고전번역원, 2011~2012
    - 『국역 회재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