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고전의 향기 242] 대동법과 광해군, 그리고 이원익

도솔산인 2012. 11. 7. 13:38

[고전의 향기 242] 대동법과 광해군, 그리고 이원익

 

최근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의 15대왕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팩션(faction) 사극이면서도 광해군 시대에 일어난 국내외 쟁점을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도 결부시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부각시킨 정치적 쟁점은 대내적으로는 대동법(大同法) 실시, 대외적으로는 후금(後金)과 명(明)나라를 둘러싼 외교적 선택이었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평가받는 대동법, 대동법은 세법이 갖는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시행을 보지 못하였다. 지주의 세금 부담이 강화되는 세법이기에 당시 기득권층인 지주들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개혁 의지와 함께 대동법의 추진에는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같은 실무 관료의 힘도 컸다. 이원익은 선조ㆍ광해군ㆍ인조 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진기록을 세운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란의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선조 후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출생으로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즉위 초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장자도 적자도 아닌데다가 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건재해 있어서, 즉위 이듬해에서야 명(明)나라로부터 정식 왕으로 승인받을 수 있었다. 광해군을 지지한 집권 북인세력도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권력기반이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왕실의 적통이 아닌 왕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안정된 정국운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심 확보가 우선임을 인식하였다. 당시 광해군이 내린 전교(傳敎)에는 이러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우선 목전의 긴박한 일로 말하면, 백성들의 일이 매우 안쓰럽고 측은하기 그지없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와 조사(詔使)의 사행(使行) 때 드는 비용을 털끝만한 것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걷어내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만약 위로하고 구휼할 대책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는다면 방본(邦本)이 먼저 동요되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경들은 백방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조금이나마 은혜를 베풀도록 힘써야 한다. 예컨대 해묵은 포흠(逋欠),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 군졸들의 도고(逃故), 세도를 부리는 호강(豪强)들의 침릉(侵凌)은 물론 이밖에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은 일체 견감하고 개혁시켜 혹시라도 폐단이 되는 일이 없게 하라. 공상(供上)하는 방물(方物)과 내수(內需)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감하겠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 소회를 다 진달하게 하여 가언(嘉言)이 감춰지지 않게 되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이런 뜻으로 대신에게 말하라. (『광해군일기』 1608년(광해 즉위년) 3월 2일)

 

[姑以目前切迫者言之, 生民之事, 極可愍惻。 山陵之役, 詔使之行, 其所需用, 秋毫盡出於民力, 哀我赤子, 若之何能堪 儻不爲急講撫恤之策, 邦本先搖, 將無以爲國。 予甚瞿然, 卿等百爾思度, 務宣一分之惠。 如積年逋欠, 不急貢賦, 軍卒逃故, 豪勢侵凌, 此外凡干病民之弊, 一切蠲革, 無或有弊端。 如供上方物內需之事, 則予當量減焉。 且令中外, 盡陳所懷, 使嘉言罔伏, 不勝幸甚。此意言于大臣]

 

광해군은 당시 백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던 선조의 산릉 역사(役事), 중국 사행 비용 등을 비롯하여 부세의 각종 포흠이나 공부(貢賦), 군역, 토호들의 침탈, 진상 방물, 내수 비용 등을 감면해주거나 개혁하도록 하면서 아울러 국정쇄신책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수렴도 꾀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 초의 현안은 민생안정을 통한 국정운영 기반의 확보였고, 그 중에서도 공물 변통은 백성들이 실제 체감할 수 있는 중요한 개혁책이었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원익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광해군일기』의 다음 기록은 대동법 실시의 배경과 함께 이원익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이 잘 나타난 있다.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ㆍ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전(田) 1결당 봄ㆍ가을에 8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두 가운데 매번 1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해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 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선혜청이라 이름 하였다. 의정(議政)을 도제조로 삼고, 호조 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員)을 두었다. 이후로 수령이 적임자가 아닌 경우는 불법으로 더 거두어들여도 금하지 못하였고, 또 연호(烟戶)를 침해하더라도 법의 취지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전의 전결에 대한 역(役)은 이에 힘입어 조금 나아졌다. (『광해군일기』 1608년(광해 즉위년) 5월 7일)

 

[設宣惠廳。初領議政李元翼議: “以各邑進上貢物, 爲各司防納人所搪阻, 一物之價, 倍蓰數十百, 其弊已痼, 而畿甸尤甚。 今宜別設一廳, 每歲春秋, 收米於民, 每田一結, 兩等例收八斗, 輸納于本廳, 本廳視時物價, 從優勘定, 以其米, 給防納人, 逐時貿納, 以絶刁蹬之路。 又就十六斗中, 兩等各減一斗, 給與本邑, 爲守令公私供費, 又以路傍邑, 多使客, 減給加數, 兩收米外, 不許一升加徵於民。 惟山陵詔使之役, 不拘此限, 請畫一施行。” 從之。 以傳敎中有宣惠之語, 以名其廳。 以議政爲都提調, 戶判兼爲副提調, 置郞廳二員, 是後守令不得人, 則法外加收, 亦不能禁, 或侵及烟戶, 不能盡行法意。 然畿甸田結之役, 賴此少蘇矣。]

▶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초상화

 

이원익의 주장은 대동법을 전담할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그에 걸맞은 관원을 배치한 다음 결당 쌀 16두를 봄ㆍ가을로 나누어 8두씩 징수하며 이를 봄ㆍ가을로 7두씩 수납, 경기도가 부담한 일체의 경납물가(京納物價)로 사용하여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또한 봄ㆍ가을로 거둔 1두씩은 각 군현에 유치하여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충당케 하는 방안이었다. 선혜청은 당시 물가를 참작하여 방납인에게 급가(給價)하고 방납인은 지정된 물품을 각사에 납품토록 하며, 산릉ㆍ조사의 역을 제외하고는 쌀 16두 이외에 일체의 징수를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 이원익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의 저항으로 오래도록 실시되지 못한 대동법은 광해군의 개혁 의지와 현실을 진단한 이원익의 노력으로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중기의 학자 이식(李植)이 쓴 이원익의 시장(諡狀)에도 대동법 실시에 큰 기여를 한 이원익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육경(六卿)을 공의 자택으로 보내 백성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게 하니, 공이 선혜청을 설치하여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즉 매년 봄ㆍ가을에 백성의 전지(田地) 1결당 각각 백미 8두씩을 거두어 모두 경고(京庫)에 납부하게 한 다음, 때맞추어 각사(各司)의 사주인(私主人)에게 나누어 주어 스스로 상공(上供)하는 공물을 사서 바치게 하되, 시장 가격의 고하를 고려하여 여유가 있게 자금을 내줌으로써 사주인으로 하여금 자급하게 하였다. 이밖에는 한 자의 포목이나 한 되의 쌀이라도 민호(民戶)에서 추가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여, 사주인이 방납하는 행위를 통해 열 배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되는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 조항들이 참으로 정밀하여 앞으로 계속 시행할 만하였다. 광해군이 우선 경기 지방에서 시험해 보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거실(巨室)과 호민(豪民)과 사주인들 모두가 방납으로 얻는 큰 이익을 잃자 백가지 방도로 저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광해군이 여러 번 이를 그만두려고도 하였으나, 경기 백성들이 다투어 그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행해지면서도 폐단이 없다.1)

[光海仍遣六卿。就第問民事。公請設宣惠廳行大同法。每春秋。逐民田一結。各收米八斗。輸於京庫。以時俵給。各司私主人。使自貿納上供諸物。視時市估高下而優剩其數。使私主人。亦得以自資。此外不許尺布升米。加徵民戶。以革私主人防納什倍之弊。科條精密。經久可行。光海命先試之畿內。巨室豪民與主人等。皆失防納大利。百途沮擾。光海屢欲罷之。以畿民爭言其便。故行之至今無弊。]

 

이원익은 선조ㆍ광해군ㆍ인조대의 대표 관료로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평소 검소하게 살아 청백리(淸白吏)에 오를 정도로 성품과 능력에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광해군에게 “여러 신하 중에 오직 모(某:이원익)에게만 큰일을 맡길 수 있다. 나는 후한 예로 그를 대우하지 못하였다. (너는) 성의를 보여야 그를 쓸 수 있을 것이다.[群臣惟某可任大事 予不能用優禮以待 示以誠意 可以爲用也]” 2)라고까지 하였다. 이 말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원익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부친의 뜻을 이어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원익은 남인이라는 소수 정파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붕당의 폐단 극복과 능력위주의 인사정책 등 국정전반에 걸친 과감한 개혁책을 주장하였다. 이는 즉위 초 민심수습과 국정쇄신책으로서의 의미 뿐 아니라 대북 세력의 일방적인 정국운영을 견제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원익은 선조ㆍ광해군ㆍ인조대를 살아간 관료이자 학자였다. 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학문적 능력을 실무 정책에 반영한 관료로서의 성향이 짙어 보인다. 그러나 관료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관료로서의 실무능력보다는 학파적ㆍ당파적 입장을 중시하며 조선 중ㆍ후기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원익은 선조에서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국가의 요직을 맡으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방의 다양한 현안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수습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현안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합리적인 처신은 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게 했다. 이원익과 같은 인물이 그리운 것은 국익이나 민생보다는 명분이나 이념, 당론이 우선시되는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 때문은 아닐까?

 

1)『택당집(澤堂集)』, 택당선생별집 8권, 「영의정완평부원군이공시장(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2)『오리선생문집(梧里先生文集)』 부록 권2, 유사(遺事).

 

신병주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